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부패한 독재자들을 지원하는가? 3
미국은 왜 부패한 독재자들을 지원하는가? 3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19.04.0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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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1976-1983)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를 지배한 군부는 인권 유린으로 악명이 높았다. 8년간 살해된 사람만 3만에 달한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미국 정치인이 있었다. 바로 닉슨 대통령과 포드 대통령 시절 국무부 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다. 키신저는 군부의 잔혹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아무리 잔인한 정권이라도 반공주의만 확실면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냉전 시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종종 나타났던 현상이다.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 집권 시절인 1976년에서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이 국가에 의한 테러, 조직적인 고문, 강제 실종, 정보 조작을 자행한 시기를 일컫는다. 학생·기자·페론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게릴라 및 동조자들을 마구잡이식으로 학살했다. 1만 명 정도의 몬토네로스와 인민혁명군의 게릴라가 실종됐고, 최소 9000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러운 전쟁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로 시작됐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운영했다. 수용소는 주로 변두리 지역의 학교나 체육관 등 대규모 건물을 개조해 비밀스럽게 사용했는데,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만 이런 수용소가 한때 수 십개에 이르렀다.

아르헨티나의 가톨릭 교회는 호르헤 비델라의 군부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다. 쿠데타 주도 세력인 호르헤 비델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같은 쿠데타 주도 세력인 해군 참모총장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는 당시 교황의 외교사절인 피오 라기 추기경과 정기적으로 만나 테니스를 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호르헤 비델라는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국가 재건 과정(國家再建過程, 스페인어: 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을 주도했다. 이 과정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비밀구치소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실종되었는데 이 실종자들에 대한 보고서가 눈카 마스보고서이다.

눈카 마스보고서에는 가톨릭교회가 군부독재에 협조하고 심지어 납치와 고문에 가담했다는 증언을 담고 있다. 아르헨티나 주교회는 19775월 군부의 통치방식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한편에선 직접 납치와 고문에 가담했다. 대표적 인물인 크리스티안 폰 베르니히(Christian Von Wernich) 신부는 반체제 인사들의 납치와 고문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정황이 눈카 마스보고서에 드러나 결국 법정에 세워졌다. 베르니히 신부는 2007년 살인 7, 납치 42, 고문 31건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졌다. 베르니히의 재판 기간 내내 침묵을 지켜왔던 아르헨티나 가톨릭 교단은 판결 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가톨릭 사제가 심각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게 돼 고통스럽게 여긴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군정 시절 인권보호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또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교황직에 오르기 전 더러운 전쟁 당시 군사정부에 협조한 정황이 드러났다.

1979년 아르헨티나 항구 도시 바이아블랑카에서 납치된 앨리사 파트노이는 인터내셔널비즈니스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의 교회는 역할 분담이 되어 있는데 그중 군을 지원하는 분야가 있다. 프란치스코(당시 추기경)는 그 분야에 속해 있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신문 <파히나 12>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1970년대 아르헨티나 예수회 총장 시절 군사정권의 예수회 소속 신부 2명에 대한 체포·고문을 방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부 문서를 폭로했다. 이 신문은 1979년 당시 예수회 총장이던 그가 군사정권한테 납치돼 고문당한 프란시스코 할릭스 신부의 여권 발급을 거부하라고 권고한 내용을 담은 아르헨티나 외교부의 문서를 공개했다. 문서에는 할릭스 신부가 교단의 명령에 불복종했고 게릴라와 접촉한 의혹이 있다며 이 정보는 베르골리오(프란치스코 교황) 신부에 의해 제공됐으며, 그는 여권을 발급 해달라는 할릭스 신부의 요청을 거절하라는 특별 권고를 했다고 적혀 있다.

할릭스 신부와 오를란도 요리오 신부는 빈민가에서 일하다가 군사정권에 납치돼 6개월 동안 강제수용소에서 고문을 받다 풀려났다. 이 문서는 아르헨티나 언론인이자 더러운 전쟁 당시 실종자 가족들의 단체인 '5월 광장의 어머니회' 자문 변호사인 오라시오 베르비츠키가 군부독재 시절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비판한 저서 <침묵>에서 공개된 바 있다. AFP 통신은 베르고글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성당의 벽에 "새 교황은 비델라(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 호르헤 비델라)의 친구"라는 낙서가 씌어있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반공주의자라면 어떠한 악을 행하는 정권이라도 무조건적으로 비호해 온 것이다.

