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버리고 도망한 정부가 시민을 부역자로 처벌하다
시민을 버리고 도망한 정부가 시민을 부역자로 처벌하다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2.09.2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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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능력이 없는 정권과 보수세력

성찰 능력이 없는 정권과 보수세력

2015년 6월 멕시코 여행을 갔을 때 멕시코시티 도처에 경찰력이 쫙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멕시코 사회는 경찰과 범죄조직에 의한 대학생 납치살해사건, 마약 카르텔과 부패공무원의 결탁, 교육개혁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등으로 심각한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43명이나 되는 대학생들이 부패한 지역경찰과 범죄조직에 의해 납치, 실종, 살해되었는데도 정부와 검찰은 엄정한 수사를 통해 권력과 범죄집단의 조직적 커넥션을 뿌리 뽑으려 하기보다 형식적인 수사로 사건을 대충 무마하고 넘어가려 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골치 아픈 사건에 개입하기보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 국민의 분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멕시코 국민의 불신과 분노가 폭발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국가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를 차단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심에 쫙 깔려 있던 그 멕시코 경찰은 국민의 정당한 분노와 요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 서울에 진주하는 인민군 T-34 전차.
그걸 보면서 한국 사회가 떠올랐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응이 어찌 그리도 멕시코의 그것을 닮았는지 놀랐다. 2015년 11월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민중총궐기투쟁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혼수상태가 되어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9월 25일 끝내 사망한 백남기 농민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세월호에 대한 대응 태도, 방식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민주시민을 살해한 경찰과 국가권력은 사인을 ‘병사’로 기록한 주치의의 도움을 받아서, 그리고 강제부검을 실시함으로써 본질을 은폐, 조작하려 하고 있다. 누가 이런 경찰을, 정부를, 국가권력을 믿겠는가.

한국인의 정부 불신은 유독 심하다. 정부가 하는 이야기를 거꾸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군부독재 정권 아래 살면서 정보를 독점한 정부, 국가의 거짓선전과 조작된 정보공작에 시달려야 했던 국민들로서는 민간정부가 들어서고 사회가 일정하게 민주화된 다음에도 그런 불신을 쉽게 떨치기 힘들었다. 민주정부라고 해도 정부, 국가기관은 일반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민주정부 아래서는 국가권력의 잘못된 행태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제도,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감추기 어렵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언론의 자유가 상당한 수준에서 보장되었고 시민사회의 감시기능도 거의 풀가동되고 있어서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감추려 해도 금방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문제들까지 보수언론들이 지나치게 부풀려 사회문제로 확대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 대선에서 압승한 것만 믿고 대운하 사업과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마구 밀어붙이다가 국민들의 ‘촛불 벼락’을 맞아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명박 정부는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민간인 사찰’과 세무조사 등으로 정치적 반대세력과 요주의인물을 감시․압박하면서 되치기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는 허울 좋은 대강’과 ‘자원외교’로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고 우량 국가 공기업을 부실덩어리로 만들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BBK라는 대형의혹을 안고 출발한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공익은 팽개치고 사익 확보에 혈안이 되어 탐욕과 사악함의 극치를 드러냈으며, 마지막까지 사저 문제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와 불신을 샀다.


▲ 서울에 들어오는 인민군.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의 대선개입으로 정권의 정당성에 흠집을 안고 출발했다. 박근혜 정부는 그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투명한 수사가 필요했고, 정치개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국정원 개혁이 요구되었으나 전혀 그와는 먼 행동으로 일관했다. 의혹이 깊어지자 수사에 적극적이었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비열한 방법을 통한 찍어내기로 쫓아내고 윤석렬 수사팀장을 보직해임함으로써 검찰수사를 방해했다. 또한 국정원의 개혁 요구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NLL(북방한계선) 논쟁을 유도함으로써 냉전시대에나 벌어진 공작정치의 구태를 재현하였으며 되지도 않을 ‘셀프 개혁’과 ‘테러방지법’따위로 국정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정당성에 의혹을 받고 시작했으면 그 후에라도 잘해야 할 것을 박근혜 정권은 전혀 국민적 신뢰를 얻을 수 없는 행태를 계속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능력도 최소한의 도덕적 책임감도 갖지 못하였으며,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극단적인 대결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정윤회 문건 파문, 문고리 3인방의 전횡과 k스포츠·미르재단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온갖 비리의혹과 봉건시대 궁중암투를 연상케하는 이상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통진당 해산에서 볼 수 있듯이 시대착오적인 냉전·공안논리가 판을 치고, 경찰과 국가권력이 살해한 민주시민 백남기 씨를 병사로 조작함으로써 국민을 두 번 죽이는 작태를 연출하고 있다.


