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화 탐방(이란편)
이슬람 문화 탐방(이란편)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0.12.0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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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땅에 꽃핀 이슬람 문화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동(中東)하면 사막을 떠올리는데 이란은 열사(熱沙)의 사막이 아닌 고원(高原)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쪽의 고원은 상당히 추워서 1년에 몇 달은 눈에 덮여 있는 곳도 있어서 이 고원지대에서는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기원전 7세기쯤 이란人들의 일파인 메디아(Media)인들이 아시리아(Assyria)에서 독립해 남부 이란과 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708∼550 BC)을 세운 것이 이란인의 최초의 왕조였지만 중앙집권제를 이루지 못하고 연합체에 그쳤기 때문에 정식으로는 아게메네스(Achaemenes. 550∼330 BC)왕조로부터 시작했다고 본다.

그 뒤 사산(Sasan) 왕조(AD 226∼651) 때 몽골의 지배(1256∼1349)와 다시 티무르 왕조(1369∼1500)의 지배를 거쳐 사파비 왕조(1501∼1736)로 넘어온다.

이란은 서남아시아의 페르시아만(灣)에 있는 나라로 1918년 영국 보호령이 되었고, 옛날에는 페르시아(persia)라고 불렀으나 1935년 ‘아리아인의 나라’라는 뜻의 현재 국명(國名)으로 개칭하였다.

근대 이란은 아가 모하마드 칸(Agha Muhammad Khan)이 케르만(Kerman) 지방에서 잔드(Zand) 왕조(1750∼1794)를 끝내고 카자르(Qazars) 왕조(1794∼1925)를 열면서 테헤란으로 천도(遷都)했다.

무자파르 알 딘 샤(Muzaffar al Din Shah. 재위 1896∼1907) 때인 1906년 페르시아 입헌혁명이 일어나 봉건사회가 폐지되고 이란 최초의 의회와 헌법이 탄생하여 1911년까지 지속되었지만 1911년 12월 20일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혁명정부는 끝나고 팔레비(Pahlevi) 왕조(1925∼1979)가 등장하였다.

1979년 4월 1일 反정부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Khomeini)가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을 수립한 후에는 경제가 낙후되고, 의사․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거 타국(他國)으로 탈출하여 지식과 의료수준이 낮은 편이다.

1970년 팔레비 국왕이 중동지역의 패권 장악을 위해 추진했던 핵무기 개발이 1990년 이후 다시 본격화되자 이를 막으려는 미국과 이스라엘 등 국제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행정 구역은 30개 주(Ostan)로 되어 있고, 면적은 165만㎢로 한반도의 7.5배이나 인구는 약 6천만 명이며, 주요 민족은 이란族(51%), 아제르바이잔族(25%), 쿠르드 및 터키系(20%), 기타(4%)로 되어 있으며, 종교는 이슬람의 시아파가 99%를 차지하고 나머지 1%는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 등이다.

연간 강우량이 355.6㎜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물이 부족하여 모든 면에서 물의 규제를 받고 있으며, 촌락(村落)이나 경지(耕地)는 바다의 섬처럼 오아시스를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농경지는 국토 총 면적의 10%에 불과하다.

여름과 겨울의 기후 차(差)와 계절에 따라 목초지도 지역적인 편차가 심하므로 목축도 유목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부족이나 촌락에서는 이슬람 승려들이 분쟁을 조정한다.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세계 제 2의 석유수출국이었으나 1979년 호메이니의 종교혁명과 1980년부터 7년간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정유시설이 부족하여 휘발유 소비량의 80%를 수입하고 있어 공공기관을 제외한 개인의 승용차에는 휘발유를 하루에 3ℓ씩 판매(가격은 80원/ℓ)하는 Card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국민들의 불만이 많다.

이란인은 원래 배화교(拜火敎. Zoroastian)를 믿었으나 오늘날에는 헌법 제 12조에 따라 공식적인 종교를 시아 자파리 하프트 이맘(Jafari faith of the twelve Imams)으로 삼고 있으며 또한 이란인의 공식 언어와 문자는 퍼르시(Farsi)이고, 의무교육 기간은 8년인데 여름방학은 3달(6/21∼9/20)이며 겨울방학은 없고, 문맹률은 25%로 추정하고 있다.

글씨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옆으로 쓰고, 숫자는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지만 읽기는 모두 쓰는 순서대로 읽는다.

이 나라는 남녀 구분 없이 신체의 부분이 드러나지 않는 복장을 함으로써 남녀간의 질서를 포함한 사회적 질서를 지키고 특히 여성들의 복장은 신체의 선과 머리카락을 감출 수 있는 헐거운 바지 또는 긴치마와 긴소매의 옷을 입어야 하고 스카프(히잡. hijab)를 머리에 둘러야만 한다.

여성 관광객은 테헤란 국제공항에 내리기 전까지는 반드시 이 스카프를 착용해야 한다.

 

▲ 10/8

인천 공항에서 이란의 테헤란 국제공항까지 직행하는 비행기는 탑승률이 저조하여 내년부터는 이 노선을 폐지한다는 말이 있기에 급히 떠나는 여행인데다 24명의 일행 중 안면이 있는 사람이 없기에 이번에는 조용한 여행이 됨과 동시에 그곳에서는 알코올의 반입과 소지가 법으로 처벌되기에 이번 여행기간 동안에는 위장(胃腸)의 자연 치유(治癒)가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Beizing, Gobi desert, Urumqi, Tarim Basin, Alma-Ata, Himalaya, Tashkent, Samarkand를 거쳐 테헤란 공항까지 9시간 15분을 비행하였다.

비행기의 내부시설이나 화장실 구비상태 및 청결상태는 한국 비행기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데 속력만은 여태까지 내가 타 본 비행기 중에는 제일 빨리 달리는 것 같았다.

밤 10시 40분에 도착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완전히 불야성(不夜城)이었으며 호텔에 들어오니 12시가 되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10/9

◎ 테헤란(Tehran)

해발 1,300m의 고원도시인 이곳은 1229년 셀주크(Seljuk) 왕조(1037∼1157)의 수도였던 레이(Rey,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6㎞ 떨어져 있음)가 몽골군에 파괴된 후 그 대신 만들어진 도시로, 16세기 중엽에는 사파비 왕조의 타흐마스프(Tahmasp)Ⅰ세(재위 1524∼1576)에 의해 별궁(別宮)이 건설되고 주위 8㎞에 이르는 성벽이 축조되었다.

1794년 카자르(Qajar) 왕조의 발족과 함께 시조인 아가 모하마드 칸(Agha Muhammad Khan)에 의해 수도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의 인구는 약 15,00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인구가 5∼6만 명으로 증가되어 성벽을 15㎞의 크기로 확대를 하였다.

1925년 성립된 팔레비(Pahlevi) 왕조에 의해 다시 수도로 지정되면서 성곽을 철거하고 시가지를 성벽 밖으로 크게 확장하여 옛 건물은 다 철거되었기 때문에 테헤란 시가지는 직선도로와 유럽풍의 건물이 많고 오랜 역사로 새겨진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구 시가지는 흙벽과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어 신시가지와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왕궁과 의회 그리고 행정관서 등은 모두 구 시가지에 있다.

1974년 아시안 경기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79년 혁명 후 호메이니 체제가 성립된 뒤부터는 서방세계와 거의 접촉이 없는 폐쇄적인 도시로 바뀌었다.

1925년 팔레비 왕조 성립 당시 30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지금은 약 1,000만 명에 이르며, 거리마다 자동차가 꼬리를 이어 교통이 혼잡하기가 이를 데 없고, 파란 신호를 보고 직진하는 자동차 앞을 행인(行人)들이 유유히 건너고 있으며, 오토바이가 너무 많아서 더욱 교통이 혼잡하다.

알라(Allah) 神도 이 교통지옥은 어떻게 할 수 없나보다.

연평균 강수량은 208㎜로 적고 기후가 건조하며 비는 주로 겨울에 내리고, 겨울의 최저기온은 -1℃-2℃이며 눈도 1년에 2∼3번 온다고 한다.

이렇게 강수량이 적고 건조하여 거리의 나무와 잔디는 人工으로 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물은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하철은 테헤란에만 2개의 노선이 있다는데 직접 타 보지는 못했다.

 호메이니(Ayatollah Ruholloh Khomeini. 1900∼1989)의 묘

그는 1927년 이슬람語校 사원에서 철학을 강의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는 국왕 팔레비의 종교탄압에 저항하였으며 특히 1941년 ‘비밀의 폭로’란 책을 저술하여 왕정을 부정하고 왕이 추진하는 이란의 서구화와 세속화 정책에 반대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아야톨라(Ayatollah)라는 칭호를 받았고, 이슬람교 시아파의 지도자였던 보루제르디가 죽은 후에는 샤리아트마다리, 밀라니와 함께 시아파의 3 거두(巨頭)가 되어 국왕 팔레비의 ‘백색혁명’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가 투옥된 후 터키로 망명하였다가 1965년에는 이라크의 나자프로 옮겼으며, 또 1978년에는 파리 근교로 옮겨 그 곳에서 이란 혁명을 지도하였다.

