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부패한 독재자들을 지원하는가? 6
미국은 왜 부패한 독재자들을 지원하는가? 6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19.04.0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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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1965~ 1986)

필리핀의 법률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11대 상원 의장, 3번째 총리였다. 1965년 대통령이 된 뒤 21년간 장기집권하면서 1972년 계엄령을 공포하여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는 등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통상 약칭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로 부른다. 대학 재학 중 1933년 정치가인 아버지의 정적을 살해했다가 체포되어 193911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소하여 1년 뒤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뒤 마닐라에서 법정 전문 변호사로 개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장교로 항일 전쟁에 참전했다. 한때 필리핀 바탄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 항일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했다. 필리핀의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거쳐 1965년에 필리핀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내정되었다가 밀려나자 상원 의장직을 차지했음에도 탈당, 필리핀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29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였다. 대통령 집권 초기에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공산주의 체제 하의 국가들과도 외교를 맺었고, 높은 지지율을 얻어 1969년에도 재선되었지만, 경제 사정 악화와 개혁 실패 등에 부딪혀 독재 정치를 시작했고 부패를 일삼았다. 1976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고 19811월 계엄령을 해제, 정치범 일부를 석방했다.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quino) 암살 사건을 계기로 범인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온갖 부정을 저질러 1986년 대선에서 코라손 아키노를 낙선시키고 재선에 성공했으나 반정부 시위의 여파로 그해 2월 자진 사퇴하였다.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부인인 이멜다는 그의 동반자였고,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왜 미국은 이렇게 부패한 정치인들을 좋아하여 도왔을까?

 

12.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1981~ 2011)

무함마드 후쓰니 무바라크, 192854~ )는 이집트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을 지냈다. 무바라크는 1975년 안와르 사다트 행정부에서 부통령에 임명되며 이집트 정계에서 부상했으며, 198110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함으로써 그 해 11월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이집트 민중의 저항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집트의 최장기 통치자 무하마드 알리 파샤 이래 이집트를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인물이었다.

무바라크는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집트 공군에서 장교로 있었으며, 1972년부터 1975년까지 군 사령관으로 활동하며 공군 대장까지 승진하였다. 무바라크가 2011년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2011211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한 뒤, 부통령인 오마르 술레이만은 이집트군 최고위원회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날 무바라크와 무바라크의 가족들은 대통령궁이 있는 카이로를 떠나, 이집트의 휴양 도시 샤름엘셰이크로 이동하였다. 2011413일 무바라크와 그의 아들 가말 무바라크는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심문을 받기 위해 구금되었다.

20138월 법원의 시위 유혈진압 책임에 대한 무죄 선고로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으나, 정부의 직권 명령으로 군 병원에 연금되었다. 201519일 카이로 형사법원에 의해 대통령궁을 보수한다며 공금을 횡령한 뒤, 가족 소유의 건물을 개선한데 사용한 혐의로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의 활약으로 안와르 사다트에게 주목을 받은 무바라크는 1975, 이집트 부통령에 임명되었다. 또한 1978년에는 아랍 사회주의동맹을 대신해 설립된 국민민주당의 2인자가 되며, 사다트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198110월 사다트가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암살되자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었다.

1982년 정식으로 국민민주당 총재가 된 이후, 30년간 이집트를 철권 통치하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친미, 친이스라엘 노선을 계승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중동 평화 협상에서 양자의 조정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과의 협상 결과, 19824, 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반환 받았다. 냉전 시대의 무바라크의 외교 노선은 기본적으로 친서방을 표방했으나, 1984년에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였다.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 친미 노선이 두드러졌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에 이집트군의 참여를 결정했으며, 2001911일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단속에도 적극적이이었다. 이러한 친미국, 친이스라엘 노선은 해당 국가들의 높은 평가로 이어졌고, 무바라크가 2000년 이후 외환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이집트의 국내 총생산의 일정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암살을 발단으로 대통령 임기 초기부터 이집트 전역에 국가비상사태를 발령하며, 강력한 통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장기 집권의 결과, 정부의 주요 직위는 무바라크의 심복으로 굳혀졌으며, 인사는 경직되고 빈부의 차이도 점점 커져만 갔다. 무바라크의 친미, 친이스라엘 성향은 독재 정치로 자유를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무바라크는 몇 차례 이슬람주의자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무바라크의 통치가 장기화되면서, 만일에 대비해 둘째 아들인 국민민주당 정책위원장 가말 무바라크에게 대통령직을 세습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퍼져 갔다.

20103월 방문한 독일에서 고통을 호소했으며, 담낭에 염증이 생겨 적출 수술을 받는 등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으나, 같은 해 12"국민 생활의 향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 이라고 말하면서, 이집트를 계속 통치할 의사를 밝혔다. 20111, 튀니지에서 발생한 혁명의 영향으로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의 불만 폭발하였다. 같은 해 125일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계속해서 발생했으며, 무바라크는 129일 내각을 해산하겠다고 발표하고 국민의 불만을 줄이려는 한편, 자신의 대통령 퇴진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수도 카이로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대되면서, 무바라크는 21, 국영 TV 연설에서 같은 해 9월에 예정되어 있는 차기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210일에는 대통령 즉각 사임을 부정했으나, 대통령 권한을 부통령 우마르 술라이만에게 이양하려는 생각을 표명하였다. 211, 군부에게 권력을 이양하며 이집트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무바라크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무바라크가 국가 자산을 횡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가가 스위스 은행에 보유한 은행 계좌와 부동산이 3년간 자산 동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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