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부패한 독재자들을 지원하는가? 7
미국은 왜 부패한 독재자들을 지원하는가? 7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19.04.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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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란의 팔레비 정권(1925~ 1975)

팔레비 왕조는 19251215일부터 1979211일까지 이란에 군림했던 왕조로, 현재까지 이란에 존재했던 최후의 왕조이다. 본래 이름은 페르시아 제국(Imperial State of Persia)였으나, 1935년에 이란 제국(페르시아 Shâhanshâhi-ye Irân, Imperial State of Iran)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왕조의 개창자인 레자 팔라비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영국과 소련 세력이 이란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증명된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흐마드 샤 카자르(Ahmad Shah Qajar) 때였다.

1921년 발생한 레자 팔라비의 쿠데타로 아흐마드 샤의 위치는 매우 약해졌고, 그가 프랑스에 있던 19251212일에 이란 의회(Majlis)는 아흐마드 샤를 퇴위시켜 카자르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 대신 의회는 레자 팔라비를 페르시아 제국의 새 임금으로 추대했다. 새 왕조를 세운 레자 샤 팔라비(팔레비 1)는 개혁과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1928년에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 근대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서구화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레자 샤 팔라비의 강경한 세속주의 정책은 특히 성직자를 비롯한 일부 계층에게서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중산층과 중상류층은 샤의 정책을 지지했다.

1935320일부터 지금의 '이란'이라는 국명을 사용하였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서구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온 명칭이기 때문이다. 레자 샤 팔라비의 뒤를 이은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59년에, '페르시아''이란' 모두 사용가능하다고 밝혔다. 팔레비 1세는 영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세력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했다. 개발정책을 위해서는 외국 기술자의 도움이 요구되었지만, 샤는 영국-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소유한 영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했으며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제3국에서 도움을 받고자 했다.

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문제가 생겼다. 독일과 영국이 전쟁상태에 들어가자, 팔레비 1세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인 기술자들이 스파이라고 주장하며 영국이 소유한 정유공장들에서 사보타주를 일으키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샤는 영국이 주장한 독일 기술자 송환을 거부했다. 그러나 샤는 끝내 1941825일 개시된 영국과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황태자에게 양위하여, 3년 후에 남아프리카 연방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숨을 거두었다.

1943913, 연합국들은 194632일까지 모든 외국군이 이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그 때, 투데 당(공산당)은 큰 영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데,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무장하였다. 이에 제국 정부는 테헤란의 중앙당과 이스파한 지부를 점거하였고, 이란 북부에 주둔하던 소련군은 이란 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194511, 투데당의 도움 하에 아제르바이잔 인민 정부가 자치를 선언하였다. 이 소련의 괴뢰정권은 194611월에 소멸했다. 1941916, 부황의 양위로 즉위한 제2대 황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2)는 부황이 추진했던 개혁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곧, 정부의 움직임을 둘러싸고 샤와 민족주의적인 노() 정치가 모하마드 모사데그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1951, 마질리스(이란 국회)79 12로 모사데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그는 곧 영국이 소유한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였고(아바단 위기), 이는 서방으로부터의 석유 불매에 의한 경제 파탄을 두려워한 샤의 반대에 부딪혔다. 샤는 잠시 해외로 떠났지만, 얼마 뒤인 19538월 영국과 미국이 후원한 쿠데타(아약스 작전)에 의해 귀국하였다. 모사데그는 근왕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샤는 세속주의, 근대화 정책을 밀고 나가,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시작하여 토지개혁·여성참정권 부여 등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1971년에는 이란 건국 2500주년 축제를, 1974년에는 테헤란에서 아시안 게임을 열었다. 그러나 백색혁명은 왕권 안정을 위한 국방비 증액과 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원리주의 무슬림·민족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러 이란 이슬람 혁명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1978년부터 발생한 학생 데모는 나중에 호메이니 등의 종교인들까지 가세하여, 그 해에 이슬람 혁명이 번지게 되었다. 끝내 19792월에 샤가 해외로 망명하여 2500년 전통의 군주제는 폐지되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샤는 신병치료를 위해 이집트, 멕시코, 미국을 전전하였고, 마침내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샤의 타계로 황태자인 레자 시루스 팔라비는 부재중(in absentia)으로서 팔라비 왕조를 계승하였다. 레자 시루스 팔라비 부부와 그 세 딸은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 포토맥에서 거주하고 있다.

 

14. 대만의 장개석 정권(1950~ 1975)

장개석(장제스) 중국어: 蔣介石, 병음: Jiǎng Jièshí), 창카이섹(광둥어: Zoeng Gaai-Sek, 영어: Chiang Kai-shek) 또는 장중정(중국어: 蔣中正, 병음: Jiǎng Zhōngzhèng, 18871031~ 197545)은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군사 지도자이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및 국부천대 이후 제1, 3대 총통(재임 : 1925318~ 197545)이었다.

흔히 불리는 장개석의 "개석"(介石)는 바로 그의 자이며 "중정"(中正)은 그의 본명이다. 아명은 서원(瑞元, 루이위안), 족보명은 주태(周泰, 저우타이), 학명은 지청(志淸, 즈칭)으로 종교는 감리교이며,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화민국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장 성 펑화현 출신으로 1906년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다음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갔다. 일본 유학시기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쑨원의 신임을 받아 1923년 제1차 국공합작 때는 소련으로 군사시찰을 갔으며, 귀국 후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벌을 시작하였으며 19274월에는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1928년에 베이징을 점령하여 북벌 완수를 선언했다.

이후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국민정부를 선포, 국민정부 주석과 육군, 해군, 공군 총사령이 되어 정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930년부터 공산당 토벌에 나섰으며,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이를 항일전쟁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1936년 공산당 토벌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갔다가 그의 부하인 장쉐량과 그의 군대에 의해 감금당한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공산당과 함께 항일전쟁(중일전쟁)에 나섰다.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에서 중국(당시 중화민국)을 승전국으로 만들지만, 1946년부터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벌였으며,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타이완으로 이전하였다. 중화민국의 총통과 국민당 총재로 장기 집권하다가 1975년 사망했다.

1948520일부터 194912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인 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31일부터 197545일까지 초대~5(리쭝런의 직무대행기간 및 사망으로 인한 옌자간의 직무승계기간 제외)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국민당정부의 부정부패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농민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현물이었으므로 아주 간단하게 부패한 관리와 유지들을 거치면서 줄어들었다. 농민이 부담한 조세는 실제 징수액의 2배 이상이었다. 징집은 더더욱 기피되는 부담이었고 확실하게 죽음으로 향하는 편도편 지옥 행군이었다.

무작위 추첨으로 징집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부자들은 돈으로 빠질 수 있었고 가난한 자만 끌려갔다. 물론 국민당정부도 여러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하고 기근으로 수백 만 명이 아사직전에 놓이자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한 성에 수십만씩 주둔하는 군대에 보급할 식량도 부족하고, 그나마 운송할 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행위는 군대를 군대가 아닌, 메뚜기 떼로 변하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군대는 가는 곳마다 말 그대로 싹쓸이를 했다. 그래도 식량은 부족했고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수백 명의 굶주린 병자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1942년 감숙성에서 일어난 대규모 농민반란은 시작일 뿐이었다. 국민당군은 일본군보다도 이들을 진압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19441호 작전 때 수 만 명의 농민군은 패주하는 백군 5만 명을 무장해제하고 수천 명을 학살, 생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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