1979년 2월 수도인 테헤란에 귀환한 후 임시 혁명정부를 조직하였으며, 12월에는 신헌법(新憲法)을 공포하여 이란 이슬람공화국을 성립시켰다.

그 후 그는 이맘(Imamn ; 敎主)의 칭호를 받았으며, 1989년까지 국가의 최고지도자(종교 지도자이면서 실질상으로는 국가를 대표함)로 이란을 통치하였다.

그가 죽은 지 18년이나 되는데 죽은 2년 후부터 이 건물의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완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약 5년 후에야 완공 예정이라고 한다.

역시 아무리 큰 권력을 휘둘러도 죽고 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은 것은 이란의 神과도 같은 존재인 호메이니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모양이다.

입구의 큰 현수막에는 호메이니와 現 종교지도자인 하메네이(Khamenei)의 모습이 오른쪽에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호메이니의 아들과 손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내부는 상당히 넓으며 묘지에는 호메이니와 그의 아들의 묘가 있고 묘지 울타리 안에는 많은 돈이 던져져 있다.

대리석 바닥에는 양탄자를 깔아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특히 건물의 큰 기둥 옆에 있는 흙으로 구운 손바닥의 1/4만한 단단한 모흐르(Mohr)를 가지고 가서 바닥에 놓고 이마를 거기에 닿게 하여 절을 하고 있는 무슬림의 시아파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을 보았다.

큰 공간은 대집회(大集會)나 종교적 행사를 하는 곳으로 사용되며, 밖의 공간도 상당히 넓은데 여름방학 동안에는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에 텐트를 치고 안에서 기도를 하기 때문에 빈 공간이 없다고 한다.

그 옆에 있는 공동묘지의 윗면에는 우리나라처럼 둥그런 봉우리가 없고, 시신(屍身)을 매장한 위에 평평한 비석을 덮어놓아 땅과 같은 높이로 평평하게 하였으며, 매장을 할 때는 관을 사용하지 않고 흰 천으로 동여맨다고 한다.

또 옆에는 전장에서 숨진 군인들의 묘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묘비도 있고 위에는 지붕도 있다.

 

● 골레스탄 왕궁(Golestan Palace)

꽃의 궁전이라 불리는 골레스탄은 테헤란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유적지인 아르그(Arg)라는 요새였는데 이 궁전은 사파비(Safavid) 왕조의 타흐마스프(Tahmasp)Ⅰ세가 건설한 하나의 성채였다.

대리석 옥좌 테라스는 정문 바로 앞에 있는 골레스탄 왕궁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 테라스에 대리석 옥좌가 있기 때문에 대리석 옥좌 테라스라고 한다.

이 옥좌는 카자르 궁전 수석 도장공인 미르자 바바 나그하쉬 바쉬(Mirza Baba Naghash Bashi)가 디자인을 했고 왕실 석공인 모하메드 에브라임(Mohammad Ebrahim)의 감독 하에 야즈드(Yazd)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상질(最上質)의 황색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이 옥좌 주변은 이란의 훌륭한 건축술로 표현된 그림, 조각한 대리석, 타일, 스투코(Stucco ; 치장 벽토), 거울, 조각한 나무, 그리고 격자(格子 ; 같은 간격으로 규칙 있게 반복된 구조) 창(窓)으로 꾸며져 있다.

골레스탄 복합 건물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인 장엄한 이 건물은 잔드 왕조의 창시자인 카림 칸 잔드(Karim Khan Zand. 재위 1750∼1779)에 의해 재건되면서 모양이 많이 변형되었고, 카자르 왕조의 시조인 아그하 무하마드 칸(Agha Mohammad Khan Qajar. 재위 1794∼1797)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요새였던 아르그는 왕족이 거주하는 궁전으로 바뀌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1795년에는 8m 높이의 거대한 돌기둥 두 개, 무늬가 새겨진 문 두 개, 대리석 벽판, 그리고 벽 위쪽의 유화(油畵) 그림들을 쉬라즈(Shiraz)에 있는 바킬(Vakil) 왕궁에서 테헤란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내부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거울로 장식되어 있고 보석과 옥으로 치장하고 있어서 화려함은 극치에 이르고 있다.

탁테 말마르(Takht-e Marmar)라는 대리석 옥좌(玉座. marble throne)가 있는 건물은 천장을 작은 유리로 모자이크해서 꾸며놓았고, 창문도 모두 색깔로 모자이크가 되어있는데 이 대리석 침대와 왕궁은 카자르 왕조의 2번째 왕인 패스 알리 샤(Fath Ali Shah)에 의해 1801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약 200여 명의 후궁(後宮)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의 자손만도 17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옛날 왕들의 정력은 정말 대단한 모양이다.

이곳은 카자르 시대에 공식적인 왕실 접견 장소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사람들이 이곳으로 왕을 만나러 왔으며, 이곳에서 팔라비(Pahlavi) 시대에 마지막 왕실 접견(接見)이 있었다.

약 100m 앞으로 가면 왼쪽에 있는 네가르 칸(Negar Khane) 미술 전시관에는 카자르 왕조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 미술사(史)의 흐름과 색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낫세르 알 딘 왕(Nasser al Din Shah 재위 1848∼1896)의 초상화가 많고, 왕과 왕비들이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그때의 보석은 현재는 이란 보석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이 글 마지막 쪽 참조)

 국립 고고학 박물관

1930년대에 개관된 이 박물관은 1층은 선사시대에서 사산조 시대에 이르는 페르시아의 유물들을, 2층에는 이슬람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2층은 수리 중이라 우리는 1층만 견학했다.

BC 4세기의 토기 유물, BC 4세기∼BC 1세기의 토기와 철기 유적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BC 1700년경에 만들어졌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거의 전문(全文)이 조각되어 있는 석비(石碑)가 전시되어 있는데 실물은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여기는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벨론(Babylon) 제 1왕조 6대 왕인 함무라비(재위 1792∼1750 BC왕에 의해 BC 1750년경에 반포된 현존(現存)하는 고대 오리엔트 최대의 성문법전(成文法典)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법전 중 체계를 가장 잘 갖추고 있으며, 그 범위가 방대하고 또 그 당시까지의 고대의 모든 법률을 집대성한 법전이라고 할 수 있기에 고대 세계의 법전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긴 서문, 282개조(49열 3000행) 법문, 발문(跋文)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법전 제정의 목적을 함무라비는 序文에서 “나라의 정의를 구현하고 강자가 약자를 학대하지 않도록 하고 악인이나 비뚤어진 자를 멸(滅)하기 위해서 이 법전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왕이 국토와 인민의 번영을 위해서 행한 여러 가지 업적을 든 뒤에 바빌론의 주신(主神)인 마르두크(Marduk)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법률과 정의를 나랏말로 규정하고 이것을 포고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상부에는 태양의 신으로 정의의 신(神)인 샤마쉬(Shamash)로부터 함무라비 왕이 법전을 받는 정경(情景)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지배자인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지배는 곧 신의 지배라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지배계층(당시의 계급구조; 제사장-귀족-평민-노예)의 저항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다.

비석의 하부는 前文과 後文 이 외에 282조위 규정이 49열에 약 3000행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전면의 5열 35개 조항(66조에서 100조까지)은 엘람(Elam) 왕 슈트르크 나폰데에 의하여 마멸되었지만 지금은 여러 사본에 의하여 그 내용의 대부분이 파악되고 있다.

설형문자(楔形文字 ; 옛날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에서 사용하던 쐐기 모양의 글자 cuneiform Script)로 된 법률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사회․경제․생활의 전체를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세 율법과 유사한 곳이 많아 성서학(聖書學)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죄(罪)의 근절을 목적으로 하여 죄악의 파멸성(破滅性)을 강조하였지만 재산 보호를 위해 처형하는 경우나 피해자나 가해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법을 다르게 적용한 예는 없고, 그 형벌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를 두었다.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은 사람과 사물을 동등하게 취급하여 대인(對人)에 대한 범죄나 대물(對物)에 대한 범죄가 똑 같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형벌은 인간의 의사에 좌우되게 되어 있지만 법조문의 내용 중 기존 계급질서를 어겼을 때(종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는 끔직한 응징이 가해질 조항들이 들어 있다.

법조문의 주요내용

•제 42∼52및 제 66조항 ; 법전의 가장 큰 관심사인 재산권 보호에 관한 규정은 이 법전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어 함무라비 법전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제 90조∼126조항 ; 상업 가격법, 예금, 채무, 예금 손실 등은 국제 교역이 활발하였던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상업에서 야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규정을 짓고 있다.

•제 127∼193조항 ; 함무라비 법전 중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법규 중에서 결혼(128∼161조항)에 관한 규정이 많이 나타나 있다.

•제 194∼214조항 ; 절도죄와 상해죄가 세밀하게 열거되어 있고 그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가혹한 것으로 유명한데 복수법(復讐法)(210∼214)에 보면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한 자는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한다.’ 혹은 다른 사람의 딸을 때려 유산 케 하면 자기 딸을 사형시킨다는 조항이 있다.