▲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 을지로. AP통신 맥 데스퍼 촬영.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을 거치면서 87년 6월 민주항쟁과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형식적 민주주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믿었던 우리들의 사고가 너무 순진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가 문제되고 있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의 과제가 다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압력과 개입에 굴복한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보면서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자주성을 지킬 수 있는 민주정부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기 위한 책임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있지만 대통령과 정부여당, 국가권력과 그 책임자들에게 더욱 큰 책임이 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큰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권력을 장악하고 이끌어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반공보수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 반공보수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는 강했으나 국가를 움직이는 능력과 책임의식은 부족했다.

최근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가 출연한 ‘썰전’이란 TV 프로그램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정통보수주의자인 전원책 변호사조차도 박 정권과 보수들의 무능·무책임성을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로 지금 한국의 보수는 형편없는 작태를 연출하고 있다. 보수는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기성찰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의 보수는 처음 출발부터 그랬다. 지금 보수의 형편없는 모습은 보수세력들이 그렇게도 높이 추켜세우지 못해 안달을 하는 이승만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된 무능과 무책임성을 지금의 박근혜 정권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정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출발점은 6.25전쟁 때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기만하고 먼저 도망가면서부터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이승만 정권의 핵심 각료였던 신성모 국방장관은 처음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북진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거짓말은 곧장 탄로났다. 서울 가까이서 포성이 들려왔고 피난민도 서울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이승만 대통령과 각료들은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6월 27일 새벽 2시경 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났다. 그들은 순식간에 대구까지 도망갔다가 너무 멀리 갔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 폭파된 한강 철교 옆에 놓인 부교. 한강 철교 폭파로 다수의 서울시민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잔류파’가 되었다가 강을 건너 도망갔다가 돌아온 ‘도강파’들에게 부역자라고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의정부 쪽에서부터 포성이 들려오자 서울시민들은 6월 27일부터 한강 이남으로 피신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라디오 방송과 가두방송을 통해 정부가 ‘서울 사수’를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서울 중앙방송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의 동요도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그러나 이 방송은 거짓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각료들은 이미 대전으로 도망갔고, 대전에서 녹음한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테이프를 서울로 보내 계속 틀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또 거리에서는 “맥아더 전진 사령부가 한국에 설치되었다. 미군이 곧 참전하니 인민군은 금방 물러갈 것이다”라는 내용의 가두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6월 28일 새벽 한강 이남으로 피신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한강 인도교와 철교, 광장교마저 끊어버렸다. 남한 정부는 서울 시민을 인민군 수중에 고스란히 버린 것이다. 이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서울 시민들은 고스란히 인민군 치하에 남았고, 정부 발표를 믿은 사람들은 비도강파(非渡江派) 혹은 잔류파(殘溜派)가 되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존 리치 촬영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존 리치 촬영.
이렇게 되자 여론이 나빠졌다. 정부가 국방을 소홀히 해 국민을 전쟁의 고통 속에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의 잘못된 대응으로 혼란을 초래했으니 질책을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거짓선전과 한강 인도교 폭파로 피난까지 막아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고스란히 적군에게 넘겨준 꼴이니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책임자 문책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30일 대전으로 피신한 국회의원 50여 명이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방을 등한히 하고 정부가 경솔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서울 시민과 국민을 전란의 회오리에 몰아넣었으므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신익희 의장과 장택상·조봉암 부의장이 이승만을 찾더니 뜻밖을 말을 했다.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야?”라면서 한 마디로 거부했다. 그는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를 할 테면 당신들이나 해요”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말일까? 당나라 9대 황제인 덕종 시절 반란이 자주 일어나 백성들의 고생이 자심했다. 그러자 덕종은 자신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전란에 휩싸여 고생한다며 모든 것이 자신의 죄라며 ‘죄기조(罪己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이 고사를 빗대어 “내가 당 덕종이냐”고 말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후안무치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도 똑 같다. ‘내가 왜 우병우를 내쳐?’‘내가 왜 김재수 장관을 바꿔? 해임 결정을 한 국회가 문제지.’이런 사고방식은 이승만의 그 행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 끊어진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모습. 존 리치 촬영.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문 발표는 물론이고, 엄청난 비난 여론에도 신성모 국방장관의 경질조차 거부했다. 야당과 국민 여론은 국방을 소홀히 하고 패전과 혼란의 책임을 물어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의 경질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6월 30일 채병덕을 정일권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나마도 채병덕의 교체는 미국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은 신성모의 교체 요구에 대해 “강을 건너는 도중 말을 갈아타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은 초기 혼란의 책임을 물어 7월 14일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 이때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부장관 김도연, 사회부장관 허정 등 야당인 민국당 인사를 대거 등용한 이른바 ‘전시내각’을 구성했으나 신성모만은 끝내 교체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30만 명의 청장년을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이 나면서 워낙 여론이 나빠지자 어쩔 수 없이 신성모를 이기붕으로 교체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안보무능과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후안무치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적반하장의 이승만 정부

