한반도 비극과 불행의 기원
한반도 비극과 불행의 기원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2.11.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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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쓰라 다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은 러시아와 일제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일제가 한반도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이 기록의 내용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이 있었다.

각서에 따르면 일본 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에서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거나 조약이 체결된 것은 아니므로 이는 미국이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협력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태프트가 자신의 의견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만의 의견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 밀약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를 상호 양해한 일종의 신사협정이었고, 이 합의로 대한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일제는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배경

러일 전쟁이 끝을 바라보던 즈음,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7월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를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제국 수상 가쓰라 다로와 비밀회담을 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각서)은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가 1905년 7월 27일 회동에서 나눴던 대화 중 기밀로 분류된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각서는 1905년 7월 29일에 만들어졌다.만주를 둘러싸고 일제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던 1904년 2월, 일제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맺는 동시에 아서항을 공격해 러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내부의 혁명 세력의 반발로 인해 전쟁에 힘쓸 여력이 없었던 제정 러시아의 군대는 패전을 거듭하였다. 일제는 1905년 5월 대한시설강령을 통해 한반도 내 주요시설을 강점했으며, 대한해협의 동쪽 수로인 쓰시마 해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를 침몰시켜 승기를 잡았다.

내용

이 회동에서 다뤄진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동아시아 전반에 관한 논의 : 가쓰라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일본미국영국 간의 협조가 있을 때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에 관한 논의 : 태프트는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이 일본에 최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공격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대한제국에 관한 논의 : 가쓰라는 러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솔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러일 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전쟁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게 하도록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이며, 이는 일본에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태프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동의했다.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말했다.

각서의 요지

1.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親日)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2. 극동의 전반적 평화의 유지에 있어서는 일본 · 미국 · 영국 삼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3.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極東)지역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이 비밀협정은 20세기 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일본이 한반도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들어맞는다는 입장을 보였는데,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이 밀약은 1905년 7월 29에 이루어졌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배제한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과 9월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5일)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인정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과 일본과 소련놈들의 악한 음모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2차대전이 종식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대전이 종식되고 나서 전후 처리는 점범국인 일본을 나누어 통치하든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점범국 독일은 그 책임을 물어서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聯合軍의 獨逸占領) 혹은 연합군 통치 시대(聯合軍統治時代)란,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무조건 항복과 패망으로 4개국 연합군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통치하기로 했다.

전범국가이면서 패전국이 된 독일의 무정부상태를 막기 위해 1945년 6월 5일부터 4개국에 의해 통치가 불가피했었다. 독일의 행정권과 통치권은 연합군이 수행하게 되었고, 군대도 해산되었으며, 나치의 지도자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약 500만명의 사람이 희생되었고, 이 가운데 50만명은 폭격으로 사망하였다. 패전 이후 독일 동프로이센, 동부 지역(포메른 지방, 슈테텐 지방 등)은 소련과 폴란드에 양도되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은 식량 보급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고 지하 경제가 성행하였고 범죄가 증가했으며, 위생 시설의 부족 등으로 전염병이 돌았었다.