이처럼 철저한 응보주의(應報主義)는 계급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가해자는 자유인이고 피해자는 힘없는 평민인 경우에는 동태보복(動胎報復,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 : 눈에는 눈, 이에 는 이)의 원천보상이 아닌 금전 보상을 하도록 하여 평민의 신체 상해는 돈으로 환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발문(跋文)에는 다시 한 번 서문의 목적이 강조되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과부와 고아를 정의로 다스리기 위해서, 나는 나의 비문에 이전의 말들을 기록했다라고 적어놓고 있다.

비석의 모양은 원추형이며 높이는 2.25m, 둘레 1.8m, 상부 주위는 1.65m, 하부의 원주는 1.9m인 돌기둥이다.

비석의 발견은 1901년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Jacques De morgan이 이란 남서부 페르시아灣의 연안(沿岸)인 수사(Susa) 지역에서 옛날 엘람 왕국의 유적지를 발굴하던 중 뜻하지 않게 세 토막으로 끊어져 있던 현무암 돌기둥을 발견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이곳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00㎞나 떨어져 있다.

수사는 고대 엘람 왕국의 수도였는데, 엘람 왕국은 BC 12세기경 바빌론(Babylon)을 정복한 적이 있기에 아마 그때 전리품으로 가져와서 200마일 동쪽에 있는 수사로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이 법전은 12개의 석판에 당시 바빌론 시민들이 사용하던 쐐기문자인 아카드(Akkad)語로 쓰였는데 한 개의 비석 외에는 아직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바빌론 제국의 식자율(識字率)이 매우 높았으므로 모든 시민들이 법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함무라비 법전으로 봤을 때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 7백 년 전 아득히 먼 고대에 이런 고도화된 문명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고 또 이 법전은 처음으로 법률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포되고, 법전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법률조항이 많고 까다롭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문제도 많고 범죄 유형도 많았기에 그것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도 커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회를 외치지만 약 4천 년 전인 이때도 평등하고 선인(善人)들의 세계가 아니고 계급 차가 심하고 악인(惡人)들이 많이 사는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 129조에는 간음죄(姦淫罪)가 있고, 131∼132조에는 의처증(疑妻症이 나오며, 154∼157조에는 불륜관계(不倫關係)의 처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라마단 기간 중에는 공무원들이 한 시간 일찍 퇴근(오후 2시 30분)하기 때문에 도로가 상당히 복잡한데 금주 금요일에는 라마단 기간이 끝나고 토요일은 휴무라고 한다.

남자는 음력으로 만 15세, 여자는 9세가 되면 금식(禁食)에 참여해야 한다.

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야즈드로 왔다.

 

 10/10

◎ 야즈드(Yazd)

이란 중부 야즈드 주의 州都로서 이스파한 남동쪽 260㎞ 지점의 고원지대에 있으며 카비르 사막 부근이므로 낮과 밤의 기온 차가 많고 산악기후로 매우 건조하고 강풍(强風)에 날린 모래 때문에 피해가 큰 지역이다.

대부분이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아시아와 인도로 가는 중심지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많은 지하수 터널로도 유명하다.

7세기에 아랍이 이란을 정복한 후에는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무슬림을 피해서 척박(瘠薄 ;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름)한 이곳으로 이주해 온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1375년에 세워진 회교사원의 첨탑은 이란에서 가장 높으며 이곳은 이란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인구는 50여 만 명)로 도자기를 만드는 흙이 좋아서 세라믹 공장이 많다고 한다.

● 침묵의 탑(Dakhmeh)

조로아스터교의 시체 매장 풍습인 조장(鳥葬)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으로 사람이 죽으면 4일째 되는 날(죽은 자의 영혼은 4일째가 되면 심판을 받으러 저승으로 떠난다 함) 새벽에 이 장소로 옮겨 와 시체를 토막 내어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猛禽類)들이 쪼아 먹도록 하였는데 약 천 년 전인 사산왕조 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은 물 저장고가 있으며 그 위에는 통풍을 위한 통풍구(通風口, Wind Tower)가 있고, 오른쪽은 유족들이 시체를 산 위로 옮긴 후 머무는 장소이다.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조장을 하는 곳은 아주 높고 규모도 큰데 남자의 시체를 두는 곳이라고 하고, 오른쪽 것은 좀 낮은 등성이에 있고 규모도 작으며 여성의 시체를 처리하는 곳이라고 하기에 우리는 오르기 쉬운 오른쪽을 택하였다.

탑에 오르니 내부는 직경 25m 정도의 원형이고, 관리인이 시체를 토막 내는 곳이 돌담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에 넓은 돌들이 깔려 있는 곳에 시체를 두었다가 나중에 뼈만 남으면 중앙에 있는 크고 깊은 구멍에다 넣었으며 뼈가 많이 쌓이면 산(酸. Acid)같은 것을 넣어 뼈를 녹인 후 없앴다고 한다.

식구들은 3일 동안 육식(肉食)을 금하며 집에서는 불을 끈다고 한다.

이 조장의 풍습은 1970년대까지 이어져 왔으나 사막에서도 도시가 점점 커지고 위생상 좋지 않아 팔레비 왕 때 법으로 금지하여 지금은 산밑의 평지에다 조로아스터 교도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일반인들처럼 비석이 평평한 것이 아니고 입석(立石)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하늘의 맹금류도 사라지고 산 위에서는 바람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침묵의 탑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탑 아래로는 넓은 사막과 점점 발전하는 야즈드 시내의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올라올 때의 땀을 씻어주었지만 산을 내려올 때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 조로아스터교 신전(Zoroastrian Cemetery)과 사원(Fire Temple)

인도 조로아스터교의 도움을 받아 1934년 건축되었으며 건물도 인도의 건축 양식을 많이 닮았는데 유리 안쪽에는 AD 470년부터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불을 신성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불에는 하루에 1-2회씩 오래 타는 나무(Apricot`s wood)를 얹어서 불꽃을 유지하고 있으며 재(災)는 밑으로 흘러내리고 연기는 환풍기를 통해 밖으로 나간다


※ 배화교(拜火敎)

조로아스터교, 마즈다교(賢者의 종교라는 뜻), 배화교 등으로 불린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페르시아(BC 6세기경)의 철학자이자 오늘날 예언자로 불리는 창시자(조로아스터, Zoroaster)의 이름을 딴 것이고, 조로아스터는 자라투스트라의 그리스식(式) 발음이다.

마즈다교는 이 종교의 최고 신(神)이자 유일신(唯一神)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의 이름을 딴 것이며, 그들은 스스로를 마즈다야스나(Mazdayasna. 마즈다 예배교)라고 부르고 있다.

배화교는 불을 숭배하고 신성시 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이 종교는 젠드 아베스타【Zend(註解書), Avesta(原典)의 뜻이다】를 경전으로 하며(9세기경 쓴 것임)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와 악신(惡神) 아리만(Ahriman)과의 이원론(二元論)으로 일체를 설명하고, 역행(力行)의 노력에 의하여 악신을 극복하고 선신이 승리한다는 믿음을 근간(根幹)으로 하고 있다.

아게메네스 왕조(599∼BC 330) 때 오늘날의 이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파르티아 제국시대(BC 247-AD 226)에 이르러 唯一神 사상이 확립되었으며,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세상은 선과 악이 싸우는 투쟁의 현장이며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이 둘 중 한쪽을 선택하여야 한다.

이 때 인간은 선을 선택하여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선택의 결과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사후(死後) 세계에는 천국과 지옥 외에도 ‘하밍스타간’(Hamingstagan)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천국과 지옥 양쪽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중간상태를 말하며 혼합된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저울질 했을 때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천주교가 인정하고 있는 연옥설(煉獄說)과 유사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연옥에서 용서받은 영혼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하는 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산왕조의 초대 왕이며 열성자인 아르다시스Ⅰ세(재위 AD 224∼241)에 의해 국교로 삼아서 부흥하였고, 또한 사산왕조는 조로아스터 이외의 종교는 박해를 하였으며 이 시기에 경전 아베스타가 집대성(集大成)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각지로 흩어졌는데 가장 신도가 많이 간 곳이 인도의 봄베이(Bombay. 지금의 뭄바이)였다고 하며, 지금도 인도 뭄바이(Mumbai), 이란 야즈드, 파키스탄의 카라치,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약 20여 만 명의 신도들이 믿고 있다.

옳은 생각․옳은 말․옳은 행동이 주요한 요지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미래가 좋아진다고 믿고 있고, 불․물․흙․공기를 경건하게 여기며, 신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불 앞에서 기도문을 암송하는데 약 30분이 소요된다.(무슬림은 5-10분 정도임)

교도들은 7살이 되면 나오조트라는 입문식(入門式)을 하는데 이때 차는 허리띠는 평생을 차고 다녀야 한다.

