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 해제(解題)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집서(蘭亭集序) 해제(解題)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2.11.0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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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집서의 번역과 해석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 해제(解題)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群賢畢至 少長咸集

영화구년 세제계축 모춘지초 회어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군현필지 소장함집

영화 9년 때는 계축년 음력 3월 초사흘,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여 계제사를 드렸다. 나이 불문하고 빼어난 인재가 모두 모였다.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우유청류격단, 영대좌우

고산준령에 수풀 우거지고 곧은 대나무 무성한 곳, 맑은 물 굽이쳐 여울지며 난정을 휘감아 흘러 주위를 비추는 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絃之盛,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 수무사죽관현지성

물길을 끌어들여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차례로 줄지어 앉았다. 음악이 굳이 있어야 할까.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是日也, 天朗氣淸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시일야, 천랑기청

한 잔 술에 한 곡조 읊조림으로도 회포 풀기에 족했다. 이 날, 하늘은 맑고 공기 또한 청명했다.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혜풍화창, 앙관우주지대 : 부찰품류지성,

따사롭고 시원한 봄바람 속, 우러러 하늘의 광대함을 바라보고 굽어 만물의 번성함을 살폈다.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소이유목빙회, 족이극시청지오, 신가락야

자유로이 눈을 돌리며 마음 가는대로 생각을 달리니 보고 듣는 것이 극에 달하여 참으로 즐거웠다.

夫人之相與 俯仰一世,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부인지상여 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평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이는 한 방안에 앉아 마음속에 든 것을 꺼내어 얘기하고, 어떤 이는 마음을 대자연에 맡겨 몸을 떠나 아무런 구속 없이 행하기도 한다.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曾不知老之將至

수취사만수 정조부동 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득 회부지노지장지

비록 선택방식이 다르고 행동거지가 서로 같지 않지만, 자신이 처한 바를 기뻐하고 잠시 득의하며 즐거이 자족하고 사노라면 노년이 닥치는 것도 알지 못하리라.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지의

그러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싫증나고 감정이 일에 따라 변화하면 마음 또한 이에 묶여 움직이지 않는가.

向之所欣, 俛仰之間,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향지소흔 면앙지간  이위진적  유불능불이지흥회

이 전에 즐거웠던 일이 순식간에 진부해지니 감회가 일어나지 않고 배길 수 없으리라.

況脩短隨化 終期於盡

황수단수화 종기어진

더구나 오래 살든 일찍 죽든 결국은 모두 생을 마침에 있어서랴!

古人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고인운 “사생역대의 ” 개불통재

옛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매우 큰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매람석인흥감지유 약합일계 미감불림문차도 불능유지어회

매번 옛 사람이 감회를 일으킨 바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도 마치 부절을 합친 듯, 일찍이 문장을 대하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고 마음으로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

고지일사생위허탄 제팽잔위망작

그러므로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것은 궤변이요, 팽조처럼 장수하는 것과 요절하는 것이 같다고 보는 것도 망령됨을 알겠노라.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 비부 고열서시인 록기소술

후세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쓴 문장을 본다면, 이는 오늘 우리가 고인의 문장을 보는 것과 같으니, 아 아 슬프도다! 그래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들의 시편을 수록하였다.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수세수사이 소이흥회 기치일야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사정이 변하겠지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이치는 한결같을 것이니, 후세에 이를 읽는 사람 또한 이 글에서 느끼는 바 있으리라.


