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에 들어온 거짓 방언의 시원
한국 땅에 들어온 거짓 방언의 시원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0.08.13 1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1928년, 미스 럼시(Miss Rumsey)의 내한(來韓)

한국 펜테코스트(PENTECOST)의 전래(傳來)는 1928년 봄, 미스 럼시(Miss Mary C. Rumsey)가 서울에 도착함과 동시에 시작된다.

럼시 선교사는 원래 뉴욕시 근교에 있는 감리교회 성가대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木手)요,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던 관계로 그녀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성장해서 간호원으로 일했고 1906년부터 1907년까지의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은혜를 받아 감리교계통 신학을 공부했다. 1906년 4월 로스엔젤레스 한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당시 로스엔젤레스 부흥은 '늦은 비' 성령 역사의 지속이었다.

<럼시 선교사>

예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 떨어졌던 성령의 불길은 중세 암흑지대를 거치는 동안 사그라져 깜빡이는 등불처럼 그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잃었던 복음주의 신앙을 돠찾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엘리야시대에 3년 6개월간 기근(饑饉)이 있었던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쏟아졌던 이른 비성령의 역사가 근 1900년간 지우현상(遲雨現狀)이 보였으나 1901년 1월 1일, 20세기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미국 켄사스주 토페카시에 있는 벧엘성서신학교 (Bethel Bible Collge)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세례는 요원의 불길처럼 미국 전역을 휩쓸었고 로스엔젤레스 대부흥때, 럼시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성령체험을 하고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했기 때문에 도저히 선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근심하며 기도하던 중에 성령께서 같은 교회의 덴버드라는 사람을 감동시켜서 선교비를 지원해주도록 하셨다. 덴버드라는 사람은 감리교인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뜨거운 신앙의 소유자였고 명절 때 선물받은 물건까지 팔아서 헌금하던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덴버드의 후원으로 한국 땅에 도착한 럼시 선교사는 하디(R. A. Hardie)목사가 기거하던 감리교의 최초병원 시병원(施病院)에 여장을 풀었다 이 시병원은 의료선교사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과 헤론(John F. Heron)이 세웠는데 이 시병원은 감리교가 세운 최초의 병원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이즈음 감리교 선교사들이 거의 다 이 시병원 건물에 주재했는데 그 중에는 이 땅에 한국선교의 꽃을 피워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 (H.D. Appenzeller) 부부와 원산 부흥운동을 주도한 하디 목사가 있었다.

한편 한국정세는 이미 일본이 음모와 무력과 잔인한 수법으로 한국을 합병했으며, 1919년 3·1운동을 치루고 난 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독립운동의 여명기요. 교회적으로는 크나큰 수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럼시 선교사는 정동 시병원숙소에서 꿇어 엎디어 "하나님이시어! 당신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코리아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당신의 뜻을 부족함 없이 이루게 하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드린 후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서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로 갔다.여기에서 럼시 선교사는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청년 허홍(許弘)을 만나 "조선에 오순절신앙을 전교(傳敎)하러 왔는데 전혀 생소한 곳이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서질 않으니 허선생께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간청했다.

2.허홍을 만남

허홍은 1907년 12월 9일,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에서 허곤씨의 차남으로 태어나 아버지가 구세군사관인 까닭에 구세군에 입대하여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허홍은 이곳에서 나라없는 슬픔을 뼈속깊이 체험하고 있었다. 자기로서는 이 민족적 차별대우를 개선할 수 없다고 여기고 조만간에 사표를 내리라고 각오를 단단히 먹고 있는데 40여세쯤되는 외국여성이 다가와 '선교사업을 같이하자'고 하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되어 그 날로 럼시 선교사와 손을 잡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럼시 선교사는 미국 하나님 성회 (Assembliesof God)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절박한 음성을 듣고 달려온 개인자격의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인에게 동족 이상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왔으며 조선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허홍과 럼시선교사는 럼시가 기거하는 시병원에 선교본부를 두고 이 땅에 오순절신앙을 전교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먼저 두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허홍은 럼시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배우면서 은혜체험을 하게 되었다.

 

<허홍 목사>
그는 럼시 선교사를 도와 이따에 최초로 오순절 운동을 일르켰으며 교단을 창설한 공로자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총회장이 되었다.

1930년대 초,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암담한 여건과 종교적인 혼돈 속에서 현실참여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도피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한국민족이 지닌 은둔사상과 통하는 것이였다. 당시 이용도 목사는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라는 주제로 '무조건 사랑'을 부르짖었다.신학박사 김재준은 당시의 교회를 평가하기를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초역사 또는 비역사적인 신비경험을 탐닉하여 스스로를 비인간화했다.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인간됨이 싫어서 인간에서 이탈(離脫), 승화(昇華)하여 신(神)의 세계에 몰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3. 오순절 최초의 서빙고 교회의 설립

이러한 한국교회의 배경 속에서 럼시선교사와 허홍의 노력으로 한국최초의 오순절교회가 섰으니 '서빙고 교회'이다. 이 서빙고교회는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박성산 목사가 담임했다.

박성산목사는 1908년1월20일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선곡동에서 박동희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군위군 우보면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계성학교를 이어 졸업했으며 청년시절 농촌문제, 사회개발문제, 금주, 금연운동을 하던 민족 계몽운동자였다. 좀더 큰일을 하려면 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유학을 자원했으나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냉대를 하자 절망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 성서신학교를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마침 선교협의차 도일(渡日)했던 럼시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서빙고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던 것이다.박성산은 오순절적 뜨거운 설교를 통해 "성령세례의 표적은 방언이며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충만함과 사회참여"라고 역설했다.이에 한국교회는 "오순절 교회는 이단(異端)이다" 혹은 "방언 패거리"라며 공격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박성산이 주장한 오순절신앙이란 사도행전에 입각한 근본주의(根本主義)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방언(方言)과 신유(神癒)와 권능(權能)이었다. 그는 이 세 가지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이루어 진다고 역설했다.

한국교회는 한국 오순절교회를 가르켜 '방언파' 또는 '랄랄라파'라고 불렀다.이러한 조소(嘲笑)말고도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방해가 적지 않았다.

핍박은 한국교계 뿐만이 아니었다. 오순절교회를 출석하는 신도들에 대하여 가족들의 핍박 또한 대단했다.

4. 오순절 신앙인들의 고군분투(孤軍奮鬪)

박성산이 담임하는 서빙고교회에 출석하는 이혜열이라는 여신도가 있었다.

그녀는 이화여전에 다니던 당시로서는 엘리트였으며 사대부집 외동딸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우리 딸이 교회에 나가더니 한 밤중에 요상스런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며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종용했다. '한 밤중에 요상스런 헛소리'란 방언기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딸아이를 버렸다'고 집안에 감금까지 불사했으나 이혜열이 끝끝내 굽히지 않자 그의 부모들이 "엿새동안 학교에 가고 일요일날은 또 교회에 가니 사대부집 외동녀가 떠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학교를 그만두던지 교회를 그만두던지 둘중 하나를 택하라"고 최후통첩을 하자, 이혜열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그만 두고 교회봉사에 전력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회인 서빙고 교회와 동교회인 일동>

럼시 선교사가 이땅에 온지 5년만에 세워졌으며, 럼시 선교사, 허홍 목사가 개척,박성산 목사가 담임했다.

박성산.배부근.허홍(우측은 박성산 목사의 처남 유지욱 목사)

세 분은 한국 하나님의 성회 3대 거목으로서 험시입국 이 후 1928년부터 1953년 4월8일 교단이 창립되기 까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일념으로 오순절 신앙의 맥을 이어 왔던 주역들이다.