 물 박물관(Water Museum)

420년 전 대상(隊商)의 집이었던 것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지 5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은 물을 길어다 먹거나 공동우물을 이용하던 시절에 이 집주인이었던 대상(隊商)은 돈이 많아서 개인 물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물 담는 용기로는 1,500여 년 전의 토기로 된 것, 400여 년 전의 알루미늄 용기, 70여 년 전의 용기가 있고, 수맥(水脈)을 찾기 위한 도구와 땅을 파는 연장 그리고 이 나라의 물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으며 지하에는 커다란 물 저장고가 있다.

 자메 카비르 모스크(Joame Kabir Mosque)

자메 모스크는 보통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Friday Mosque를 말하며 여기 있는 것은 야즈드의 구 시가지에 있는데 정문에는 48m의 첨탑 2개가 높이 솟아 있으며 녹색과 청색의 문양이 화려하다.

출입문은 매우 크며(보통 문의 3∼4배임) 문 위에서 중앙까지는 쇠줄이 걸려있는데(λ모양) 이는 범법자가 쫓기어 여기까지 도망 오면 경찰이 더 이상은 쫓아와서 체포하지를 못하고 범인이 다시 출입문 밖으로 나와야만 체포할 수가 있다고 한다.

내부는 상당히 넓고 왼쪽 건물에 있는 미흐랍【Mihrab, 벽감(壁龕)】도 색깔이 아주 예쁘게 되어 있으며 중앙 광장 밑에는 2,500여 년 전에 만든 물 저장고가 있다.

 

舊시가지를 걸어서 나오는데 흙으로 된 오래 된 집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나무대문에 달려 있는 문고리 중에서 우측 것은 작고 원형으로 된 쇠뭉치로 명쾌한 소리를 내기에 방문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며, 좌측 것은 기다란 쇠뭉치로 둔탁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남성들이 두들긴다고 한다.

안에서 히잡을 벗고 있던 여자 집주인이 둔탁한 소리가 나면 남성 방문자이기 때문에 빨리 히잡을 쓰고 대문을 열어준단다.

이스파한으로 오는 도중에는 멀리 산도 보이지만 주변은 완전히 사막이라 나무와 풀은 거의 없고 메마르고 검붉은 흙더미와 바위뿐이지만 우리 일행은 400여 년 전에 대상들의 숙소였던 곳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에 들러 차를 한잔 마시면서 다리를 뻗고 옛날 Caravan의 기분을 내어보기도 했는데 그때도 지금 내 옆의 아내처럼 현모양처(賢母良妻)도 따라 다녔는지 모르겠다.

 

 ▲ 10/11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와 함께 자-얀도 강의 씨오 쎄 폴(Si-o Se Pol) 다리(33개의 아치로 됨) 주위를 1시간가량 산책을 하는데 히잡을 쓰고 조깅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서 그녀들이 저렇게 뛰는 데는 히잡이 얼마나 불편하고 덥겠는가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으며 한편으로는 종교에 의한 제약 때문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스파한(Isfahan)

Esfahan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옛 이름은 아스파다나(Aspadana)이며, 테헤란 남쪽 405㎞ 지점에 위치하고, 자그로스(zagros) 산맥(山脈)의 동쪽 해발고도 1,585m의 고지에 있는 인구 170여 만 명의 도시로 기후는 온화하며, 시 외곽으로 흐르는 자-얀도 江(약 300㎞)의 비옥한 충적토(沖積土 ; 흙이나 모래가 물에 흘러내려 쌓인 충적층의 흙) 위에 오랫동안 번영한 도시로 거리에 가로수가 많은 점이 다른 지방보다 특이하다.

이스파한은 아게메네스 왕조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파르티아(Parthia) 왕조(BC 3세기-AD 226)부터 샤산왕조 때까지 약 900년 이상 페르시아의 수도였지만 특히 셀주크 왕조의 압바스Ⅰ세(재위 1587-1629) 때인 1589년에는 이곳이 다시 페르시아의 수도가 되어 그 유명한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세계 최고인 페르시아 문화의 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가 다시 사파비 왕조 때 번영을 하였는데 그때의 건축물들로는 이맘 광장, 이맘 모스크, 세이크 루트풀라 모스크, 체헬 소툰 궁, 미나렛 존반 등 400여 년이 넘은 건물들이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체헬 소툰(Chehel Sotun) 궁전

압바스Ⅰ세 때인 1608년 궁전을 짓기 시작하여 약 40년 동안 건축을 하여 압바스Ⅱ세 때인 1647년 완공이 되었지만 1706년 화재로 전소(全燒)되어 다시 지어져 처음보다 많은 구조물이 가감(加減)되었다고 하는데 화려한 색깔과 벽화는 여전히 생동감을 잃지 않고 있다.

이 페르시아式 궁전의 이름은 베란다에 있는 기둥의 수에서 유래했는데 원래의 기둥은 20개이지만 출입문부터 건물까지의 사이에 있는 깨끗하고 맑은 연못의 물에 비친 기둥 20개까지 합쳐서 체헬(40) 소툰(기둥) 궁전이라 불렀다.

40이라는 숫자는 이 나라에서는 많으면서도 완전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마 40이란 숫자를 택했나보다.

왕의 연회나 영빈관으로 사용된 테라스에는 작은 연못에 분수가 있는데 네 개의 기둥 밑 기단(基壇)에는 왕실의 힘과 용기를 상징하는 동물인 사자가 떠받치고 있고, 테라스 바깥쪽 기둥 10개는 8 면이며 안쪽 기둥 10개는 16면으로 되어 있고, 각 기둥에는 거울이 모자이크 형식으로 달려 있었다니 당시의 화려함을 알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사파비 왕조 때 7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침입이 있었을 때 그들이 다 떼어갔다고 한다.

기둥 위 지붕 밑의 벽은 나무를 퍼즐 모양으로 짜서 만들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러서 부식(腐蝕)이 되어 30년 전에는 이태리 기술자들이 나무 기둥 속에 철근을 넣어 수리를 하여 건물을 지탱할 수 있게 하였다.

테라스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 테라스는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장식이 되어 있는데 宮 내부에 있는 프레스코화(畵)는 많이 손상되어 있고 사파비 시대의 의복과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다.

더 들어가면 벽화 6폭이 세필(細筆)로 그려져 있는데 3폭은 1544년 인도지역의 잔잔 왕을 접견하는 장면과 1646년 오스만 왕의 사절 영접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왕이 원조를 청하러 왔을 때 베푼 연회장면이고, 다른 3편은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Ⅰ세가 1500년대 초에 오스만제국과 두 차례, 인도와 한 차례 싸우는 장면이고 옆으로 나오니 불을 모시는 방도 있다.

● 이맘 광장(Meidam Emam)

사파비 왕조의 압바스Ⅰ세가 1599년부터 건설한 이스파한의 중심광장으로 길이가 동서로는 160m, 남북으로는 510m로 중국의 천안문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으로 샤(Shah) 광장이라고도 불렸으며 각종 행사나 퍼레이드 또는 페르시아에서 비롯한 폴로(Polo) 경기를 위해서 만들어졌다.

사면이 2층으로 된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고 주위에는 사파비 왕조의 뛰어난 이슬람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회, 문화적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서쪽은 알리카푸 궁전, 맞은편인 동쪽에는 압바스Ⅰ세 및 왕족들이 사용했던 쉐이크 루트풀라 모스크, 북쪽에는 많은 수공예품 상점과 바자르(Bazaar)가 있으며 이 일대 전체가 197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폴로 경기는 기마병 육성을 위해서 시행되었다.

 알리 카푸 궁전(Ali Ghapu Palace)

알리는 월등하다, 카푸는 이라는 뜻으로 큰 문을 가진 궁전인데 압바스Ⅰ세 때인 1602년에 시작하여 50여 년에 걸쳐 건축되어(30년간은 궁을 만들고, 20년간은 기타 건물을 만듦) 압바스Ⅱ세 때 완성되었는데 건물 높이는 38m이며 방은 52개가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사방 벽 모서리에는 작은 소리로 말해도 맞은편 모서리에서 들리도록 되어 있으며 돔 형태의 벽에는 석회 위에 카페트 문양을 그려 놓았고, 궁전 계단 벽면에는 천국을 묘사한 그림이 있으며 2층에는 호화롭게 장식된 거실이 있다.

3층은 베란다와 체헬 소툰처럼 동(銅)으로 만든 작은 분수 연못이 있으며 천장은 짜서 맞춘 퍼즐 형식이고, 나무 기둥에는 거울이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으며 나무 기둥의 지탱을 위해 나무속에다 철근을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왕이 군대의 사열이나 폴로 경기를 구경했다고 하는데 폴로 경기를 할 때의 골(Goal)대 구실을 한 돌기둥이 양쪽에 아직 남아 있다.