정부가 서울시민을 속이고 야반도주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만 도무지 그런 점이 하나도 없었다. 부끄러움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한강 다리까지 끊어서 피난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돌아온 뒤에는 왜 도망가지 않았냐고 국민들을 추궁하고 나선 것이다. 이른바 강을 건너 도망간 사람들, 이름하여 도강파가 개선장군 행세를 하며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 남았던 잔류파를 쥐잡듯 문초하고 나선 것이다. 도강파는 잔류파가 부역한 죄를 가려 심사하겠다고 설치고 나섰다. 이런 정황을 역사학자 김성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공국(人共國) 시절에 ‘계속 남진중(南進中)’이란 말이 웃음거리로 유행하더니 지금은 ‘남하’란 말이 세도가 당당하게 쓰이고 있다.
지난 6월 27일 ‘우리는 중앙청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일 보고 있으며 우리 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하고 도처에서 적을 격파하여 적은 전면적으로 패주하고 있는 중이니 시민은 안심하고 직장을 사수하라’고 목이 메도록 거듭 되풀이하여 방송하는 사이에 정부는 ‘남하’하고 모당(某黨)은 국민을 포탄 속에 속여서 내버려두고 당원끼리만 비밀로 연락하여 ‘남하’를 권면하였다 하고, 정부의 고관 혹은 모당의 당원이 아니라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피난하여 정처 없이 나선 것이 그럭저럭 가다 보니 대구나 혹은 부산에서 우연히 정부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어 이른바 ‘정부를 따라 남하한’것이 되고……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서울 시민(서울 시민의 99퍼센트 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赤軍)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 애국자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는 너희들은 모두 불순분자다’하여 곤박(困迫)이 자심하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어디 있을까.”(주1)

정부 말만 믿고 피신할 기회를 잃고 서울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은 김성칠의 말처럼 백성들에게 “얼마나 수고들 하였소. 우리만 피난해서 미안하기 비길 데 없소”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도 “심사니 무엇이니 하고 인공국의 입내를 내어 인격을 모독하는 일이 허다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벅찬 경쟁자를,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동료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일조차”일어났다. 그래서 김성칠의 입에서는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하는 비꼬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주2)


▲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 그들은 국민을 버려두고 도망간 사람들이지만 국민에게 미안해하거나 사과할 줄도 모르는 후안무치하고 무책임한 위정자들이었다.
피난 당시 정부가 얼마나 철저히 거짓말을 했는지 국회의원과 정부의 고위 관리, 심지어 보도연맹을 담당하던 사상 검사까지 까맣게 속았을 정도다. 이 시기 공안 검사로 이름을 떨치던 정희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27일 밤 12시 32분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해 국방부 차관실과 참모총장실에 ‘어떻게 되는 거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염려 말라’는 겁니다. 이러고서는 1시간 반쯤 뒤인 28일 새벽 2시 5분에 한강 다리를 끊은 거예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전화 문의를 했을 때 국방부 책임자와 참모총장 등은 도망갈 준비를 하면서도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가보니 사태가 아주 좋지 않아 돌아서 국방부와 육본으로 갔더니 텅 비었어요. 여기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한강교 폭파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는 보련(보도연맹) 간부들에게는 말 한마디 못한 채 공산 치하에 갇힌 거예요.”(주3)

이승만 정부의 행태는 “심지어 제헌 국회의원까지 누락될 만큼 행정부 몇 기구와 극소수 기관원, 시민, 작가”만 도망간 “비인도적인 피난”으로, “이조 중기 선조 왕조가 압록강 기슭의 의주로 도주한 임진왜란의 재판(再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서울에 잔류한 시민들의 불만은 당연하고 정당했다. 그러나 이런 항변이 통할 리 없었다. 서울 수복 후 잔류파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었다.