영미의 관할지역을 베스트초네(Westzone), 거기에 프랑스 관할지역을 더해 트리초네(Trizone)고 했으며 소련 관할지역을 오스트초네(Ostzone)라고 했다. 한편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합의하에 독일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서방 연합국 점령 지역인 트리초네를 자유 시장원칙에 의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으로 탄생시켰고, 소련군 점령지역인 오스트초네에서는 계획 경제를 고수하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탄생하였다. 그 결과 독일은 냉전의 시대 대립과 분단의 시대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독일과 같이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에 대해서는 왜 독일처럼 처리하지 않고 아무런 죄도 없는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분활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우리 나라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깊이 생각 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해서 규명된 문건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당시 미국과 소련은 조선(우리나라)를 일본이 소유했던 땅으로 인정하고 그 일본으로부터 조선땅을 할양받는 것으로 전범국가 일본에게 면죄부를 쥐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도 나쁜짓을 했지만 구 소련과 미국도 우리 민족에게 악한 짓을 한 것이고 지금도 떠나지 않고 있는 미국 군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 악한 밀약은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국민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후에 당연히 미국은 패전국 일본에 대하여 전쟁 피해 보상을 받아 내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에게 지불한 전후 피해보상으로 한반를 미국에게 넘겨 준 것으로 끝을 내고 말았다. 그래서 2차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 미국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해 들어 온 것은 해방군으로 입성한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모르고 있는 문제다. 그래서 미군이 한 반도에 진주한 즉시로 한반도에는 미군정(미국 군사정부)가 설치 되었던 것이다.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이 이에 대하여 반대했지만 맥아더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미군을 등에 업고 미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북 분단의 원인을 북한이 시작한 한국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전쟁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원수로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와 같이 어쩌면 이미 통일이 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은 맞지만 원인은 아니다.

분단의 근본 원인

한국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베리아와 만주라는 거대한 대륙세력과 태평양의 해양세력이 격돌하는 곳이다. 평화시기에는 모든 문물이 합류하는 창조공간이 되지만, 양대 세력이 맞부딪히는 경우에는 자연히 희생양이 된다.  이는 수십년 째 계속 전쟁 상황에 처해 있는 중동 특히 팔레스틴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 두 지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4개월 전 미국과 일본이 맺은 비밀협약의 이름과 그 내용

미국은 1882년 무력함대를 앞세워 조선과 우호조약을 맺긴 했지만, 우호국으로 예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1904년 미국과 영국의 도움에 힘입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에 거액의 전쟁보상금을 요구하자, 스스로 중재에 나선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은 전쟁보상금 지불요구 포기 조건으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설치할 권리를 일본에 줌으로서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성사시켰다. 이 조약 바로 두 달 전 1905년 7월 미 국방장관 윌리엄 하워드 테프트는 동경으로 가서 외무대신인 다로 가쓰라와 비밀협약을 맺는데, 그건 일본이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위치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보장에 대한 답례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합의서에 서명을 한 것이다.

4개월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국방권을 찬탈하는 을사늑약이 일어났고, 이로써 외국 대사관은 모두 조선을 떠나고,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옷을 벗는 굴욕을 겪는다. 5년 후 형식적인 한일합방이 있었고, 이로써 천년 왕국의 마지막인 대한제국은 끝을 맺는다. 당시 미국은 합병을 축하하였고. 미국 선교사들 대부분은 이에 동조했다.

그 후 일제는 중국 대륙 진출을 꾀하면서 미국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독일 이태리와 함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여 비록 패하긴 하였지만, 정작 피해를 입은 나라는 조선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국의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게 대일전에 참여하도록 촉구를 하였으며 소련은 한반도에 소련식 공산국가를 세울 야심으로 8월 갑작스레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파죽지세로 몰고 내려온다. 당시 남태평양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던 미군은 일본이 예상과 달리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을 제안하자,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방지하기 위해 38선 분단 점령을 제안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남북분단의 시작이자 직접 이유이다.

당시 일제는 소련보다는 미국에게 항복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공산주의체제는 일본의 오래된 천황제와 이에 기초한 귀족계급제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비록 미국과 전쟁을 치루긴 했지만,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을 미리 타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군은 소련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선 분단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면 왜 미국은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패전국 일본을 분할하는 대신 한반도 분할을 제안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가장 꺼려하고 있었다. 일본을 분할하게 되면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하겠지만, 미국은 한국은 버릴 수 있어도 일본은 결코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독도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은 일본을 편들고 있다. 우리는 외교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의 찰떡궁합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남한 기독교인들의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신앙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정치에 있어서는 큰 실책이다.