<박성산.배부근 목사>

이혜열은 그 후 원산 웰슨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신학계의 태두(泰斗) 송창근 박사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렇게 교인들의 신앙이 열심이어서 서빙고교회의 경우 장년이 1백명까지 돌파했다. 럼시선교사의 기도와 박성산 목사의 강력한 리더쉽에 서빙고교회가 나날이 부흥해 갈때에 럼시선교사는 일본 오순절교회에 출석하는 비행사 김동업·다이꼬 부부를 한국에 불러서 함께 일하도록 주선했다. 김동업 장로는 원래 경상남도 안동출신으로 소년시절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등비행사가 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2인 비행사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업 장로는 일등비행사이면서도 자동차운전까지 배운 팔방미인으로 결혼도 다이꼬라는 일본여자와 해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김동업·다이꼬 부부는 열렬한 오순절 신앙인으로 비행기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을 써붙이고 다닐 정도였다. 이들은 서빙고교회를 교역자 못지않게 받들었으며 조선오순절교회 최초 장로 백승학 장로에 이어 장로장립을 받았다.

1930년 한국에 오순절신앙이 전래된지 2년후에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교인 팔선선교사가 한국에 개인자격으로 선교하러 왔고, 팔선은 곧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벳시, 메르테드 선교사를 한국으로 불러들었다. 벳시, 메르테드 역시 영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파송선교사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온 선교사들이었다. 메르테트는 영국 런던에서 여자고등학교 교장이었고 벳시는 백화점을 경영하는 경영자였다. 벳시, 메르테트, 팔선은 일본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배부근 목사와 사직공원 정면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수창동교회를 세웠다.

배부근 목사가 벳시.메르테트.팔선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수창동교회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배부근 목사는 강원도 춘천에서 부친 배덕노와 모친 연안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1906년 6월 16일 출생하였다. 1913년에 한문서당에 입학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그가 13세에 모친이 별세하여 가세가 기울어졌으나 굴하지 않고 배영학교에 입학했고, 1925년에도 동학교장 부라만선교사에게 신앙사사를 받았으며, 졸업후 친척들과 동네유지들의 도움으로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名古屋)에서 신학원을 다녔다. 그 후 죤 주르겐 센 원장이 경영하는 신학교에서 성령세례를 받아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1931년 귀국하여 수창동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임대료는 팔선 선교사가 부담했다.

한편 동양을 재패하려는 일본의 야망은 마침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즈음 기독교계는 세계신학의 조류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갔으니 당시 신학적인 대결로 유명했던 이는 평양신학교의 박형룡(朴亨龍) 목사와 숭인상업학교의 교수(敎誰) 김재준 목사였다. 김재준 박사는 [신학지남(神學指南)]에 투고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에서 성서축자영감설(聖書縮字靈感說)을 반박하고 한국교회의 주체의식을 방해한 선교사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성서축자영감설은 사도적 전통의 정신앙(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이라고 믿고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과 축자무오설(縮字無誤說)에 든든히 서서 성서에 대한 비판적 해설을 단호하게 정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가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고 나왔고, 김준배 목사는 여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설을 내려 장로교 총회에 기소되었는가 하면, 1935년에는 감리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형기 감독 편집으로 펴낸「어빙던Abingdon 단권주석」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문제가 되어 역자(譯者)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목사들에 대한 공개사과와 그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을 것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장로교 뿐만 아니라 1907년 복음의 포문을 열고 이 땅에 성결의 신앙을 선포하기 시작한 성결교회도 교권싸움에 휩싸여 여기서 밀려난 소수목사들에 의해 새교단이(하나님의 교회) 구성된다. 1930년대의 어수선한 돌풍 속에서 교회를 박해하는 일제(日帝)의 세력은 신도(神道)에 복종하는 것으로 걸림돌을 놓았다. 신도는 국가종묘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의 마땅한 의무이지 종교가 아니라고 강요하여 집요하게 교회와 각 교단 선교부에 요구해왔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이를 우상숭배 행위를 보아 이를 거절했다. 여태껏 유일신 신앙을 전파하고 실천해 오면서 조상숭배의 유혹마져 거부해 온 과거를 가진 기독교가 목숨을 걸고 신앙의 순결을 수호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빙고 교회 제자들과 주일학교 교사들 담임 박성산목사.럼시 선교사>

오순절 교회의 부흥

이러한 환경 속에 조선오순절교회는 두 팀으로 나누어 선교할동을 했으니 박성산, 허홍은 럼시선교사와 배부근은 벳시, 메르테드선교사와 함께 손을 잡았다. 박성산, 허홍의 경우 당시 서빙고는 어촌마을로 기독교에 대한 일반상식도 전혀 없었고 어민들은 배타적이여서 복음을 잘 받아 드리지 않았다. 유교, 불교, 샤마니즘 등 토착종교가 뿌리박힌 가시밭에 복음을 전하기란 용이한 과업이 아니었으며 또한 일찌기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대목(大木)이 된 장로교, 감리교 사이에 오순절신앙의 뿌리가 내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으나, 늦은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서빙고에 오순절신앙이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박성산이 여느날과 다름없이 유지욱, 김동업, 단희동, 단희옥, 최용돌 등 교회청년들과 함께 북을 치며 노방전도를 하는데 난데없이 동네청년이 다가와 "시끄럽다!"고 하며 북을 치고 있는 박성산의 손목을 비틀며 발길질했다. 청년은 동네의 난봉꾼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성산은 근 2개월간을 치료해야 하는 고난을 당했으나 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어 1934년 장년 70명, 주일학생 200명까지 불어났다.

이즈음 교회를 동빙고로 옮겨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개인자격으로 온 럼시선교사가 매월 어마어마하게 지불되는 교회 임대 셋돈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1938년 10월 럼시선교사가 한국에 온지 10년만에 조선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안수식이 있었는데, 이 때에 안수위원은 영국 오순절교회 감독 카타 목사, 썽무라 목사였으며 허홍, 박성산, 배부근 세 사람이 정동(井洞) 시병원(施病院)에 위치한 조선오순절교회 선교본부에서 임직을 받았다.

1934년 한강뚝섬에서 집례된 서빙고교회 침례식은 한국 A.G사상 최초의 침례식이라는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1938년 당시 조선오순절 교세 현황은 아래 도표와 같다.

조선 오순절교회 교세 현황

(累年비교)

5.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탄생

전쟁이 발발된 이듬해 1951년에 한국교회에서 한국군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창설하여 군인전도의 문을 열었다. 이즈음 한국전쟁을 돕기위해 미국 종군(從軍)목사「엘라우드」가 입국하여 군목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에 있는 오순절교회를 애타게 찾아 다니다가 허 홍목사를 만나 일년동안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엘라우드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 현황을 알리는 동시에 허 홍 목사에게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유대 관계를 맺을 것을 간청하다가 1951년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곧 하나님의 성회를 한국에도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하였다. 엘라우드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 미국 A.G. 동양선교부장 오스구드(Osgood) 목사가 한국에 나와 허 홍, 박성산, 배부근 목사 등을 만나 한국 오순절교회 현황을 취재해 갔고 1952년 12월 15일 한국 최초의 미국 A.G. 선교사로 채스넛(Arhber Cheesnut) 목사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채스넛 목사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와 있었는데 중국 전체가 공산화되자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미국 A.G. 선교 본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A.G.를 조직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채스넛이 내한하자 A.G. 결성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오순절 계통의 동지와 교회를 규합하는 일을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가 맡았는데 그는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돌며 호소하였다. 그 결과 1953년 4월 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62번지 허 홍 목사가 시무하는 남부교회에서 모여 역사적인 창립 총회를 가졌던 것이다.

창립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체스넛, 박성산, 허 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이고 그외 4인이 참관하였다.

이 집은 허 홍 목사의 개인 소유로 목조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허 홍 목사 가족과 10평 정도의 예배실이 있었고 2층은 채스넛 목사가 기숙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립총회시 교단명칭을 한국어로 어떻게 부를까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중국에서 일한 바 있는 채스넛 선교사는 중국 A.G. 처럼 "神召會"라고 하자고 주장했으나 허 홍 목사가 "하나님의 성회"로 명명(命名)하자고 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일부에서는 조직을 이룬다는 그 자체를 과히 바람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순절신앙은 성령의 역사를 힘입고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일면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조직이 필요없다는 것이었다.교단 명칭에 있어서는 미국 A.G. 에서도 왈가왈부가 있었다.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체스넛 선교사의 사회 허 홍 목사의 통역으로 ""한국에서의 하나님성회의 조직을위한 성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는 인사와 더불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가 열렸던바,이 창립총회에 모인 이들은 채스넛,박성산,박귀임,곽봉조,배부근,김성환,허홍 등이었다.