9.28 수복 후 이른바 ‘부역자’의 처벌의 법률적 근거가 된 것은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된 「국가보안법」과 6.25전쟁 발발 후 만들어진 전시법령들이었다. 1950년 6월 25일(실제로는 6월 28일)에 공포된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하 ‘특별조치령’), 7월 26일에「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이하 ‘군사재판특조령’)이 대표적이다. 전쟁 발발 후 인민군 점령 지역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수복 후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또한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인 특별조치령의 경우 단심제로서 증거설명도 생략한 채 전쟁 전이라면 4~5년에 불과한 범죄에 사형을, 2~3년 형에 무기 혹은 15년 형을 부과했다. 정부의 거짓선전에 속아 서울에 남았던 잔류시민과 패잔병을 부역자로 가혹하게 처벌했다.


▲  B-26 폭격기의 공습

대통령 긴급명령 제5호인 ‘군사재판특조령’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는 군사재판 사건을 신속하고 간략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군사재판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민간법원·검찰의 판·검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1950년 7월 22일(8월 4일 국회 승인)에 선포된 「비상시 향토방위령」이 있었다. 대통령령으로 전시향토자위조직과 활동을 국민의 의무로 밝히고, 인민군이나 부역자에 대해 경찰관서에 통보하도록 했다. 그런데 임무 집행 중에는 자위대원일지라도 부역자를 체포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과도한 법규정, 보복·응징과 예방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등으로 수복 후 각지에서 우익청년조직 등의 우익세력이 활보하면서 개인적 차원의 보복과 응징, 사형(私刑)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반면, 부역행위 처리를 신중하게 하고 처벌 감면을 목적으로 제출된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은 9월 17일 국회에 제출되어 9월 29일에 통과되었음에도 12월 1일에야 공포되었다. “비상사태 수습에 있어 특히 사형(私刑)을 금지하여 민심의 안정과 우리나라의 민주적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형(私刑)금지법」 또한 12월 1일에야 공포되었다. 그 사이 무자비한 보복과 과도한 처벌이 자행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가혹한 부역자 처벌과 갈등·파벌 구조

1950년 10월 4일에는 부역자 검거 수사와 처리를 전담할 군·검·경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설치되어 부역자 처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합수부는 법률적 근거도 없이 설립되어 독자적인 수사권으로 위헌 시비를 불러왔고, 월권행위로 원성이 자자하게 만들었다. 합수부장에는 친일파 군인 출신의 저 유명한 김창룡 중령이 취임해 전횡을 일삼았다. 그는 재판 과정까지 압력을 행사해 부역자에게 중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1951년 5월 2일 ‘합수부 해체에 관한 결의안’(주4)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합수부가 해체될 때까지 부역자의 체포와 기소 임무를 전담했다.


▲ 영화 ‘인천상륙작전’ 포스터. 이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부역혐의자 처리 문제가 떠올랐다.
10월 12일 계엄사령관은 “시내 각 구, 동회를 통하여 적치에 부역한 자는 반원 연대책임 하에 철저히 적발할 것”을 지시했고, “국군 입성 후 행동이 수상한 자는 감시하는 동시에 관헌에 고발해야 하며, 무기 탄약과 역산(逆産) 물자는 경찰에 제출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합수부는 자치대나 민간에서 연행, 체포한 부역자들을 3등급으로 분류해서 심사,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경인지역의 경우, 경인지구계엄사령관 이준식의 지휘 하에 경인합수부가 부역행위자의 조사·처단 업무를 관장했으며, 시경, 치안국, CIC, 검찰 등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10월부터 본격적으로 검거, 심사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 경찰서에서도 경인합수부로 경찰관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관할서 관련자들의 검거, 심사, 분류작업에 참여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강화경찰서의 경우에도 합수부에 경찰관을 파견하여 강화치안대, 대한청년단, 각 지서 등에서 취합한 강화부역혐의자 관련 서류 2,600건을 분류, 검토하는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 당시 A급은 총살, B급은 경기도경찰국 이송 후 재판, C급은 훈방으로 분류되었다. 강화관련 2,600건 중 A급은 200건, B급은 400건, C급은 2,000건이었다.(주5)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6.25전쟁 전 기간을 통해 부역자로 처리된 자는 모두 550,915명(검거자 153,825명, 자수자 397,090명)에 이르지만, 이 가운데 어느 정도가 어떤 종류의 형벌을 받았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상당수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1950년 11월 25일 현재 867명의 사형선고자가 집계될 정도였다.(주6) 그런데 부역혐의자 가운데 의식분자는 실제로 19,116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국에 의해 검거된 인원 중에서도 13만 명 이상은 “적의 강압에 부득이하게 부역한”사람들이었던 셈이다.