4층과 5층은 半 층씩으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보면 이 궁전은 5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6층인데, 4층은 공사 중이었고 5층은 벽돌로 막아놓아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6층은 제일 아름다운 방으로 벽에 병, 악기, 그릇, 항아리 모양으로 된 니치(Niche ; 벽감(壁龕)이라고도 한다)가 있는데 악사(樂士)가 양 옆에 앉아서 연주하면 공명(共鳴 ; 어떤 진동체가 울리면 같은 진동수를 가진 다른 진동체가 따라 울리는 현상)으로 인해 소리가 잘 조화되게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다운 모양의 도자기를 진열해 놓는 치니차네(도자기의 방)도 있다.

옛날에 외국 사람들이 쓴 글이나 그림을 참조해서 복원사업을 팔레비 정권 때 진행하였으나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인해 중단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벽화에는 중국풍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궁전 서쪽으로는 체헬 소툰 궁전으로 통한다.

 쉐이크 루트풀라 사원(She-ie-kh Lutfullah Mosque)

압바스Ⅰ세의 개인 예배 장소인 이곳은 1602년부터 1619년까지 세 이키 바하이(She iky Bahay)가 총지휘를 하여 건설하였으며 황금색 둥근 지붕을 하고 있다. 당시 압바스Ⅰ세가 세이크 루트풀라(그의 사촌이며 레바논의 이슬람 종교학자임)를 초청해 종교학교를 열게 하는 등 그를 너무 좋아하여 이 모스크의 이름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왕실 전용 예배 장소이므로 미나렛과 정원 그리고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맞은편 알리 카푸 궁전과는 지하로 연결된 통로가 있어서 왕비들이 쉽게 모스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란 혁면 전에는 낙세 자한(Naghshe Jahan : 세상의 궁전)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이며 모스크 돔은 높이가 38m이다.

들어가는 문과 메카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이맘 모스크와 같음) 입구에 들어서면 서서히 방향이 바뀌어 지며 크고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하나의 모스크가 나타나는데 바로 앞에는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랍이 있다.

돔은 이중 돔이지만 중간에 간격이 없으며 빛의 반사에 의해서 천장은 금빛과 은빛으로 비치고 돔에는 하등의 결점이 없는 등 같은 시대에서는 기술이 가장 뛰어난 모스크이다.

아름다운 상감무늬 장식을 한 벽에는 벽장식을 만든 사람이 자기 이름을 쓰고 "불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써 놓은 것이 남아있다.

겨울철에 사용하는 지하공간은 따로 있다.

 이맘 모스크(Emam Mosque)

압바스Ⅰ세 때인 1612∼1630년에 완성된 것으로 1,800만 개의 벽돌과 47만 개의 타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폴로 골대 뒤에 모스크로 들어가는 출입구 문이 있는데 이것을 완성하는데 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문을 들어서면 돔이 나오는데 이것은 꼭대기의 장식물까지 합치면 높이가 52m(돔까지는 47m이다)이며 이 돔은 이중 돔으로 되어 있는데 중간에 공간이 12m나 되고, 두 개의 미나렛 또한 높이가 47m이다.

돔을 지나면 바로 계단 옆에 납작한 돌이 있는데 이것은 시계 구실을 하여 정오가 되면 그림자가 없어져 일반인들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중앙 돔이 있는 곳에는 돔 밑의 한 중앙에 사방 60㎝되는 평평한 돌이 놓여 있는데 이맘이 설교를 할 때 이 돌 위에 있는 사람이 그 소리를 반복하면 소리가 크게 울려 밖에 있는 참배 객(客)들도 들을 수 있게 하였단다.

안에는 많은 마드라사(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는 학교)가 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 모스크는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후에 건축된 다른 모스크의 건축에 영향을 끼쳤고, 돔 꼭대기 가운데는 단색 타일로 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채색된 타일로 코란 문구를 새겨 놓았다.

모스크의 돔이나 벽체(壁體)가 주로 푸른색 타일로 되어 있어서 불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도 불린다.

● 미나르 존반(Manar Junban, Shaking Minaret, 흔들리는 탑)

14세기에 만들어진 Amoo Abdollah Garladani의 묘(墓)이며 그 위에 두 개의 미나렛이 있는데 한 사람이 올라가 미나렛의 안쪽에서 벽을 흔들면 그 미나렛은 물론 반대편에 있는 미나렛도 같이 흔들거린다.

흔들림을 쉽게 알게 하기 위해 앞 정원에서 보면 미나렛의 상단 양쪽 끝에다 종을 두 개씩 달아 놓았다.

2년 전까지는 관광객이 올라갈 수 있었으나 요사이는 건물 보호 차원에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시범을 보이는데 건물 앞에는 많은 관광객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 10/12

오늘도 어제와 같이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자-얀도 강을 따라서 산책을 하는데 오늘이 금요일(휴일)이라 어제보다 많은 사람이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여학생 두 명을 만나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녀는 여러 책을 통해서 한국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으며 한국말도 몇 문장을 말하기에 너무 기특하여 갖고 있던 사탕을 기념으로 주니 아주 좋아했다.

다리 위에서는 몇 사람이 길고 굵은 낚시 목줄에다 거물을 달고 밑 부분에는 쇠를 달아서 강물에 던져놓고 떡밥을 던져주니 우리나라의 잉어와 비슷한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옛날에 10년 동안이나 민물낚시를 하던 때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떡밥을 손수 만들어서 사용하다보니 아내가 보리를 삶고, 콩을 볶고, 깻묵을 부수면서 고생을 했기에 그때 이야기를 하니 아내도 웃으면서 “당신은 어떻게 물속에 있는 고기의 성질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어서 우리는 서로 처다 보고 한참동안이나 웃으면서 오랜만에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자메 모스크(Joame Mosque)

사파비 왕조의 제 5대 왕인 샤-압바스Ⅰ세(재위 1587∼1629)가 1598년 이스파한으로 천도를 하기 전까지는 이 모스크가 있던 곳이 중심지여서 금요일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에 큰 모스크가 세워졌다.(이란은 AD 648년에 이슬람을 받아들임)

역시 나무로 된 출입문에는 쇠줄이  모양으로 달려있다.

8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건축물이 이 모스크 안에 있어서(면적은 22,000㎡) 이란의 건축양식을 알려고 하면 여기를 보아야만 한다는 말이 있으며 8세기 때의 유적은 다른 유적의 발굴이 끝나면 함께 전시하기 위해서 이태리 고고학자들이 땅속에다가 묻었다고 하며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다.

10세기 때의 돔은 타일이 벽돌로 되어 있으며 그림은 석회조각 위에 그려놓은 것이 남아 있고, 사산왕조 때 불을 모시던 사원이라는 증거가 되는 곳이 남아있다.

광장 중앙에는 가상의 메카를 만들어 메카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예행연습(豫行演習)하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국가에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또한 이곳에는 높은 미나렛에 올라가기 힘드니까 돔 바로 위에 조그마한 정자 같은 것【골다세(Gol Daste)】을 만들어 간편하게 아잔(Azan)을 했다는데 그것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고손자인 올제이투 칸의 명에 의해 오스타드 헤미달이 만든 미흐랍이 있으며 그 뒤에는 15세기 때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710년 음력 헤즈라(AD 1428)라고 적혀 있다.

15세기 티무르 시대에 만들어진 텐트 모양의 겨울 집(Winter House)이 지면보다 약간 낮은 곳에 길게 있는데 천장도 낮게 되어 있기 때문에 기온이 실외보다 4-5℃가 높다고 하며 특히 빛을 통과하는 대리석(Marble, 이름은 Alabaster)이 있어서 실내를 어느 정도 밝게 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계단 옆의 돌이 시간을 나타내는 해시계, 벽에 울리는 공명 현상, 이맘의 설교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 서 있던 자리의 돌이 소리를 확대해 주는 것, 빛을 통과하는 돌 등 여러 가지 신기한 것을 보았다.

● 타졸몰크 돔(Tajolmolk Dome)

12세기 때 벽돌 모양이 다르게 하여 만든 돔으로(이 때는 타일이 귀한 시대였다.) 밑은 4각형의 기둥에다 그 위에는 8각형, 또 그 위에 16각형의 기둥을 만들어 돔을 얹은 모습이 특이했으며 돔 내부의 모양도 너무 아름다워 이곳에서 35년 동안 살면서 이스파한의 모스크를 연구한 미국인 고고학자인 POP 교수는 여기를 가리켜 모스크의 정수(精髓)인 보물이라고까지 격찬한 돔이다.

그는 여기서 죽었고, 5년 뒤에 죽은 아내와 함께 그의 유언에 의해 카주 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묻혀있다고 하기에 직접 가서 보았다.

이 모스크에는 4개의 에이반(Eivan : 모가르나스와 테라스가 함께 있는 곳을 가리킴)이 있으며 상당히 유명한 모스크이다.

※ 모가르나스(Mogharnas)

돔 안에 벌집 모양으로 된 홈이 많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마호메트가 카브리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동굴 모양을 본뜬 것이라 한다.

 

 씨오 쎄 폴(Si-o Se Pol) 다리

자-얀도 강에 있는 다리로 아내와 함께 어제와 오늘 아침에 조깅한 다리인데 1602년에 만들었으며 길이는 299m, 폭은 14m, 33개의 아치가 다리를 받치고 있으며 그 아치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고, 도로 옆에 있는 人道의 아치는 오늘 아침 아내와 함께 헤아려보니 99개였다.