1. 왕희지(王羲之)
중국 진(晉)나라 사람. 자는 일소(逸少). 307년에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낭야(琅句)태어나 365년에 죽음.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서예가(書藝家). 동진(東晋) 왕조의 공신(功臣) 왕도(王導)의 조카, 왕광(王曠)의 아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일곱 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리우고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왕우군이라고도 불린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 : 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명문 출신으로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年) 벼슬을 그만두었다.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會稽)의 산수 간에서 사안(謝安) ․ 손작(孫綽) ․ 이충(李充) ․ 허순(許詢) ․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採藥)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로 한 평생을 마쳤다.
2. 난정서(蘭亭序) 解題
난정서(蘭亭序)는 중국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307~365)가 쓴 산문(散文)으로‘삼월삼일난정시서(三月三日蘭亭詩序)’라고도 한다. 353년 3월 삼짇날 사안(謝安)· 지둔(支遁) 등 41명의 문사(文士)들이 회계산(會稽山) 양란저(陽蘭渚) 회계 난정(蘭亭)에서 계제사(禊祭祀)를 올리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며 시(詩)를 지었는데, 이 자리의 기사(記事)와 영회(詠懷)를 모아 문집(文集)을 만들고 왕희지(王羲之)가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序文)을 짓고 썼다. 이것이‘난정서(蘭亭序)’라는 일대의 걸작으로 산수문학(山水文學)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353년 3월 삼짇날 저장성(浙江城) 사오싱(紹興) 서남쪽의 난주(蘭渚)에 있던 정자 난정(蘭亭)을 찾아가 주변을 보니 “높은 산과 험준한 봉우리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데다 그 사이로 더욱 돋보이는 울창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홀로 푸르른 하늘 위로 올라선 것 같고 숲 속을 걷노라면 옛 사람들의 그윽한 정취가 감돌았다. 이 형언할 수 없는 내면의 격정을 “종이 위에 휘갈겨 쓰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흰 구름 두둥실 가볍게 떠가고 만물이 갖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자연에 넋을 잃다가 문득 인간 세상의 짧음을 탄식한다. 또“진심을 다했던 감정들이 물에 비친 꽃이 되어 버렸다. 물에 비친 꽃은 바라볼 수 있을 뿐 다가갈 수 없다. 열심히 했던 일도 다시 올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고 회억하면서 “훗날 이 글을 읽을 사람이여, 당신은 오늘 이 시간 이 순간의 우리네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며 묻고 있다.
3. 왕희지(王羲之)의 '묵지(墨池)'와 '탄복동상(坦腹東床)'
왕희지가 장지의 서법을 익히기 위해 연못가에서 하염없이 글자를 써 내려 간 끝에 못 물이 모두 검은색으로 물들었다는 '묵지(墨池)'의 일화가 있다. 또 당시 태부의 직에 있던 치감이라는 권세가가 왕도의 조카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려고 찾아 왔을 때 다만 왕희지만이 침상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누가 왔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 위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는 일화에서 '탄복동상(坦腹東床)'이란 말이 생겼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절차탁마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를 확립하고 서성(書聖)으로 추앙되었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함은 물론 그의 글씨는 이미 그의 생존시에도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蘭亭序)’·‘십칠첩(十七帖)’·‘집왕성교서(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는데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이 바로 ‘난정서(蘭亭序)’이다.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널린 그의 글씨를 다 모아,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왕희지의 진본 필체는 찾기 어렵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체는 모두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아낀 당 태종의 명에 의해 당시 서예대가들이 베낀 모사본들이다. 현재 20여건에 불과한 왕희지 모사본은 타이베이(台北) 고궁박물관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 흩어져 있으며 4점 가량이 일본에 남아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 ,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이 아니라서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글씨를 논할 때 상대적으로 왕희지는 음유의 미에 치우치고 왕헌지는 양강의 미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왕희지의 글씨가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골과 육이 알맞게 조화된 중화의 미를 추구하는 모범적인 글씨라고 평해진다.
왕희지의 글씨는 누구보다도 글씨의 섬세함과 치밀함이 극치를 이루어 변화가 많을 뿐만 아니라 통일의 엄밀함도 갖추어져 있다. 왕희지가 자신의 여동생을 기린 내용으로 추정되는 ‘매지첩(妹之帖)’이 1천200년 전 중국에 파견된 견당사(遣唐使)에 의해 일본으로 넘어가 1973년 일본 고토(五島) 미술관에 의해 처음 공개된 바 있는데 길이 25㎝, 폭 5.3㎝에 두 행에 걸쳐 모두 17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50여억 원의 경매가가 붙여져 그야말로 한 글자당 억만금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 되었다. 그의 예술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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