▲ 서울 시내에서 작전을 펴고 있는 유엔군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황에서 재판은 모두 군법회의로 처리되었고, 서울시에는 계엄중앙고등군법회의와 서울지구고등군법회의 등에서 8명의 판사가 동원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1950년 11월 중순경에는 최소 1만 5천여 명의 재판을 2개의 군법회의에서 모두 진행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서울지방법원과 같은 민간법정에서 함께 진행되었다. 9.28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10월 4일 경인지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지위 아래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A, B, C 등급으로 나뉘어 군법회의(계엄고등군법회의와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와 서울지방법원 등에서 재판을 받았다. 

인민군 점령기 인민위원회 등 북한의 정권·점령기관에 종사한 주민들은 대부분 경찰의 지휘 아래 치안대 등 민간인치안조직에 의해 연행되었고, 경찰서에서 사찰계 소속 경찰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A, B, C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합수부에 따르면 A등급은 군법회의 송치, B등급은 보완조사 후 송치 또는 석방, C등급은 훈방했어야 하지만, 실제 각 경찰서에서는 A등급은 즉결처분, B등급은 재판 송치, C등급은 보류 상태로 두었다. 말하자면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연행된 사람들은 모두 경찰 조사 후 즉결처분되거나 재판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재판을 받고 합당한 처분을 받아야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살해된 것이다.

서울과 주변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자에 대한 총살이 자행되었는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가평, 강화, 고양, 여주, 남양주, 포천, 가평 등 여러 지역에서 그 사실이 확인되었다.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은 서울과 경인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광범위한 지역에서 자행되었다. 1950년 8월 20일 경남 통영에서 수복과 함께 부역혐의로 총살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부역혐의자에 대한 최초의 살해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후 경남과 경북을 거쳐서 경기도, 충청남북도 등에서 수복 직후 부역혐의자에 대한 총살 사건이 발생했으며, 치안이 안정된 1950년 10월 초순부터 1.4후퇴 직전까지도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 사건이 전국에서 계속 발생했다. 경기도가 재수복된 뒤 1951년 4월경까지 경기도 여주와 충북 음성 등에서 부역혐의자에 대한 총살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임의총살사건을 일으킨 경찰과 치안대 등에 대한 처벌은 매우 관대했으며, 특히 경찰관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역자 처벌은 합수부의 전횡뿐만 아니라 군인과 경찰, 우익 청년단 등에 의한 사형(私刑)이 만연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우익 청년단을 비롯한 민간 사설 단체가 개인적 원한 관계에 따라 보복과 살상 행위를 자행했으며, 군인과 경찰관은 부역 혐의자의 재산과 부인을 빼앗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부역자에 대한 공식적인 심사와 처벌은 계엄사령부가 맡았지만, 기관이 현저히 부족해 사설 단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서울 점령 당시 북한의 선전물
사회 각 분야에서 자체적으로 부역자 심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잔류 상황에 대한 여건을 감안하여 가급적 관대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밖에도 학계, 문화·예술계 등 각 분야에서 도강파가 중심이 되어 심사 활동이 펼쳐졌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앙금과 후유증이 양산되었다.

사실 부역자 심사와 처벌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와 군대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뉘우침도 없이 자의든 타의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협조한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을 무조건 범죄인 취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주7)

게다가 이런 심사와 처벌이 개인적인 감정이나 응징, 경쟁자를 처벌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파벌과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부역자 심사 작업이 한국 화단(畵壇)의 파벌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증언은 그 하나의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각 분야의 갈등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이 시기 부역자 처리를 둘러싸고 배태된 갈등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갈등과 파벌 구조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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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성칠,『역사 앞에서』, 창작과비평사, 1997, 251~252쪽.

2) 김성칠, 위의 책, 252쪽

3) 『민족의 증언 3』, 중앙일보사, 1983, 41쪽

4) 국회는 군·검·경이 수사상 협력하기 위해 발족했으나 이제 협력 기관이 아니라 독립된 관청이 되는 등 폐단이 많으므로 이를 해체하여 일반 범죄는 검찰과 경찰에, 군 관계 범죄는 군 수사기관에 이양함으로써 수사기관의 난립을 방지하며, 아울러 인권유린의 작폐를 근절하기 위하여 합수부를 해체하도록 한 것이다.

5)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2010, 231쪽

6) <동아일보>, 1950년 11월 25일자 기사;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21쪽

7) 김성칠, 앞의 책, 296~297쪽.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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