다리 이름은 교각이 33개라 붙여진 이름이란다.

 카주(Khaju) 다리

1655년 건설된 다리로 길이가 133m 되는 댐 형식의 이 다리는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은 통로이고, 2층에는 왕이 앉아 있던 곳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왕은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다리 양 끝에는 사자 석상이 있는데 이 석상은 장사(壯士)들의 무덤에 있던 석상을 여기에 가져다놓은 것이며 입 속에는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사자의 등에 처녀가 올라타면 시집을 간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오래된 다리는 보존을 위해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이스파한에는 자-얀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11개가 있는데 그 중 오래된 다리가 5개나 된다고 한다.

 반크(Vank)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이며 1602년 건축을 하여 1655년 보수를 하였는데 페르시아 사람들이 이슬람식으로 건축을 하여 사원처럼 돔이 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다.

이 나라에는 아르메니아人이 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그 중 이스파한에 약 7,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정교회는 13개가 있단다.

1915년 터키인에 의해 아르메니아인 150여 만 명이 살해당한 추모비가 있으며 성당 안벽의 밑 부분은 이슬람 식 타일이 있고, 그 위 부분은 신․구약의 내용을 성화(聖畵)로 그려놓았으며 특히 그레고리Ⅰ세의 일생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최후의 만찬과 천국과 지옥의 풍경 등이 그려져 있으며 위에는 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옆 건물의 박물관에는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물건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1974년 테헤란에서 발견된 18-20세의 여자 머리카락에 머리카락보다 20배나 가는 글씨(0.1㎜)로 7㎜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현미경으로 보면 그 첫 문장은 ‘5세기에 Mesrop Mashtots에 의해 아르메니아 알파벳이 만들어졌다라고 적혀 있다.

(책 제 2권 316쪽 참조)

또 이 교회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0.2gr) 책에다 주기도문(主祈禱文)을 1개국에 2쪽씩 7개 나라(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등등)의 국어로 14쪽에 적은 것이 있는데 원본은 독일에 있고 여기 있는 것은 복사본이지만 관람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 그레고리(Gregory)Ⅰ세

라틴(서방)교회의 뛰어난 4명의 박사(어거스틴, 암브로스, 제롬, 그레고리) 중의 한 명으로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다 팔아서 수도원에 바치고 또 수도원을 6개나 지었으며, 나머지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 뒤 그는 평범한 수도사(修道士)가 되었는데 578년에는 교황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집사(執事)로 임명하였다.(당시 로마에는 7명의 집사가 있었다)

590년에는 전임 교황이 죽자 시민들이 강제로 그를 교황으로 뽑았으며 그는 피라미드형으로 체계를 세워 교황청의 재산관리를 철저히 하여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의 1/4은 성직자에게, 1/4은 교회 운영에, 1/4은 가난한 자들에게, 1/4은 긴급한 구제(救濟)에 사용하도록 해서 교회 예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하시트 베헤시트(Hasht Behesht) 궁전

하시드는 ‘8’을, 베헤시트는 ‘천국’을 뜻하는 말이니 8개 천국의 궁전’(Palace of eight paradise)이라는 뜻이 된다.

사파비 왕조의 8번째 왕인 소레이만(Soleiman. 재위 1666-1694)의 명에 의해 넓은 나이팅겔(Nightingale) 정원에 땅보다 1.5m 높이로 1699년에 지어져 여름에도 시원하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가 14m이며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사파비 왕조 때 8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지어진 궁전이기에 이곳은 모든 것이 8개로 구분된다.

예) 실내는 8각형의 모습, 입구의 작은 연못도 8각형이다.

2층은 궁전이며 물탱크가 있어서 1층으로 물이 흘러내리도록 하면서 층이 나게 하여 파노라마(panorama)식으로 폭포가 흐르도록 해 놓았으며, 벽에는 사파비 왕조 때의 벽화에다 가잘(Ghajar) 왕조 때 흰색을 입히고 다시 벽화를 그린 흔적과 군데군데 벗겨진 프레스코 화가 보인다.

이 시대에 이스파한을 여행한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왕의 하렘(Harem ; 후궁)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궁전 앞의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소레이만 왕이 얼마나 여자를 밝혔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사파비 왕조는 9대 왕인 술탄 호세인Ⅰ세(Sultan Hossein. 재위 1694-1722) 때 칸다하르(Qandahar)를 기반으로 일어난 아프간 족의 침공을 받아 1722년에 점령을 당하고 7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7년 뒤 타흐마스프Ⅱ세(Tahmasp. 재위 1722-1732) 때 아스파한을 회복하였으나 1732년 다시 아프간족의 공격을 받았으며, 압바스Ⅲ세(Abbas. 재위 1732-1736) 때인 1736년에 사파비왕조가 멸망된다.

 압바스 호텔(Abbash Hotel)

400여 년 전의 대상의 숙소를 호텔로 개조했는데 건물도 크고 넓으며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고, 여러 가지 꽃과 과일이 달려 있는 등 분위기가 살아 있는 곳인데 현지 안내원의 도움으로 일정에도 없는 이곳을 구경하고 차도 한잔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객실이 200개이며 하루 숙박료가 Standard는 US$141弗이고, Safavid Suit는 US$417弗로 이 나라에서는 꽤 비싼 편이다.

 

저녁 7시 10분에는 Iran 329를 타고 45분을 날아서 쉬라즈(Shiraz)에 왔다.

오늘로써 이 나라는 라마단이 끝난다고 도로가 만원을 이루고 있는데, 하기야 한 달 내도록 해 뜨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생활을 하였으니 오늘 일몰(日沒)로써 해방이 되는 날이 된다고 하겠다.

내일은 공휴일이라고 한다.



▲ 11/13

어제로 라마단 금식일(禁食日)이 끝나고 오늘은 경축일이자 공휴일이라 그런지 아내와 새벽 산책을 하는데 도로에는 차량이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여 어제와는 전혀 다른 1느낌을 주고 있다.

 쉬라즈(Shiraz)

해발 1,486m에 세워진 도시로 잔드 왕조의 수도였던 곳인데 당시의 건축물이 아직 남아 있으며 쉬라즈 라는 이름은 AD 2세기경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테헤란에서 남서쪽으로 900㎞ 떨어진 곳인데 비행기로는 1시간 15분이 소요된다.

다른 지방보다 고도와 위도가 낮아 더우며 연간 강우량은 1,300㎜이고, 팔스 주(인구 약 400만 명)의 주도로 인구는 약 80만 명이 살고 있다.

● 코란 게이트(Koran Gate)

쉬라즈에서 팔스 지방의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도중 옛날 길에 출입문이 있는데 그 위에 사방 1m의 크기에 무게가 90㎏이나 되는 코란이 얹혀 있었다.

그 문으로 많은 차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그 차들의 무사고를 위해서였는데 약 30년 전에 그 옆으로 새로운 길이 뚫려서 지금은 그 코란을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일반 집에서도 먼 길을 여행 떠날 때는 코란에다 입을 맞추고 떠난다고 한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쉬라즈에서 북동쪽으로 70㎞정도 떨어져 있으며,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es dynasty. 559-330 BC)의 수도였던 곳으로 그리스어로는 ‘페르시아의 도시를 의미하는데 페르시아人들은 파르사'(Parsa)라고 불렀다.

파르사는 파르스(Pars 또는 Fars)에서 유래하여 ‘파르스 지방’ 또는 파르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은 파르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파르사는 제국의 이름인 동시에 수도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남북 460m, 동서 280m의 넓이에 높이는 12m로 된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는 궁(宮)의 지붕에는 레바논에서 가져온 백양목(白楊木)으로 되어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 침입 시(BC 330년) 전부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곳은 다리우스Ⅰ세 및 그의 후계자들의 궁전으로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 BC 6세기경 중근동(中近東)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유적이며, 페르세폴리스 입구로 가려면 양쪽에 111개의 계단이 있는데 그것은 한 덩어리의 돌로 만들었다고 하며 지금은 그 계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위에다 판자로 다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다리우스(Darius)Ⅰ세(재위 521∼BC 486)가 즉위하여 내란이 진정된 후 파사르가다에(Pasargadae), 수사(Susa)에 이어 건설을 시작하여(BC 518) 그의 손자인 알타 크세르크세스(Arta Xerxes) 왕 때 거의 완성(BC 460)된 수도(首都)로써 산을 배후에 두고 비스듬한 면을 이용하여 석조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궁전, 후궁, 보고(寶庫), 알현전(謁見殿), 백주궁전(百柱宮殿) 등이 있는 장대한 궁궐로 약 2,500년 전에 번성했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제국의 총 연장이 2884㎞여서 왕이 횡단(橫斷)을 하기 위해 왕의 도로(Royal road)를 건설한 뒤 페르세폴리스를 만들었다.