Pentecostal Church, Pentecostal Holiness Church, Pentecostal Evangelical Church 등으로 하자는 사람도 많았으나 레오나드(T. K. Leonard)가 히브리서 12장 23절을 인용하며 'Assemblies of God'이라고 함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여 이것이 가결되어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A.G.(Assemblies of God)란 교단명칭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1927년 Assemblies라는 말을 변경하여 Church 로 하자는 주장이 지배적이어서 1914년 A.G. 결성후 13년만에 'Pentecostal Evangelical Church'로 고치기로 결의할려는 순간 실무진에서 일어나 "수많은 교회의 재산등기를 어떻게 뜯어 고치며 그 비용이 얼마나 들겠는가?"라고 하는 반론을 펴서 결국은 A.G.로 존속시키기로 못박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이런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Assemblies of God'라는 말을 한국어로 잘 번역하는데는 고심이 있었다.

Assemblies는 회합, 집회, 대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일례로 국회를 National Assemblies 라고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Assemblies를 Church와 같이 봐서 '교회'라고 번역하기도 좀 무리해서 그냥 '성회'로 한 것이며 God의 번역도 구미(歐美)의 God, Gott, Deus 등은'神'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온갖 잡신에 까지 다 통용되는 것이어서 '하나님'으로 번역해서 A.G.를 '하나님의 성회'로 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A.G.의 번역된 이름 '하나님의 성회'가 종교단체의 명칭으로서는 고금동서에 가장 존귀하고 뛰어난 이름이라는 것은 감사, 찬송할 일이다.
1953년 4월 8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채스넛선교사의 사회, 허 홍 목사의 통역으로 "한국에서의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조직을 위한 성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는 인사와 더불어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 창립총회에 모인 이들은 채스넛, 허홍, 박성산, 곽봉조, 배부근, 윤성덕, 박귀임과 옵저버 4인을 합하여 모두 11인이었다.

토의사항은 교단창립에 관한 제반사항으로서 주요안건은 ①헌장 설명과 통과 ②헌장에 의해 총리(總理) 선출등이었다. 초대 총리에 선교사 채스넛 목사가 선출되었고 교역자 양성을 위해 세워질 신학교 교장도 총리가 맡기로 했으며 학감에는 허 홍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나님의 성회 신조는 미국 A.G. 신조 16조를 요약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우리는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졌으며 절대무오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②우리는 삼위(성부, 성자, 성신)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③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무죄한 생애, 그의 이적들, 그의 승리적인 대속의 죽음, 그의 육체, 부활, 그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과 천년동안 온 세상을 통치하러 권능과 영광으로 이 지상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④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교회는 휴거한다는 복된 소망을 믿는다.

⑤우리는 죄의 정결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회개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⑥우리는 성령으로 이룬 중생은 개인 구원에 절대요소가 되는 것을 믿는다.

⑦우리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믿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우리 육신의 병을 치료하여 주심을 믿는다.

⑧우리는 사도행전 2장 4절에 입각한 성령세례는 이를 구하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⑨우리는 믿는 자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⑩우리는 구원받은 자나 받지 못하는 자나 다 부활하되 전자는 영생을 얻고 후자는 영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다.

 

<1953년 10월 광주에서 열렸던 광주성회>

성령께서 진작(振作)케 하신 신기운(新氣運)을 따라 교단이 발족하자 모든 교역자와 성도들은 인심동체가 되어 교회부흥에 총력을 기울였고, 각 교회 또는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개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 중 특기할만한 것은 1953년 10월 광주에서 개최된 성회로 천명에 가까운 성도가 천막에 회집하여 성령세례와 갖가지 은사를 받아 초대교회를 연상케 하였고, 마지막날 무등산록 광주천에서 3백여명이 침례를 받고 새 사람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는 실로 광주시가 생긴 이래 대서특기할 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이 광주시를 영적으로 뒤엎은 셈이됐고 다른 교파에서 하나님의 성회를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조약(休戰協定條約)을 맺음으로 외면상 전쟁은 끝났으나 교회 안의 저명인사들이 납치당하거나 순교했기 때문에 교회는 지도자 결핍에 빠졌으며 교회 지도자 결핍에서 일어난 일들 가운데 하나가 이단종파(異端宗派)의 발효였다. 주춧돌 밖에 남지 않은 전쟁의 폐허속에서 허탈한 감정과 염세적 풍조가 짙게 민족심리에 깔려 있을때 현실 부정적이고도 신비주의적 내세만을 앞세우는 사이비 종파가 서서히 민중의 빈마음을 향하여 검은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샤머니즘의 무당들처럼 신비의 열풍으로 휘몰아 현실 속에 그리스도가 곧 임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도록 열광(熱狂)속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전쟁의 잿더미뿐인 암담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쉽게 이단(異端), 사이비(似而非)에 현혹되었다. 이러한 이단종파의 특징은 현실 부정적이며 내세적이면서도 경험에 의존하며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있어 가정파탄을 빚어낼 뿐만 아니라, 상식과 도덕, 성관념의 파괴, 나아가 인간성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이비종파는 기성교회가 뚜렷한 생의 좌표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을 때, 폐허처럼 어지러운 교회의 담을 타고 들어오기는 너무도 쉬운 것이다.

전쟁 후, 사회와 교계에 가장 크게 물의를 빚은 교(敎)가 박태선(朴泰善)의 "감람나무교회(千用城)" 곧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였다.

전도관 창설자 박태선은 창동교회(倉洞敎會)에서 김치선 목사에게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55년 3월에는 김치선 목사와 미국의 스완슨 부흥사를 초빙하여 남산야외음악당 광장에서 연일 연석 대대적인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 후 박태선은 신구약 성경에 예언된 감람나무가 자기라고 자처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된 집회를 통해 성도적 공동사회인 신앙촌을 건설하자는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전성기에 오른 박 태선은 감람나무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끝이라고 예언하고 자기는 주님의 보혈을 받았으며 자기 몸에서 이루어졌고 남에게 분배해 준다고 하는 일종의 '피가름'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는 사이비운동이라고 규정하고 그 신비주의적 오류를 단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때 우연하게도 같은 때에 머리를 든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 基督敎 統一神靈協會) 문선명(文善明)과 원초적(源初的)인 동질성을 시사해 주었다.

통일교는 1954년 5월 1일 협회를 정식 발족시키고 "십자가로서는 원죄를 벗어날 수 없어 어떤 종교라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를 가진 진리를 위해 기독교 통일을 표방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피의 순수성을 강조, "피의 정화만이 원죄를 구속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못다한 사명을 한국에서 이룬다"는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이다. 이들 사이비종파들이 한국교회를 우롱하며 가진 피해를 입혀갔다. 이들 집단 말고도 전후 혼란한 사회 양상 속에서 수도원적 기도원은 전국 산천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열광적인 기도원 부흥회는 민중심리를 파고 들었다

<순복음 신학교 제1`회 졸업식(1953.3)>

하나님의 성회는 1956년 봄, 채스넛 선교사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자 하나님의 성회는 임시총회를 56년 4월 26일 열고 제 2대 총리에 허 홍 목사를 선임하였으니 하나님의 성회 최초의 한국인 총리(總理)가 된 것이다.

순복음 신학교 개교

한편, 1953년 5월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65번지 남부교회에서 출발한 순복음신학교는 초대교장에 채스넛, 학감 허 홍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서대문구 충정로 1가 21번지(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55년 2대 교장에 스텟츠(John Stetz) 선교사가 부임했다. 1956년 신학교 맹휴사건은 교단 분열의 전주곡이었다.

