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미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2.11.1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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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이었다.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트럼프의 ‘승인’ 발언으로 시끄러웠던 얼마 전, 어느 강연장에서 그 발언을 비판한 적이 있다. 자신을 보수라고 자처하는 한 분이 강연이 끝나고 필자에게 물었다. “트럼프의 발언을 굳이 그렇게 날카롭게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한국과 미국이 서로 공조해서 북핵 외교를 펼치자는 선의가 아니었겠냐?”는 취지였다. 굳이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 있느냐, 좋게 해석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상식이 사라진 시대의 단상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관련하여 애써 상식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트럼프의 발언은 주권을 훼손한 것이다. 그것은 상식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상식을 거역하여 트럼프의 발언을 애써 좋게 해석하려는 사고, 또 하나의 사대 심리이고 의존 심리라 할만하다.

지난 회까지 구한말 미국에 대한 사대 의존 심리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해방 직후를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직후엔 어떤 과정을 통해 미국에 대한 사대와 의존이 심화되었던 것일까.

 

맥아더의 포고문 상식적으로 읽기

1945년 9월9일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대장 총사령관의 직책을 갖고 있었던 맥아더는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 「맥아더 사령관 포고 제1호」를 발표한다. 이 포고문과 함께 미 군정이 시작되었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그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따라서 조선 인민은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원조 협력하여야 한다. 

점령(occupation)이라는 문구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 점령이 목적이 일본군에 대한 항복이라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겠다. 그러나 6개에 달하는 점령 조항(conditions of the occupation)에 이르면 점령의 본질이 명확해진다. 우선 점령의 목적은 일본군의 항복 외에 38선 이남에 대한 군사적 통제(military control)임을 밝힌다. 누구를 통제한다는 것인가. 38선 이남의 한반도(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이다. 즉 38선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군사적 통제이다. 

점령 조항 2조는 아래와 같다.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들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혹은 무급 직원과 고용인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적인 기능과 의무를 수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 

정부 및 공공 기관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조선총독부에서 종사했던 사람들이다. 즉 포고문 2조는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던 모든 사람들의 총독부에서 행했던 기능과 임무를 수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친일파들에게 종래의 권한과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들의 권한과 임무는 조선 인민의 항일 독립 의지를 말살시키고 조선 인민의 항일 독립 투쟁을 탄압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에게 조선 인민을 통제하라는 권한을 부여한 셈이다. 

해방이 되었는데, 친일파들의 권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당연히 조선의 인민들은 저항했을 것이며, 전국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했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보지 않아도, 당시의 저항과 충돌 사료를 들춰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다.

3조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대책을 적고 있다.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38선 이남의 거주민, 즉 38선 이남의 조선 인민은 포고문에 복종하지 않으면 가차없이(severely) 처벌한다는 조항이다. 여기서 미군 점령의 본성은 정확하게 드러난다. 미군은 조선 인민(the people 혹은 all persons)을 복종의 대상으로 여긴다. 친일 부역자는 협력의 대상이다. 따라서 점령군에 대한 복종은 친일 부역자들에 대한 복종으로 연결된다. 친일 부역자들에 대한 반항 행위는 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위로 간주된다. 친일 부역자들과 충돌을 빚는 행위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가 된다. 

해방 직후 한반도 상황 상식적으로 보기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은 곧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 조선에서의 과제는 3개로 축약된다. 자주적인 독립국가의 건설, 식민 잔재의 청산, 토지 개혁이 그것이다. 당시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결성되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 3대 과제로 압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제에 역행하려던 세력은 대지주와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38선 이남은 조선총독부가 9월8일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대지주와 친일파들은 조선총독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9월9일 서울에서 미군과 조선총독은 항복 조인식을 갖는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미국의 통치로 대체된다. 포고문에서 봤던 것처럼 조선총독부에 부역하던 모든 친일파들은 그대로 미군정의 관리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미군정의 목표는 조선에 미국식 자본주의 질서와 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인민의 지향은 미국의 그것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 그들의 지향은 자본주의적 토지 분배 방식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토지 분배 방식이었다. 또한 당시 항일운동은 대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 정책에 동조적인 경향성을 갖고 있었다. 

46년 8월13일 동아일보에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귀하의 지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설문 항목에 자본주의를 지지한다(14%)는 의견보다 사회주의(70%), 공산주의(7%)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당시 한반도, 특히 38선 이남의 상황은 분명하게 정리된다. 굳이 역사적 문헌을 들춰볼 필요도 없다. 단지 상식적인 눈높이만 갖고 있으면 보인다.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들과 조선의 인민들은 자주독립국가 건설 등 3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반해 친일 지주들과 일본 통치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3대 과제 실현을 저지하려 했다.

9월9일부터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38선 이남의 권력은 미군정이 장악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 했으므로 조선 인민의 지향과 어긋났다. 조선 인민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일본 통치에 부역했던 세력들은 미군정에 부역했다. 미군정은 포고령을 통해 부역자들에게 저항자들을 탄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부역자들에게 미군은 생명의 은인이며 해방자였다. 

그러나 대다수 조선 인민들에게 미군은 억압자이며 점령군이었다.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의 부역자들을 관리로 채용하여 토지 개혁을 저지했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저지했다.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무의미한 논쟁

미군이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누군가에게는 해방군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점령군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그 누군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이다. 해방 직후 3대 과제 실현에 동의했던 사람들에게 미군은 점령군이었다. 그러나 3대 과제를 역행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해방군이었다. 

해방 직후 3대 과제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3대 과제에 역행하려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수에 불과한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그 권력은 미군정에서 나왔다. 미군정의 총구에서 나왔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금까지 해방 전후사를 인식하는 기준으로 이념적 잣대가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미군을 해방군으로 보려는 시각은 보수우파로, 점령군으로 보려는 시각은 진보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상식이다. 해방 직후 대다수 조선 인민을 사회주의로 지향시켰던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 아니라 조선의 현실에 대한 그들의 상식이었다.

상식의 눈높이에서 그들은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식민잔재를 청산하고자 했으며 토지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상식이 거부되고 상식이 말살되는 과정에서 미군정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연히 상식을 거부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미군은 은인이고 해방자였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상식을 거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권력의 힘은 자신들에게 은인이고 해방자인 미국을 대한민국의 은인이고 해방자로 둔갑시킬 만큼 강력했다. 분단 그리고 전쟁은 점령군 미군을 해방군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정책을 대한민국을 위한 정책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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