이곳 외에도 '애크바타나(Ecbatana)'라는 곳도 수도의 역할을 하여 총 4개의 수도가 있었다.

1971년 이란 정부는 이란(페르시아) 왕조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이곳에서 거행했고 1979년 이 유적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테라스 계단(Terrace stairway)

지대의 북서쪽에는 양쪽 대칭으로 한 쌍의 웅장한 2단 계단이 위쪽의 테라스에 연결되어 있는데 계단은 가로 폭이 6.9m, 높이 10㎝, 그리고 깊이 31㎝의 계단 111개로 이루어져 있다.

한 덩어리의 큰 돌을 쪼아 4∼6단 정도의 계단으로 만든 것이며 계단 난간은 불의 신전을 조각하여 형상화한 벽감(壁龕, Niche)으로 장식되어 있고, 벽 쪽에는 다리우스 왕에게 선물을 바치러 온 28개국 사신(使臣)들의 조각이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이곳은 제국의 수도 중에서 신년 의식이 거행된 수도이다)

이 두 계단은 각각 다른 무리의 왕실 손님을 위해 사용된 것이 분명한데 한쪽은 공물(供物)을 바치러 온 속국(屬國)의 사절이 올랐던 계단이고 다른 한쪽은 제국의 귀족들이 사용했던 계단이다.

일반적으로 계단 한 단의 높이가 짧은 것은 손님들이 말을 타고 편하게 단(檀) 위에 오르기 위한 것이라 여겨졌으나 새로운 학설에는 고관들이 멋진 성장(盛裝)을 입고 장엄한 태도로 계단을 오르는 것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萬國의 門(Gate of all lands)

유적 입구에는 크세르크세스(Xerxes. 재위 486∼BC 465) 에 의해 만들어진 궁전의 기둥에 “모든 땅의 입구(Gate of All Lands)"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며, 매년 초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이 나라의 속국은 28개 나라였다) 사신들이 통과하는 문(일명 크세르크세스의 문이라고도 한다)에는 수염 난 남자의 모습에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보호 황소(guardian bulls. 힘을 상징하는 아시리아 문화형식) 한 쌍이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목에는 목걸이가 있는데 중앙에는 연꽃이 12잎(12달을 상징)으로 되어 있다.

문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설형문자인 엘람(Elamite), 바빌로니아, 파르사의 고대 말 등 세 나라의 말로 크세르크세스Ⅰ세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조로아스터교의 主神이며 하늘과 땅과 세상을 창조한 신)가 나를 왕으로 만들었고 그의 은총에 의해 모든 땅의 입구를 건축한다.라는 것이다.

황소의 날개가 3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옳은 생각․옳은 말․옳은 행동을 뜻하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상징한다.

이 문은 다리우스Ⅰ세 때인 BC 486년에 짓기 시작하여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 때인 BC 466년에 완성되었다.

 백주궁전(百柱宮殿, The hundred column hall)

50여 년 간 건축을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께 멸망당한 미완성의 궁전을 지나면 100주 궁전이 나오는데 이곳은 궁전의 기둥이 100개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옆벽에는 페르시아 군인과 마더 군인이 번갈아 가면서 조각된 병정 100명의 형상이 있으며 다리우스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의 조각상도 있다.

 트리필론(Tripylon, Council Hall)

크세르크세스 때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알타 크세르크세스 때 완성된 고급관리들의 회의장소로 넓은 페르세폴리스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에 만 명이나 되는 불멸의 군대가 여기 있었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한 달을 상징하는 31계단에는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에서 온 사신들이 선물을 가지고 오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마디시(Madish) 궁

크세르크세스 왕이 기거하던 궁으로 이 폴리스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주춧돌은 원래 있던 자연석 바위를 깎아서 사용하였고 기둥은 나무여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 시 불타버려 흔적만 남아 있다.

이 부근 주춧돌이 있는 지역인데 192년간의 짧은 생애로 마감한 페르세폴리스는 2261년 동안 모래와 먼지에 의해 땅 속에 묻혀 망각 속에 있던 것을 1931년 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 고고학 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했다고 하며 불을 모시던 자리도 있다.

건너편 산에는 알타 크세르크세스Ⅱ(재위 404∼BC 359)세와 Ⅲ세(재위 359∼BC 338)의 무덤이 암벽에 있으며 다리우스Ⅲ세(재위 336∼BC 330)는 알렉산드로스 대군과 전투 중에 죽었기 때문에 묘가 없다고 한다.

아게메네스 왕조의 9대 왕 중에서 여기에 2묘, 낙쉐 로스탐에 4묘, 나머지 2 묘는 파사르 가데(Pasar Gadeh)에 키루스(Cyrus)Ⅱ세(재위 559∼BC 529)와 캄비세스(Combyses)Ⅱ세(재위 529∼BC 522)의 묘가 있다.

키루스Ⅱ세는 BC 559년에 안샨(Anshan) 왕이 되었지만 BC 550년에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그의 도읍지인 에크바타나(Ecbatana)로 수도를 옮겨서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아게메네스 왕조의 시작을 BC 550년으로 본다.


 보물 창고

이 궁전의 제일 안쪽 깊숙이 아주 넓은 곳으로 되어 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침입 시 다 불타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낯선 사람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미로(迷路)로 되어 있다.

현지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이곳을 침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보물 창고에서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의 가축에 보물을 싣고 갔다니 페르시아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때 약탈한 보물 덕분으로 그리스에서는 10년 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기록보존소에서 출토된 점토판(粘土板)에 있는 문서 약 20,000장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 및 경제가 밝혀졌다고 한다.

 박물관

원래는 크세르크세스 하렘의 궁이었는데 1930년에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폴리스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해 놓았는데 유물이 생각보다 적으며 물론 점토판도 전시되어 있다.

 아파다나(Apadana) 궁전

사절단을 접견하던 궁으로 일명 알현전(謁見殿)이라고 하는데 72개의 대원주로 받쳐져 있었으며(지금은 11개가 남아 있다) 높이가 18m, 20m로 서로 다른 것은 지붕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두(柱頭)는 황소와 뿔이 난 사자 머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궁에 오르는 측면 계단에는 28개국에서 조공(朝貢)을 하는 부조(浮彫)가 있는 등 당시의 동양 건축 미술을 집대성(集大成)해 놓은 곳이다.

아파다나의 동쪽 계단에 있는 부조에는 3가지의 조각상들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속해 있던 국가들로부터 온 23명의 대표단으로 노르즈(Nawrooz) 행사에서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황제에게 제공하는 조각인데 각국 대표는 메디안이나 페르시아 안내인에 의해서 황제가 있는 자리로 안내되었다.

아시리아인, 이집트인, 바벨로니안들의 경우와는 다르게 이들 대표단들은 황제 앞에서 노예처럼 강제로 부복(俯伏)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초대된 손님으로 왔기에 온화하고 행복했던 것 같고 이 대표단들은 그들의 복장과 선물에 의해 구분된다.

° 가장 위쪽 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 메디아 대표단은 9명으로 말, 옷, 완장과 용기들을 가지고 왔고

2) 엘람 대표단은 4명으로 활, 단도, 암사자와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왔고

3) 아리안 대표단도 4명으로 용기, 쌍봉낙타(雙峰駱駝)와 동물 가죽들을 가지고 왔고 4)Arachosian(아프간) 대표단도 4명으로 아리안과 비슷한 선물을 가져왔고 5) 박트리안 대표들도 4명으로 사발과 쌍봉낙타를 가지고 왔으며 6) 아사가리안 대 단도 5명으로 말 한 마리와 메디안 옷들을 가지고 왔다.

° 중간 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 아르메니안 대표단 3명 2) 바빌론 대표단 6명 3)아시리안 대표단 8명

4) Pointed-hat Scythian 대표단 5명이 각종 선물을 가지고 왔다.

° 아래쪽 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 리디안 대표단 6명 2) 카파도키아 대표단 5명 3) 이오니안 대표단 8명,

4)파르티안 대표단 4명 5) 신드의 인디안 대표단 5명도 여러 가지 선물을 가지 고 왔다.

° 계단의 비슷한 정면 위에서 아래로

1) 유럽의 Scythian 대표단 4명 2)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아랍 대표단 3명

3) Seistan의 zarangian 대표단 4명, 4) 리비안 대표단 3명 5) 에티오피아 대 표단 3명은 작은 기린, 상아(象牙)와 뚜껑 있는 용기를 가지고 왔다.

● Cistem

이 탱크 같은 돌덩어리는 길이 5.68m, 너비 4.85m, 높이가 2m 가까이 되는데 이는 페르세폴리스를 만든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으나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이 돌은 깊이가 1.2m에서 0.46m로 불규칙하고 거칠게 조각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종교의식이나 식수용으로 만든 물받이로 생각하고 있으나 갈라진 금(fracture)을 보면 물받이는 아닌 것 같다.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의 코너에 있는 큰 기둥들은 이런 형태로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돌덩어리들이 원래는 코너 기둥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조각되다가 갈라진 금들이 생기는 바람에 사용할 수 없게 되어서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왕의 집무실인 다차나에는 옥좌에 앉은 다리우스Ⅰ세가 있고, 그 뒤에는 왕세자인 크세르크세스가 서 있으며 아래로는 신하들이 줄을 맞추어 서 있는데 옥좌의 발끝이 땅에 붙어 있지를 않고 10㎝쯤 공중에 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페르세폴리스를 구경하면서 웅장하고 장대함에 놀랐으며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로움이 눈에 들어오는 듯하였고, 새로운 사실을 많이 깨달아 지식도 한층 깊어지는 기분이었다.