허 홍 목사가 2대 총리로 당선된지 반년 후인 1957년 11월 교단이 분열되었다. 당시 한국 하나님의 성회 산하에는 교리적으로

①3위1체 신앙파와

②오직 예수신앙파

가 있었고 미묘한 이해 관계가 잠복하고 있었는데 허 홍 목사가 총리가 되자 불거져 나왔다.

수차에 걸친 민사·형사소송 끝에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는 하나님의 성회 간부(幹部) 중에 불의(不義)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며, 모(某) 선교사의 선교보고에 "In the early days of the organization many who gathered around the A.G. Were later found to be not truly pentecostal (성회 조직 초기에 성회에 모여든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참된 오순절 신앙인이 아니었음이 후일에 알려졌다)"는 말은 이 사건의 일부를 잘 설명해 준다.

재단등록

1957년에는 재단법인의 등록을 마쳤는데 이는 신학교 설립과 더불어 교단발전의 전제조건을 마련한 셈이었다. 일찌기 이런 일에 눈을 뜬 교단의 지도부는 선각자적인 혜안이 있었다.

법인설립에 공을 세운 이는 이완식씨였다. 재단법인 등록의 필요성을 느끼고 법적, 행정적인 절차를 밟고자 했으나, 목회에만 전력해야 할 목사들이 그 일에 매달릴 수 없어 당시 활동 영역이 넓다고 인정되는 이완식씨에게 일임하였다. 이완식 집사는 교단 발전 및 신학교 발전에도 공이 매우 큰 사람이긴 했으나, 나중에 교단 총무를 하면서 정도에 지나치게 독선적인 행사를 하다가 선교사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킨 끝에 교단을 떠났다.

1956년 3월 12일 순복음 신학교는 제2회 졸업생을 배출시키는 한편 존 스테츠선교사는 1955년 2대 교장에 취임했다.

제1차 분열

한국교회는 전후 혼란기의 사회양상 속에서 한국의 장자(長子) 교단이라고 자처하던 장로교회도 1959년 44차 총회에서 두, 세 번째의 분열을 맞았다.

장로회신학교 교장인 박형룡 박사의 신학교 기금(基金) 3천만환 유용 사건에서 빚어진 교장 은퇴문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가입(WCC는 용공적이므로 한국교회의 보수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탈퇴해야한다는 측의 주장) 탈퇴 문제를 둘러싸고 터진 불씨는 다분히 교권 투쟁적인 냄새를 풍겼다.

순복음신학교는 1955년, 제 1회로 강정호, 문재호, 이태구, 정봉의(여), 조동천, 최요열, 함상군(여) 7명을 배출시켰다.

56년에는 이어 강대연, 김기병, 김옥호, 김유정, 동봉금, 마명숙, 박조수, 박광수, 박종수, 박정근, 송준섭, 이안식, 우옥암, 정두영, 조숙자, 한정희, 허순회 등 18명을 배출시켰다.

1957년 11월 하나님의 성회가 분열되자 허 홍 목사는 대한 오순절교회로 환원했고, 곽봉조, 윤성덕 목사등은 영국의 구도사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자 손을 잡고 대전시 가양동 28번지에 중도 성서신학교를 세우고 극동사도선교회의 주역이 되었다.

1958년8월에 죤스톤(R.L.Johnston) 선교사가 순복음신학교 제 3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하나님의 성회 분열로 교단내 주요한 일을 맡아 하던 인물들 중에 장로교, 감리교와 인식교, 여호와 증인, 등으로 탈퇴해 나갔으며 교단 자체에 분열 소동이 끊이지 않는 동안 미국에 본부를 둔 오순절 신앙의 몇 교파들이 수입되었으니 1958년 극동사도선교회가 전개되었고, 1960년 월드선교회, 1965년 하나님의 교회, 1966년 연합오순절교회가 바로 그 교단들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전폭적인 지원

분열로 인해 힘은 분산됐으나 교단이 더욱 단합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미국 A.G.본부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나섰고, 1959년 12월 28일 아세아 선교부장 켓참 목사는 하나님의 성회 창립 이래 엄청난 쾌보(快報)를 가지고 내한했다. 즉 미국 A.G.본부는 전세계 70여개국 중에서 한국을 세계복음화 운동의 지정국(指定國)으로 결정하고 이 사업의 제 1보(步)로써 20,000$의 거액을 투입하여 교회사업, 문서사업, 선교사업, 신학교 확장 등에 쓸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신학교 대지 확보 및 교사 신축이전 ②대부흥회를 위해 미A.G.본부 부흥목사 파송 ③교통 좋은 곳에 중앙부흥회관(Revival Center)을 설립하여 전국 복음화 운동을 강력히 추진할 것 등. 미국 A.G.는 토드전도단 및 보이스 오브 힐링의 양대 전도단과 중앙 복음회관 건립을 위해 협약을 맺음으로써 사업추진의 강력한 단체를 구성하였고 서대문 네거리에 대지 292평을 구입하였다.

신학교도 선교사들을 통해 대조동에 약 1만평의 대지를 사들였으며 버드 목사를 통해, 2백 5십만원, 세계복음화운동기금 4백만원 등이 모금되었고 1960년 3월 5일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부흥의 불길

이 때 교단의 교세 확장을 위한 3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중 하나가 1957년 가을 미국이 낳은 세계적 부흥사 허만(Harald Herman)목사가 내한하여 전날의 법전터 중앙청앞 광장에서 24일간 집회를 인도한 것으로 이 집회는 하나님의 성회로서는 최초의 대집회였다. 또한 1958년 여름 버드(Ralph Byrd) 목사가 내한하여 수원, 대전, 부산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했으며, 1961년 사무엘 토드(Samuel J. Todd) 목사가 내한하여 9월초부터 10월중순까지 서대문 네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성회를 인도했으며 통역은 당시 조용기 전도사가 맡았다.

샘 토드 목사가 40일 동안 연속적으로 부흥회를 가진 서대문 네거리의 서커스터가 (1961) 이 자리를 사들여 부흥회관을 건축하다.

한국의 아주사 부흥센타가 된 서대문 부흥회관(1962)

버드 목사를 통해 2백50만원. 세계복음화 운동기금 4백만원들 온갖모금을 통해 1960년 3월 5일 신축 기공식을 가진 중앙복음회관은 61년 19월 15일 준공되었으며,이 회관은 순복음 중앙교회로 발전 ,그 후 총회본부가 되었다.

이 부흥회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며 10월 중순까지 계속되자 때마침 선교부에서 짓고 있던 건물이 준공되어 10월 15일 선교부가 지은 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몇 날을 더하고 끝났다.

선교부의 자금으로 지은 순복음 부흥회관(Full Gospel Rvival Center)은 지상 5층의 건물로 서대문 네거리의 명문으로 등장했고 이 중앙부흥회관이 순복음중앙교회로 발전되었다.

한편 1960년부터 10년간은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민족중흥(民族中興)의 시발점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말기 부정부패의 정권이 학생들의 4·19의거로 붕괴되고 내각제(內閣制) 하에서 장 면정권이 들어섰으나 구태의연한 정치풍토와 무력한 국정운영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구데타를 막지 못하였다. 1960년 4월 1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대학생들이 일으킨 큰 규모의 데모가 500여회 이상 일어났고 사회 전체가 주동이 되어 데모한 것이 35회 가량이었는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의 혼란상을 엿볼 수 있겠다. 이런 상황 타계를 위해 1964년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으려 할 때 각계 각층에서 반대 데모가 일어났다. 1965년 12월 18일 한·일간의 통상조약이 조인되면서 일본의 자본이 물밀듯 이 땅에 밀려 들었으며 같은 해 역사상 처음으로 월남에 파병을 결정 47,000명의 국군을 파월하였다.