6. 우고 반제르 독재 치하의 볼리비아(1971-1977)

70년대 초반, 볼리비아의 좌파 대통령 후안 호세 토레스의 정책에 심기가 불편해진 미국은 파시스트 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하도록 도왔다. 쿠데타 이후 토레스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지만,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 역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막시즘이 자리잡는 것을 막기 위한 범대륙적 콘도르 작전의 일환이었고, 미국 중앙정보부는 이를 열심히 도왔다.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스페인어: Hugo Banzer Suárez, 1926510~ 200255)는 볼리비아의 군인 출신 정치가로, 1971년부터 1978년까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볼리비아의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독일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모국인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미국의 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텍사스 포트 우드의 장갑 기병대 학교와 파나마 운하(당시 미국령)의 스쿨 오브 디 아메리카스(미군이 남미 군인들에게 반란에 대한 진압 및 고문과 살인 기술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악명 높은 시설)를 다녔다.

1961년 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였고, 3년 후 친구인 레네 바리엔토스 장군 밑에서 교육문화장관에 임명된다. 차츰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군의 대표적인 우익 세력으로 떠올랐다. 또한 육군 사관학교와 괄베르토 빌라로엘 육군 학교의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반 게릴라 투쟁에 참여했다. 197010월 우익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의 군인 대통령 알프레도 오반도 칸디아 장군을 해임시켰는데 바로 좌익의 후안 호세 토레스 곤잘레스 장군에 의한 반동 쿠데타로 ​​실패했다. 반처는 국외로 피신했지만, 권력에 대한 야망은 버리지 않았다. 정치적인 대립을 이유로, 반처는 1974년 좌파 정당들을 해산하였고, 볼리비아중앙노동자연합(Central Obrera Boliviana; COB)의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더욱 대학을 폐쇄했다.

전 대통령 빅토르 파즈 에스텐소로의 정당인 민족혁명운동당(Movimiento Nacionalista Revolucionario; MNR)과 극우 볼리비아사회주의정치결사(Falange Socialista Boliviana)가 곧지지를 표명했다. 인권 단체들은 반처가 재직하던 1971년부터 1978년 사이의 권력 강화를 도모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도주했고 3,000명이 정치범으로 체포되었으며 200명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이는 "반처화(banzerato)"라고 불린다). 에스텐소로도 결국 망명하였으며, 에르난 시레스 수아소 전 대통령이 체포되고 후안 호세 토레스 전 대통령이 망명지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가운데, 19789년 만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데 부정 투표 의혹 등으로 선거는 무효화된다. 후안 뻬레다 아스분 공군 대장에 의한 쿠데타로 반처는 축출되었다. 1997년 민주적 절차에 의거, 5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이 때 그는 1979년 본인이 창당한 민족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Nacionalista; ADN)의 당수였다.

이 전에 1979, 1980, 1985, 1989, 19935번이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두 번째 임기에서 전임자인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가 추진한 민영화 노선을 수정하고 국영 기업을 되찾는 것을 공약하였다. 또한 미국을 밀어 코카 멸종 작전이라는 볼리비아 국내 마약 일소 계획을 진행했지만, 이것은 물의를 빚었다. 원래 코카 재배는 자신의 1기 임기 동안 면화의 전작이 진행되고 크게 증산 된 것이었다. 1999년 말부터 2000년에 걸쳐, 미국 기업에 인수된 코차밤바의 수도 회사에 대한 항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이것은 "코차밤바 물 분쟁"이라고 코카 멸종 작전에 반대하는 차빠레 지역의 코카 생산 농가의 파업과 폭동과 합쳐져 국내는 혼란했다. 결국 코카 멸종 전략은 일부 철회되고 전통적인 목적의 코카 잎 재배 및 유통이 인정된다. 200187일 폐암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부통령인 호르헤 키로가 라미레스가 이를 승계했다. 200255일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ADN의 당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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