오후에는 페르시아 제국 특유의 암벽 묘에 갔다.

 낙쉐 로스탐(Naqsh-i Rustam)

파르스 주에 있는 아게메네스(Achaemenes) 왕조(550∼330 BC) 및 사산 왕조(AD 226∼651)의 유적으로 페르세폴리스에서 북서쪽으로 6㎞ 지점에 있으며, 후사인 쿠(Husayn Kuh : 후사인 山이라는 뜻)라는 산의 벼랑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으로부터 큰 십자가 모습인 다리우스Ⅱ세(재위 BC 424∼404)의 무덤이 있는데 암벽의 형태는 ╬ 모양의 찰리파(Chalipa ; 조로아스터교의 '자비를 펴다'라는 뜻이 담긴 모양) 형식이다.

바로 옆의 암벽에 다리우스Ⅰ세(재위 521∼486 BC), 다음에 크세르크세스Ⅰ세(재위 486∼466 BC), 좌측에는 알타 크세르크세스 I세(재위 466∼424 BC)의 무덤이 있다.

궁 모양의 기둥이 있는 것은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에서 항상 보았던 궁을 봄으로써 낯설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며 ╬자 형 위에는 28개국 사람들의 형상이 있고 그 위에 다리우스Ⅰ세가 있다.

왼쪽 위와 중간 칸에는 다리우스 대왕의 유서가 설형문자로 적혀 있는데 그 뜻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아는 사람이 없단다.

이 암벽 묘를 하나 만드는데 25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각 왕묘(王墓) 바로 아래 암벽에는 사산 왕조 시대의 초대 왕인 아르다시르Ⅰ세(재위 224∼241)의 왕권 서임도(敍任圖), 사산조 2대 통치자인 샤프르Ⅰ세(재위 241∼272)의 대 로마 전승도(戰勝圖) 등 사산 왕조 여러 왕의 영웅적 정복행위를 기리는 부조(浮彫) 9개가 무덤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다.

* 대 로마 전승도에는 AD 620년경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공격한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us)가 전투 중 페르시아 왕 사푸르(Shapur)에게 포로로 잡혀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페르시아에서 병사(病死)를 한다.

입구의 좌측 앞에는 조로아스터의 카바(Ka`bah of Zoroaster)라고 불리는 12.6m 높이의 석조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Sassanian의 배화교 제단으로 불의 신전이며, 배화교는 사산왕조의 아르다시르Ⅰ세 때 국교로 받아들였다.

바위산 제일 왼쪽에는 약 4,000년 전 엘람(Elam)시대(BC 2700-539)에 제례(祭禮) 장면을 부조한 것을 사산조 시대에 깎아내고 다시 조각한 것을 볼 수 있다.

 마라톤의 유래

다리우스Ⅰ세가 BC 490년경 아테네(Athenae)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과 마라톤 평원에서 싸울 때 그리스가 압도적인 승리를 하자 그리스 병사(兵士) 한 명이 전령(傳令)을 자청하여 마라톤(Marathon)에서 아테네까지 42㎞를 넘는 거리를 쉴 새 없이 달려가 전투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다라는 한마디를 전하고는 숨이 끊어졌는데 이 같은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어 1896년 근대올림픽 제 1회 아테네 대회부터 육상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으나 후일 그 거리를 실측해보니 36.75㎞이었다.

1908년 제 4회 런던 올림픽 대회 때 원저궁전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거리 42.195㎞가 마라톤의 정식 거리로 채택되었다.

마라톤의 기록은 코스마다 조건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세계기록은 공인되지 않으며 ‘세계 최고라는 말이 쓰인다.

 알리 이븐 함제(Ali Ibn Hamzeh)의 묘

함제는 이맘으로 칭송되는 성인이고 그의 묘(墓) 안은 사방이 거울로 되어 있어 들어서면 눈이 부실정도이다.

거울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하여 왕궁에만 사용되다가 가잘 왕조 때는 부유한 집안에서도 사용을 했다고 한다.

앞의 꽤 넓은 마당에는 성인 곁에 묻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평면 비석이 있으며 사람들은 성당 속의 무덤처럼 그냥 밟고 다닌다.

 카림 칸 성(Citadel of Karim Khan)

잔드(Zand) 왕조 시대의 성으로 카림 칸 잔드(재위 1750-1779)가 1758년 이란을 통일하여 본거지로 사용한 성이자 궁전인데 1749년에 건설되었으며 사면에는 망루가 있고 위에서는 대포를 쏠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궁의 좌측이 비스듬하게 기울고 있는 것은 그곳에 목욕탕이 있었는데 거기서 사용한 물로 인해 땅이 침하(沈下)되어 그렇다고 하는데 아직 무너질 단계는 아니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사용하는 집이 구분되어 있으며 1932년 이후 팔레비(Pahlavi) 왕조 때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고, 건물의 계단 사이가 상당히 높은 것은 여인들이 잘 오르내리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가잘 왕조 때의 벽화가 남아 있지만 많이 벗겨지고 손상되어 있다.

이곳은 군사적인 목적과 거주 목적의 두 가지를 다 가졌기 때문에 궁(宮)이라고도 하고 성(城)이라고도 한다.

 

▲ 10/14

어제 밤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북쪽에는 알브르즈 산맥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데 그 산맥의 정상(頂上)은 다마반드(Damaband) 산으로 높이가 5,745m이며, 이곳은 가잘 왕조 이후 180여 년 간 수도로 지속되었지만 시내는 매연(煤煙)이 심하여 알브르즈 산맥의 선(線)이 잘 보이지 않는다.

● 니야바란 왕궁 박물관(Niyavaran Palace Museum)

사바드 지역에 있는 팔레비 왕조 때의 사바드 궁을 가면서 보니 길 양옆의 수로(水路)에는 시간에 맞춰 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 수로 중앙에는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

사바드 궁은 1년 중 겨울을 제외한 9개월을 생활하던 곳인데, 갑자기 대통령이 주관하는 행사가 있다고 하면서 어제부터 4일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하여 우리는 니야바란 지역에 있는 팔레비 왕의 겨울궁전이었던 니야바란 왕궁에 가니 넓이가 110㏊나 되며 5개의 박물관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이란의 문화적, 고고학적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카자르 왕조 때 만든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이슬람 혁명 이후인 1999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는 시간 관계상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사에브콰라니 궁전(Sahebqaranieh Palace)에 갔다.

이 궁전은 유럽 특히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건축되어 로코코 스타일로 나지막한 원주기둥이 늘어서 있는 현관은 매우 이국적이며 이곳의 차 정원은 작은 누각들이 많이 설치되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1층에는 큰 홀과 영화관, 식당, 손님의 방, 응접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사무실, 휴식 공간, 방음(防音)된 안전의 방이 있고 특히 왕이 개인적으로 치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특이했다.

이 왕궁 박물관에는 귀중한 그림과 카펫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받은 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서울路(Se`ul St.)

한국과 이란의 수교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도로이며 길이는 8㎞정도 되고 입구에는 지하상가가 형성되어 있는데 테헤란에서는 여기가 제일 큰 지하상가라고 한다.

좀 떨어진 곳에는 서울 공원이 있는데 입구 오른쪽에는 돌에다 훈민정음을 새겨놓은 것이 눈에 띈다.

 카펫 박물관

1977년에 개관된 카펫 박물관에는 19-20세기의 각종 카펫이 전시되어 있고 제일 오래 된 것은 5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바닥에다 전시를 해 놓았다.

 보석 박물관

보석 박물관에서는 옛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듯 온갖 보석이 전시되어 있는데 보석으로 장식한 그릇, 왕이 외래사절을 접견할 때의 침상만한 의자는 26.733개의 진주로 치장되어 있고, Fath Ali Shah Qazar의 왕관은 7파운드가 넘는 보석, 진주, 에메랄드,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고, 왕비의 관과 목걸이는 10개의 에메랄드와 4개의 큰 진주 그리고 486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것이다.

금 바탕의 보석 지구의(地球儀 ; 지구의 모형)는 세계 각 나라를 각각 다른 색깔의 보석으로 나타내면서 이란 자기 나라의 색은 파란색으로 하였다.

약 200년 전부터 팔레비 왕조 시대까지의 보석이 전시되어 있는데 너무도 화려하고 많아서 세계의 보석이 여기에 다 모인 것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공항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6시 55분 발 이란 항공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8시 25분이면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10시 30분 발 대구행 KTX를 타면 오후 1시쯤이면 집에 도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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