이즈음 한국교회는 각 교단이 경쟁적으로 신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68년 2월 당시 정부로부터 인가 받은 신학대학원은 한국신학대학원, 연합신학대학원 등 3개 대학원이 있었고 서울신대를 비롯하여 6개의 신학대학과 중앙신학, 대한신학, 순복음신학 등 22개 신학교가 있었다. 또한 지방신학으로 부산지방에 9개교 경기지방 2개교, 충청지방 6개교, 전라지방 5개교, 경상지방 6개교 기타 신학원이 5개교 등 도합 60여개 이상의 신학교가 설립되어 1만명의 신학생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한국A.G.는 1965년 5월 13일부터 기독교수양관에서 제 14회 정기총회를 열고 문정열, 김진환, 최경락, 윤진환, 안병관 전도사를 목사로 임명했으며 서기원, 김창조, 추진옥, 이홍구, 유승창, 조병관, 권태갑, 김봉선, 박은석 씨를 전도사로 임명하는 한편, 목사의 자격, 목사의 임직과 해직 등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965년 5월, 교세는 선교사는 8명, 목사 16명, 전도사 32명으로 집계됐다.

년도

교회수

목사수

전도사수

장년교인수

주교생수

비고

1953

19

7

-

857

467

5개 교회만 보고

1958

37

-

-

3,684

2,867

-

1964

47

16

31

4,261

3,212

-

1970

107

44

58

17,172

5,227

-

1976

217

129

204

-

-

-

1980

408

301

370

199,916

-

-

1966년 제 5회 총회시는 교단 명칭 개헌안이 상정되었다. 설명자는 박광수 목사였고 내용은 '기독교 대한 순복음회'와 '기독교 대한 오순절회'였다.개정안에 대한 제안 설명에서 윤진환 목사는 대외적으로 현 교단 명칭이 여호와 증인, 하나님의 집 등과 같이 납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했고, 현재 교단 신학교의 명칭이나, 다수 교회의 명칭이 순복음교회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개정안에 대해 투표에 들어갔는데 '순복음회'란 명칭은 16표로 부결, '오순절회'란 명칭 또한 23표로써 부결됐다.

'순복음(純福音)' 이라는 명칭에 대해 두어 가지 설(說)이 있는데, 1953년 신학교를 개교할 때 이미 교명(校名)을 '순복음신학교'라고 했으며 이것은 미 하나님의 성회가 즐겨쓰는 FULL GOSPEL이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박정근 목사가 설명한다.

또 하나는 1954년, 세계 선교부 루이스 피 리챠드 선교사가 김해군 맥도리에 교회를 세우고 그 이름을 세우고 그 이름을 '순복음맥도교회'라 명명한 것을 위시하여 한국A.G.부산 선교부에서 방송 선교시간을 마련, 그 명칭을 '순복음의 시간'이라 이름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故) 지승권 목사는 주장했다.

1960년대는 한국 A.G.에 있어서 오순절신학의 태동기(胎動期)라 할 수 있다.

월간 순복음이 창간되자 조용기 목사는 동지에 "병을 짊어지신 예수"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 대내외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오순절신학의 정립을 꾀했다.

변종호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신학은

①영혼이 잘됨같이(靈善性全)

②범사에 잘 되고(凡事善化)

③강건하는(治病强健) 이른바 요한 3서 2절의 삼박자(三拍子) 신학이다

이에 한국 교계는 환자치병(신유)을 위하여 기도하는 조목사에 대해 색안경을 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유 및 성령의 역사성에 대하여 신학적 변증이 요구되었고, 박정근 목사가 "오순절 진리를 변증함"이라는 글을 순복음지에 연재하다가 백영사에서 출판했다.

6. 교단헌법 제정

한편, 교단의 초석이 되는 헌법은 1953년 교단 창립 당시 미국 하나님의 성회 헌법에 준한 중앙집권제의 헌법을 제정하여 유지해 왔으나 해마다 수개 조항(條項)을 삭제, 수정, 또는 보충 보완하므로 헌법의 균형이 깨어져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969년 제 18차 정기총회시 헌법 전면 개정을 가결하고 헌법위원을 선정하였다. 위원장에 지승권 목사, 서기 박광수 목사, 위원에 석상회, 조명록, 박정근, 윤두선, 김진환 목사를 선임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개정안 작성을 위촉하였다.

교단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는 가운데 1969년 7월 5∼11일까지 서대문 소재의 순복음중앙교회에서 FEAST(극동 아시아 하나님의 성회 대회)를 개최하여 아시아에 있는 각국 하나님의 성회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운집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회를 열었다. 그때 마샬군도의 망잉이 王(하나님의 성회 신자)이 참석하였다.

<1969년 7월 5일부터 11일 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동북아시아 대회모습>

이즈음 한국교회는 "하나님 선교"에 대한 의식이 차츰 현실참여로 눈뜨게 되어 4·19를 치루고 난 교회는 대사회적인 선구자 입장에서 교회의 소리를 드높였다. 군사정권을 향하여 민간이양을 강력히 요구하고 한일협약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240여 교계 지도자급들이 모여 구국기도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14일, 공화당 정우회 소속의원들이 국회 제 3별관에서 새벽 2시에 야당없이 3선개헌안 국민투표법안을 날치기로 가결하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 개헌안이 찬성 65.1 %로 통과되자 한국교회는"신의(神意)에 빗나갈 뿐만 아니라 그 강행방법이 비민주국가를 방불케 한다"는 NCC측의 개헌반대 성명과는 달리 "강력한 지도체제를 환영한다"는 NAE계의 정치적 발언으로 결국 한국교회의 불일치(不一致)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미래에 도전하는 현대 역사는 항상 이렇듯 불균형을 동반한다.

1971년 4월 27일, 제 7대 대통령에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서울대 학생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금의 정치적 불안을 사랑과 화해로 타개하자고 호소하였으나, '사법파동', '항명파동' 등 불안이 더욱 고조되자 정부는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해방이후 최초로 전국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참여를 통한 민주화운동의 저항으로 진통을 않게된다. 이 때도 역시 보수와 진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은 교회론 시비로 비화되며 눈에 띄게 드러났고 '하나님 선교'에 입각하여 대정부 투쟁을 벌이던 목회자들이 박해와 옥고를 치를 때, 교회 일각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용공주의자(容共主義者)라고 몰아붙였다.

1973년 부활절 예배에서 내란내비음모 혐의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가 구속되었고 한국신학대학 김정준 학장 외 교수 전원이 양심상 현시국을 좌시할 수 없다고 삭발하기도 하였다.

한국 오순절 교회와 통합

한국교회가 이렇듯 수난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를 민중의 지팡이로 내세우는 동안 하나님의 성회는 1972년 10월 24일 오전 10시 임시총회를 갖고 오순절 총회와 전격통합을 하게 된다.

이에 앞서, 8월 28일 서울역 그릴 소회의실에서 양측교단 통합추진 전권위원들이 참석했는데 하나님의 성회에서는 박정근, 정두영 목사, 오순절 총회측에서는 강성숙, 신범하, 박정열 목사였다. 오순절 총회측 강성숙 목사의 개회기도로 시작된 동(同) 위원회는 그 동안 양측 교단의 분열이 흩어진 형제의 헤어짐같이 마음 아픈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다시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천명하기에 이르렀고 다음과 사항을 결의 하였다.

⑴통합총회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을 모법으로 한다.

(단, 헌법 서문에 허 홍 목사에 관한 사항을 삽입한다)

⑵교역자 문제 : 양 교단 교역자는 통합과 동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⑶현 하나님의 성회 임원을 그대로 숭인하고 오순절 총회측에서 한 사람을 실행위원으로 한다.

⑷허 홍 목사를 교단 원로목사 및 명예교수로 추대한다.

⑸신학교 문제 : 오순절총회 신학생을 동일 학년으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신학교) 신학교로 편입시킨다.

⑹통합총회 시기와 장소 및 총회원 성수

①통합총회의 시기는 10월 중으로 한다.

②장소는 대조동 순복음교회로 한다.

③통합총회의 성수는 출석회원으로 한다.