북위 38선을 따라 잣대로 선을 긋고 미국과 소련이 각각 점령 지배하는 당시를 회상해 보라. 이는 천년 이상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한 혈족을 적으로 내어 모는 야만적 행위였다. 지금도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국경선을 보라. 영국과 불란서 그리고 독일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잣대를 대고 제멋대로 국경선을 긋고 나라를 만들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노예로 팔고 사는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길 뿐더러 심지어는 성서에 근거한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살아왔던 무도(無道)한 백성들이었음은 생각할 때, 이는 하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만큼 국제정치는 무정(無情)한 것이다.

간혹 학자들 가운데에는 한국 통일을 독일 통일에 비교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적절한 비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서로 부딪히는 반도로서의 한국과 유럽 대륙의 중앙 북단에 위치한 독일과는 그 지정학적 위치가 다르다. 둘째 한국은 남북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반면 서독과 동독은 서로 간에 전쟁이 없었고, 셋째 독일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이지만, 한국은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외세에 흔들림이 없는 민족자주 정신이 매우 강한 반면 우리는 일제의 35년 식민지 지배를 포함한 근세 백년간 외세에 의해 민족자주성이 상당부분 훼손당했기 때문이다.

점령국으로서 진주한 미군의 실체

194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에 게양된 국기는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맥아더의 포고령에도 분명히 나와 있지만,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왔다, 그래서 8월 15일 일본왕의 항복 선언 직후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올라갔지만, 바로 다음날 이 사실을 안 미군은 이를 내리도록 명령하고 일장기를 다시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오키나와를 출발한 하지 남한 점령군 사령관은 9월 8일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조선총독부에서 일제로부터 38선 이남을 인수받았다는 쌍방 서명을 하고나서 일장기를 내렸다.

그러나 이후 올라간 기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였다. 남한은 미국의 군사 점령지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해방이 아닌 식민지배가 계속된 것이다. 공식 언어도 일어에서 영어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어는 보조어에 불과했다.

그는 출발 전 부하 장교들에게 '한국은 미국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을 구분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를 비롯한 미군들은 일본인을 한국인보다 더 좋아했다. 그래서 미군들을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인천 부두에 나온 환영 인파를 향해 질서 유지라는 이유로 총을 쏘아 다수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하지는 성조기를 총독부 건물에 올리고 나서도 한국인을 믿을 수 없다고 여겨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를 그대로 유임시키고 다른 일본인 관리들도 계속하여 임무를 수행토록 하였고, 조선인들은 인내를 갖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오래 전부터 서구인들의 머릿속에 일본은 동양을 대표하는 국가였다. 그래서 인종차별주의자인 38선 이남 군사령관 하지는 일본인들을 협조적이고 청결하고 규율이 있으며 유순한 민족이라고 높이 평가를 한 반면 한국인들은 고집이 세고 제어하기 어려우며 불결하고 시끄럽게 날뛰는 민족으로 폄훼를 했다. (518 광주항쟁 직후 미국 워컴소장은 우리 민족을 향해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 뒤를 따르는 들쥐와 같은 백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미국무부와 맥아더 태평양 사령관은 하지에게 모든 일본 관리들을 즉각 해임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참고로 당시 미국 본토에서도 인종차별 정책이 시행 중이었고, 인종할당에 의거 한국인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켰으며 1924년 전에 미국에 온 3천명의 한국인들의 미국 귀화를 거부하였다. 뉴욕주를 포함하여 15개주에서는 한국인들이 백인들과의 결혼을 금지시켰고, 11개주에서는 땅의 소유를 금지시켰으며, 뉴욕시에는 27개 직종에 한국인들이 종사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했다.)

당시 미점령군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풍습을 전연 알지 못했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반면 38 이북을 점령한 소련 점령군의 이반 치스티아코프 사령관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풍습, 언어에 대한 교육을 받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뿐더러 남한과는 달리 자치권을 주어 점령 두 달 만에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이어 넉 달이 지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해 모든 땅을 국유화하고 실제 경작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외 미군은 계속 친일파를 등용해온 것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있었으며, 미국은 소련과는 달리 신탁통치를 주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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