<1973년 여의도로 이전하여 세계제일 큰 교회로 부흥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로써 하나님의 성회 창립 멤버였던 허 홍 목사는 1956년 교단을 떠난지 16년만에 복귀하여 본교단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순복음중앙교회의 여의도 이전과 국제적인 집회

한편 정부의 비상사태가 계속되는 동안 매사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사건으로 불안이 고조되고 유류파동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서민들이 위협받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4년 8월 15일 일본 조총련계열의 문세광(文世光)이 육영수(陸英修)여사를 저격한 사건이 터졌다. 이즈음 한국교회는 1973년 5월 30일∼6월 3일까지 "오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 아래 5·16 광장에서 1백만명이 넘는 신도가 모여서 빌리 그래함목사를 초청하여 전도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다음 해에 전년도를 능가하는 신도가 모인 가운데 5·16광장에서 '엑스폴로 74대회'를 가져 민족복음화의 불길을 높였다. 대학생선교회(대표 김준곤 목사)주관으로 열린 '엑스폴로 74대회'에서 개인전도 및 사랑방 전도방법을 배운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의 소망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 부흥사들은 '빌리 그래함전도대회' 와 '엑스폴로 74대회'등 두 맘모스 대집회를 치루었으며, 다시'77민족 복음화성회'를 여의도광장에서 개최했는데 연인원 300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1977년 5월 16일, 제 26차 정기총회로 모인 하나님의 성회는 총회를 통해 재단법인 정관변경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관심의 초점(焦點)이 되어오던 여목사제도는 찬성 77표, 반대 38표, 기권 9표로 부결되었고, 이 총회를 통해 근 10여년간 교단을 이끌어오던 총회장 조용기 목사가 사퇴하였다. 박정근 부총회장이 총회장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으며, 제 27차 정기총회를 통해 박정근목사는 147표를 얻어 18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때에 신학교를 군포로 옮기고서도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얻지 못한 이유와 순복음중앙교회에 8천만원을 채용해주고 선교센타, 기념관을 지었는데도 채용금을 받지못한 이유 등으로 임원들이 책임추궁을 당했는가 하면, 그 총회에서 총회임원 임기는 1년으로 하되 지방회장은 2년까지 연임할 수 있다는 골자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스토로브리지 선교사 농아선교를 꽃피움

1979년 제 28차 정기총회를 통해 선교부 대표 버드필드 목사와 2년간 100교회 개척을 위해 한 교회 당(當) 1백 5십만원씩 지원한 마일스 선교사, 10년간 평택농아고아원 원장으로 어린이를 돌본 스트로브릿지 선교사를 표창하기에 이른다.

1979년, 6월 29일 미국 제 39대 대통령 지미·카터집사가 내한, 2박 3일 동안 체류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에 있어서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한 및 미국의 '삼당국회의'를 제의하였으며, 교계 지도자들과 만나 선교 및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고 돌아갔다. 그는 한국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으며 주일예배를 여의도침례교회에서 드렸다. 지미 카터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분명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뒤 비극의 10·26 사태를 당하게 된다.

집권 18년 동안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와 경제부흥을 위해 소위 개발독재를 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서거하자 온 국민은 경악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NCC를 비롯한 각 교단, 기관단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충심으로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국교회와 국민들에게 국가안전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으며 정부는 비상사태를 간파, 즉시 계엄령을 전국 일원에 선포하였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앉았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최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12월 7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 9호의 해제를 선포하여 민주인사들의 복권 및 해금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그 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요구를 한꺼번에 발산하여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처하게 되었고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하는 三金氏의 정치공세, 그리고 사북사태, 학생시위 등은 육군 소장인 보안사령관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군인들에게 정권을 가로챌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12·12라는 군부내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일어나 정치일정이 이미 전두환 등 정치군인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었으나 이를 눈치채는 사람은 적었다. 해가 바뀌어 1980년 5월 18일, 마침내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온 도시가 마비되고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진압군과 시민이 대치하여 여느 전쟁 못지 않는 인명(人命)과 재산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80년 민족을 위한 금식기도

이미 위기(危機)는 감지되고 있었던 바, 사태가 일어나기 두 달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민족의 상처를 고쳐주소서"라는 주제로 '전국 교역자 구국금식기도회'를 1980년 3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산리기도원에서 개최하고 나라와 민족이 당면한 위기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십사고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1980년, 제 29차 정기총회에서는 27개의 헌법 개정안을 심의한 결과 관심의 대상이 된 부총회장을 2인제로 하자는 안을 통과시킨 후, 임원선거에서 총회장에 조명록 목사, 제 1부총회장에 문정렬 목사, 제 2부총회장에 박광수 목사, 총무에 김진환 목사가 각각 선출되었다.

교단 30주년 기념대회

동년(同年) 8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여의도선교센타에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는 주제로 제 3회 '전국 교역자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그 날 열린 실행위원회에서는 다음해 4월에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대회'를 갖기로 하고 대회조직을 확정 발표하였다.

<박광수 목사의 축도>

<교단 30주년 기념대회>

1981년은 교단역사에 있어서 변화가 극심하였던 한 해다. 어느 때보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교단 3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히 가졌는가하면, 그 행사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교단분열이라는 혼란의 와중에 휩싸이게 된다.

그 해는 1953년에 교단이 창립된 후 정확히 28주년이지만 왠일인지 앞당겨서 그 행사를 치루려고 하였다. 당시 총회장이던 조명록 목사는 재임기간 중에 무언가 큰일을 이루고자하는 의욕이 높았는데 총회회관을 신축하는 한편, 교단 30주년 기념대회를 가져서 교단 창립 이후, 가장 분위기가 좋은 이 때에 교단의 역량을 결집하여 한국교계에 위상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교단 3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사업이 일어났는데, 교단 중진 목사들의 설교모음집이 [성령의 횃불을 드높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교단창립 이래 역사를 정리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30년사]라는 연감집(年鑑集)이 기념대회 개최일에 맞추어 나왔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역작(力作)이랄 수 있는 것이었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순복음중앙교회(이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통일)에서 열린 동(同) 대회는 "성령의 횃불을 드높이"라는 표어 아래,

①지속적인 성령운동울 전개하는데 주도적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②교단 총화와 힘을 국내외 선교에 집약하기 위하여

해외교역자를 비롯, 700여 국내 교역자와 30만명의 성도들이 참가하여 낮에는 교역자세미나 등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고, 밤에는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교단의 화합과 결속력이 뛰어났고 그 결과도 흡족하였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얖에서 30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한 교역자들(1981.4.16)

7. 교단 분열

그러나 이렇게 교단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대교구장을 하던 박용래 목사가 남미로 선교사로 가라는 교회방침에 몹시 갈등하다가, 때마침 오산리기도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알게된 장로교 출신의 임(林) 모(某)집사의 '강남의 요지에 건물을 얻어서 교회를 개척하자'는 제의를 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는 이 사실을 숨긴 채 건강상의 이유라며 사표를 쓰고 새 교회 개척에 발벗고 나선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2억원을 들여서 뉴코아 백화점이 있는 뒤편에 위치한 신축상가 전체를 임대하여 개척을 했는데 창립멤버 중에는 박용래 목사가 교구장으로 일하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식구도 다소 따라왔다. 이 사실이 그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강남지방회에 알려지게 되자 강남지방회는 목회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교회 가입을 보류하고 있었다. 이에 박목사는 지방회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하여 바로 총회에 가입청원을 하였고 6월 5일 개최한 제 1회 실행위원회에서 논란 끝에 신반포순복음교회 가입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개교회의 가입이 지방회에서 먼저 심의한 후, 총회로 상정하는 것이 순서인데 거꾸로 된 변칙이었다.

이 사건은 조용기 목사와 총회임원 간에 감정적으로 크나큰 앙금을 남겼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서곡에 불과하였다. 그 해 여름 김 모(某) 장로에 대한 안수기도 문제로 영락교회 당회장 박 모(某)목사가 조용기 목사를 비난하였고 그것이 교계에 알려지면서 점차 이야기가 확대, 재생산되어 가면서 이단운운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9월 15일에 열린 제 2회 실행위원회에서는 언론 등 항간에서 조용기 목사에 관한 난무하는 설(說)에 대해서 교단적인 차원의 대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는데, 그 회의 결과에 대한 기독교계의 신문보도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조용기 목사를 소환하여 사실심리를 하고 떠도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면 목사직을 제명하겠다는 등…"

그 회의에 참석했다가 신문에 난 기사를 본 실행위원들은 크게 놀라면서 논의되지도 않은 일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보도될까하고 의심스러워 하면서, 진위를 밝히고자 해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좋지 않는 쪽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신문보도 9월 15일, 그 해명서가 다음 주인 9월 21일, 이 때부터 교단 내부에는 조용기 목사를 옹호해야 한다는 측과 잘못이 있다면 조사해서 흑백을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측이 갈라지고 있었고 줄줄이 성명서, 해명서 등을 경쟁적으로 내어 놓았다.수습될 어떤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번에는 총회본부에서 교단월간지「순복음」의 편집일을 보던 김덕환 전도사가 "조용기 그는 과연 이단인가?"라는 책을 써서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믿지 않은 세인(世人)들까지 무슨 구경거리라도 된 것인 냥, 주간지 월간지에 앞다투어 다루고 순복음교회를 이상하게 보니, 이일의 피해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조용기 목사 만은 아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내 대결 양상이 극명하게 드러났는데, 조명록 총회장이 중심이 된 측에서는 그 동안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총회의 헌법 위에 초법적(超法的)으로 행동하였던 것을 단죄(斷罪)하려 들었으며 몇 차례 면담을 가지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조용기 목사가 고의적으로 회피한다고 결론을 내린 끝에 조용기 목사에게 소환장을 발부하기에 이른다.

조용기 목사는 교단이 자신을 제명(除名)으로 몰고 가기 위한 수순(手順)을 밟고 있다는 유력한 제보자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고, 제명을 당하느니 차라리 먼저 탈퇴를 하는 편이 낫다고 하여 1981년 10월 13일 자로 교단탈퇴 성명서를 내고 수년 동안 총회장 까지 지냈던 교단을 탈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회 선교회 측과는 계속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하였다.이렇게 되자 조용기 목사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조용기 목사가 본교단에 남긴 지대한 업적을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무례하게 밀어부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우선 기독교 언론에 실행위원회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나아가 교단을 파행상태로 몰고간 장본인인 총회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면서 지방회의 전?현회장 19명의 이름으로 총회장 불신임 및 임시총회소집 결의안을 공고하였다.

이에 맞서 12월 7일, 총회장 조명록 목사는 임시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조용기 목사를 제명하고 교단의 질서를 위해 신창균 목사 등 6인을 1년 동안 징계처분하였다.

그러나 같은 날, 서울의 한 쪽(봉천동 소재, 새서울순복음교회)에서는 별도의 임시총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신창균, 박종선 목사등이 중심이 되어 조용기 목사를 지지하는 별도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구성하였고 신창균 목사를 총회장으로, 박종선, 조용목 목사를 부총회장으로, 제양성 목사를 총무로 하는 등 새로운 임원을 선출하였다. 총회사무실을 신반포의 고속버스터미날 옆에 두었는데 이 총회를 '반포측'이라고 지칭하였다.

1981년 12월 7일은 우리 교단 역사에 '분열'이라는 또 하나의 아픔의 날이자, 발전과 성숙을 향해 가기 위하여 자신들의 미숙함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숨은 섭리가 있는 고별(苦別)의 날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꼭 10년 만인 1991년 12월 12일, 그 동안에 쌓인 앙금을 말끔히 씻고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조용기 목사가 등단하여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갈라져 나갔던 허물을 용서해 주고 받아달라"고 하면서 헤어졌던 동료 목사들을 얼싸안고 교단통합선언 대회를 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8. 분열 뒤

오히려 분열 뒤에 교단은 한층 성숙하고 부흥하였다.

1982년 분열 뒤 첫 해에 서대문측은 총회를 열고 총회장에 소교민 목사를 선임하였고 반포측은 신창균 목사를 총회장으로 뽑고 양측에서 각각 뽑은 목사 후보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다.

분열직전 교세를 보면 교회수가 450여개, 교역자수가 700여명, 교인수 25만을 헤아리고 있었으나, 서대문 총회측은 230여 교회, 교역자수 300여명, 교인수 7만 정도로 감소하였고, 신반포측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포함하여 220여 교회, 교역자 370여명, 교인수 20만을 헤아렸다.

서대문 총회측(이하, 총회 혹은 총회측)은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200교회를 지원하겠다는 마일스 선교자금을 지원받아 서서히 교회수도 늘고 부흥되었으며, 빈혈상태가 정상상태로 돌아왔고, 신반포측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한달에 1억원씩 지원하는 개척교회 보조금을 받아 풍성하였고 그만큼 부흥이 잘되었다.

한국교회협의회 KNCC가입안은 1987년 제36차 정기총회에 상정되었으나 1년후 더 연구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37차 정기총회에서는 완전히 부결되었다.

9. 순복음신학교의 발전과정과 교단신학교

1953년 4월 8일, 교단설립과 동시에 신학교도 개설(開設)하였는데, 그것은 일찍이 교단지도부가 오순절적인 신학교육을 통한 견실한 목회자를 양성함으로써 교단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단 창설과 동시에 용산구 한강로1가 65번지 남부교회 내에 신학교를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우선 타교단에서 오순절신학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을 받아서 6개월 정도의 과정으로 수료하였다. 이 때 장로교의 목사였던 김상호 목사가 이 특과를 수료하고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된다.

53년 8월 1일, 신학교 교사(校舍)를 교통편이 더 좋은 서대문구 충정로1가 21번지(현재, 삼성강북병원 자리) 박성산 목사가 개척한 서부교회 내로 옮긴다. 그리고 미(美)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을 선교집중국(宣敎執中國)으로 지정함에 따라, 신학교를 위하여 대조동에 약 1만평의 대지를 사들였으며 버드 목사를 통해 2백 5십만원, 세계복음화운동기금 4백만원 등이 모금되었고 1960년 3월 5일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61년에 완공하여 신학교를 거기로 옮기고 대조동 시대의 막을 열게 된다.교단이 발전하면서 많은 신학지원자가 몰려오고 학교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한국사회가 경제가 부흥되면서 고학력의 실력있는 지도자를 요구하고 타교단에서는 교단신학교를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아 신학대학들로 발전해가고 있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자 순복음신학교도 대학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학생들로부터 일어났고 70년대 들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구체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당시 신학교는 운영상 미선교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장은 미국 선교사들이 맡고 있었다.그러나, 70년대부터 난립하는 무인가 신학교 등 교육기관 단속에 순복음신학교도 그 대상이 되는 수모를 받자, 학생들은 신학대학 인가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며, 미온적인 학교 당국자와 교단본부를 대상으로 투쟁을 했다. 그결과 학교 당국과 총회 집행부 그리고 조용기 목사로부터 대학인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70년대에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가 심각하여 정부는 절대로 수도권에 대학을 인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학인가에 따른 요구조건이 너무나도 까다로왔다. 차라리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게 현실이었다. 순복음신학대학으로 가는 첫 걸음으로 1976년 5월 16일에 순복음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구성하고 기성회장에 조용기 목사를 선임하였으며, 학생들은 나름대로 순복음신학대학인가 학생모금 추진위원회(위원장: 한문수, 서기: 최성규)를 구성하여 그 어려운 학생들의 호주머니에서 1천만원 가량이 모금되었다. 이사회에서는 안양에 사둔 임야가 신학대학으로 적절치 못한 것으로 판단, 일부를 매각하여 1977년 12월 8일에 군포시 당정동의 임야 20,981평을 구입하였다.

<군포 신축교사 준공시 (77년12월8일)>

1978년, 여의도교회 헌금으로 강의실 1동 766평을 건립하게 되었고 주간부가 그리로 옮겨 공부를 하였으나 여러 가지 불편이 따르게 되고, 잠깐이지만 다시 대조동으로 복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다가 1981년 12월 26일에는 문교부로부터 "순복음신학원"이라는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받고 이사장에 박정근 목사, 부이사장에 임동욱 장로가 취임하였다. 이어서 198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4년제 신학교(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낭보였으나 교단분열과 그로 인한 운영난 문제로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초대학장에는 아더 씨 숄티스(Arthur C. Sholtis) 박사가 취임하였다.

<순복음신학대학 신축 조감도>

1977년 12월 8 본관건물(766평)을 준공하고 준공기념식을 가졌다.

조용기목사가 설교

총회 실행위원회에서는 학생들의 2중 모집에 따른 학교의 약화가 우려되어 대조동신학교는 야간부만 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그러나 군포신학교는 시설이 태부족한 가운데 수업을 시작한터라 학생의 불만은 커져 데모가 빈발하였다. 본관건물만 하나 덩그마니 서있고,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은 마스터플랜은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1985년 1월 8일,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교로 인가가 났다. 선배들이 이 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해왔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그러나 이 인가는 문교부가 요구하는 시설기준을 연도별로 채워나가야 하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도 수반하였다.

마침 박정근 이사장의 4년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학생들은 학교발전을 위하여 재력을 갖춘 새 이사장을 요구하였고, 일부 이사들도 이에 수긍하면서, 교단이 분열된 상태는 별개의 문제로 학교발전을 위하여 조용기 목사를 제 2대 이사장으로 선임하게 되었다.

당시 이 결정은 오직 신학교의 발전만을 위해서 내린 것이었지만, 교단의 통합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분열은 되었으나 오순절신학이라는 신학의 모태(母胎)는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목회일선은 나누어져 있지만, 신학을 하는 후배들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학교의 입학식, 학위수여식 등 이런 저런 일로 총회 지도부와 조용기 목사가 자주 만나는 창구(窓口)가 되었고 억지스러운 비유 같지만, 별거한 부모가 자식 때문에 만나다보니 다시 재결합하는 것처럼 순복음신학대학은 교단 통합을 이루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1985년 이름까지 달리한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가 탄생하므로 완전한 분열로 판단한 서대문 총회는 교역자 수급이라는 문제 때문에 야간부만 남았던 대조동 신학교에 다시 주간부를 병설하였고 교단의 정통성, 신학교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순복음신학교의 원류(原流)를 그대로 이어받은 바로 그 "순복음신학교"라고 하였다. 바로 이 때, 특기(特記)할 일이 발생했다. 군포에 순복음신학교가 인가되고 운영되면서 학교제반서류(특히 1981년 까지 입학한 학생들의 학적부)가 대조동에서 군포로 옮겨갔다가 다시 대조동 신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10.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한편, 85년 1월 1일에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새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

총회장에는 조용목 목사가 추대되었다.

예수교 하나님의 성회 창립이 있기 까지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다.

81년 12월 7일, 교단이 분열되면서 신반포 측이 교단을 반분(半分)하여 운영하다가 갑자기 좌절을 만난다.

매월 1억원씩 여의도순복음교회로부터 지원받던 보조금이 끊기고 이어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신반포 측 교단과의 관계를 청산(淸算)하였다. 그리고는 바로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여 소위 "헤쳐 모여"하게 되었다.

좌절과 혼란에 빠진 신반포 측 교단은 3년 만에 와해되고 소속 교회들은 제각기 갈길 찾아 나섰는데 대체로 세 부류로 나뉘게 된다.

첫째로 서대문 총회로 복귀한 교회들,

둘째로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들어간 교회들,

셋째로 신창균, 제양성 목사가 주축이 되어 남현동에다가 본부를 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삼성 측)에 들어간 교회들,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중심으로 급속도로 부흥해 갔으며, 서대문 총회는 반포측에 속했던 교회들을 받아들여 정통성을 자부하며 나름대로 견실하게 발전해 갔다. 그러다보니 정통성을 갖고 있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서대문 총회측과 여의도중심의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삼성측 이렇게 세 개 교단으로 분열되었고, 신학교도 각각 운영하였다.

총회측은 대조동에서 야간부만 운영하고 있던 것을 주간부까지 확대하여 순복음신학교를 발전시켰으며, 여의도측은 양평동에 빌딩을 짓고 순복음신학원을 운영하였는데 매년 수백명씩 목회지원자가 배출되었다. 그리고 남현동측은 남현동 교회 안에 순복음총회신학교를 운영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다.

<오순절 세계대회 88년9월13일>

11. 교단통합

교단이 분리된지 10년이 지난 1991년 여름부터 교단 재통합의 논의가 있게 되었다.

순전히 하나님의 뜻과 계시라고 말하는 조용기 목사의 개인적 결단이기도 하지만, 때마침 총회의 제 42차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임된 서병렬 목사의 친(親)여의도 성향도 작용했다. 그리고 미(美) 하나님의 성회에서도 전폭적으로 환영하였고 증경총회장들과 양측 통합추진위원들이 양보하고 노력한 결과 완전 통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통합결정을 위한 임시총회를 11월 28일 청주에서 열었다. 합헌적 소집과 절차에 따라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91년 12월 12일에 잠실체육관에서 통합선언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그후 92년 2월 18일에 순복음신학대학에서 통합총회가 개최되어 김진환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이로써 양교단이 완전한 통합을 이루게된 것이다. 일찍이 한국 교계에 없던 놀라운 일이었다. 수없이 분열되어 한국에 교단·교파수가 300여개에 달하지만, 다시 합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미 한국 교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양교단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가운데 통합을 성사시킴으로 오순절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단의 은혜로운 모습을 한국교회사에 한 전례(典例)로 남기게 된 것이다.

이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 교회에 굵직한 대교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장로교(합동, 통합), 감리교, 그 다음으로 큰 교인수를 가진 대교단이 되었다.

1992년 통계를 보면, 교회수 1천여 교회, 교역자수 2,800여명, 교인수 1백만에 근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광수 목사 등 일부 목사들은 통합을 결정한 청주 임시총회를 절차상 문제가 있는 불법총회라고 규정하고 교단을 수호한다며 통합을 반대했다. 이후 여러 차례 가졌던 완전통합을 위한 대화노력은 소득이 없었고 결국 또 하나의 총회가 만들어졌다. 스스로 서대문 측이라고 하지만, 교계에서는 통상 '수호측'이라고 부른다.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동일한 명칭 아래 분열 아닌 분열이 되고 말았는데, 수호측에서는 김성광 목사를 첫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사정은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교단에서 명실공히 일인자(一人者)인 중앙위원장이자, 조용기 목사의 아우인 조용목 목사가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잔류하게 되었고 이로써 대통합(大統合)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외에 세 개의 교단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전체가 통합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고 기도하면서 계속 대화의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교단명칭

별칭

소재

총회장

비고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기하성)

통합측

서울 종로 · 평동 222

이원재

92.2.18 통합

수호측

서울 종로 · 평동 222

김준성

박광수 목사

삼성측

서울 관악 · 남현동

제양성

신창균 목사

예수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예하성)

-

서울 영동포 · 양평동

허 인

조용목 목사

<위의 표는 기독교 언론기관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류한 것임>

완전통합을 이루기 위한 대화 노력이 인내 속에서 진행되던 중에 그 열매를 맺어 1996년에는 수호측과의 활발한 교섭이 있은 후에, 수호측 총회장 김성광 목사를 비롯한 총무 이천영 목사 등 1백여 교회(수호측 교회의 3분의 2)가 통합의 대열에 합류하여 1996년 11월 21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재통합선언예배를 드렸고, 이 자리에서 김성광 목사는 "91년 11월 28일 청주 총회에서 결의한 합헌적 통합결의를 존중하며 뒤늦게 통합에 합류하는 것" 이라고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산청군 석대로365번길 39 (에스라하우스) 유앙겔리온
  • 대표전화 : 055-972-7753
  • 팩스 : 055-972-0691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용창
  • 법인명 : 유앙겔리온
  • 제호 : 유앙겔리온
  • 등록번호 :
  • 등록일 : 2017-04-05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노우호
  • 편집인 : 엄인영
  • 후원계좌 : 우체국 610212-01-001231 에스라하우스
  • 유앙겔리온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유앙겔리온.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orbaea.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