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초기 선교는 교육으로 시작됐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는 교육으로 시작됐다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2.11.2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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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의 시작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 조선의 인재들을 일으키다

[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⑧ 교육과 복음(1)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근대교육 제도'의 미션스쿨 설립
빈부귀천와 신분고하 막론한 보편적 성격의 조선 교육의 ‘대혁명’
복음 전하는 조선 사역자 길러내고자 했던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배재학당→독립협회→독립신문→만민공동회...민중계몽의 요람

조선 여성들 깨우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스크랜턴의 ‘이화학당’
‘기독교 배척운동’·‘영아 소동’에 한때 위기 맞기도 했던 교육사업
두 사건으로 오히려 선교 더욱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길이 열려
전덕기·이상재·안창호·이승만·김구·최남선 등 민족지도자들 배출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에 소재한 배재학당 외관 전경.
현재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에 소재한 배재학당 외관 전경.

우리나라에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조선의 교육 실태는 어땠을까. 당시 보편적인 교육기관으로 서향과 향교가 있었는데, 각각 오늘날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정도에 해당하는 교육이었다. 교육 내용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심의 인문교육을 숭상했으며 오늘날의 과학과 의학 등을 포함하는 기술과 실업 교육은 천시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당시 유교 교육은 일반 서민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조선의 관리 등용제도인 과거시험을 위한 교육에 치중돼 있었다. 

유학 중심의 구식 교육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교육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이어진 개항 이후다. 당시 개항지 중 한곳이었던 함경남도 원산의 주민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신지식을 교육해 외세에 맞설 인재로 키우기 위해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인 ‘원산학사’를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가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5년부터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서양식’ 근대 교육제도를 도입한 미션스쿨들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전통적인 교육 체계와는 다르게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교육의 대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1885년 제물포 통해 조선 입국한 아펜젤러, ‘배재학당’을 세우다

배재학당 최초 설립시 본관의 모습.
배재학당 최초 설립시 본관의 모습.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학교는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배재학당이다. 아펜젤러는 1882년 펜실베니아주의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저지주에 위치한 감리교신학교인 드류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이듬해인 1885년 2월 3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두 달 만인 동년 4월 5일 부활절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당시 27세의 청년이었던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입항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적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안타깝게도 아펜젤러는 조선에 온 17년째 되는 해인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릴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예기치 않은 선박 충돌 사고로 순교하고 만다. 44세의 이른 나이에 순교한 아펜젤러는 17년간 많은 사역을 감당했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척박한 교육의 땅인 조선에 교회와 함께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는 처음부터 교육을 통한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해 7월 서울 정동 언덕에 있던 의사 스크랜턴 선교사의 옆집 한옥 한 채를 사서 방 두 칸 벽을 헐어 서재 겸 교실로 만들고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학생은 광혜원 의사가 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던 이겸라와 고영필이라는 두 청년이었다. 이렇게 ‘배재학당’이 그해 8월 3일에 시작됐다. 

당시 수업료도 안 받고 담배나 쌀, 점심값도 학생들에게 공짜로 제공했지만, 학생들이 자꾸 중도에 포기하거나 도망을 치는 바람에 수업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개교 시절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 선교 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버리고, 또 한 명은 6월이 외국어 배우기에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버렸으며, 또 다른 한 명은 가족의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아펜젤러 선교사가가 직접찍은 배재학당 초기 모습과 고종이 하사했던 배재학당 현판(오른쪽 위).
아펜젤러 선교사가가 직접찍은 배재학당 초기 모습과 고종이 하사했던 배재학당 현판(오른쪽 위).

아펜젤러가 ‘1886년 6월 8일에 학교가 시작됐다’고 표현한 것은 그날이 바로 감리교 선교부의 공인을 얻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887년 2월 고종은 나라의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아펜젤러에게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해 국가공인 학교로 승인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 필요했다. 뜻있는 미국인들의 후원으로 1887년에 르네상스식 벽돌 학교 건물이 완성된다. 

당시 조선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에서는 웃지 못할 광경들이 연출됐는데, 주로 20~30대 인 학생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몇 명씩이나 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밖에 나와서 도포에 갓을 쓴 채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피웠다. 양반 자제들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등교를 하기도 했는데 양반 체통을 중시하다 보니 학교에 와서도 각종 잔심부름을 하인들에게 시켰다. 심지어 체육 시간에 공을 차는 일도 하인들의 몫이 됐다. 이런 광경은 차츰 학교 측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사라졌다. 

1887년 배재학당의 학생들.
1887년 배재학당의 학생들.

아펠젤러는 기독교 정신에 따라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을 배재학당의 교훈으로 삼았다. 이는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마태복음 20장 2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펜젤러는 단순히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가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인 사역자를 길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1888년 아펜젤러가 미 감리교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신학부를 설치해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배재학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조선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개화기 지식인 서재필과 윤치호,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의학자 오긍선 등이 있으며, 문인으로는 ‘물레방아’ 등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소설가 나도향과, 시집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소월 등도 배재학당이 배출한 인재들이다. 

◇배재학당의 인재들, 민중 계몽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다

독립협회의 멤버들. 이들 대부분은 배재학당 출신들 이었다.
독립협회의 멤버들. 이들 대부분은 배재학당 출신들 이었다.

배재학당은 우니라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배재학당 학상회인 협성회는 민주적 회의 진행 방식에 입각한 공개토론회를 매주 개최해 사회의식과 민주주의 의식을 함양한 청년들을 양성했는데, 이 청년들이 1896년 서재필의 주도 아래 설립된 독립협회의 주축이 됐다. 

독립협회는 당시의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토론회와 강연회 등의 개최를 통해 적극적인 국민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만민공동회’ 개최였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대중 집회에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개최됐는데,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보였다. 당시 서울 인구가 17만 명 가량 됐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집회였다. 무엇보다 만민공동회는 단순한 집회가 아니라 정치 및 사회 현안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도출된 국민적 합의를 정책에 반영하고자 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장이었다. 거의 날마다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을 비판하고 의회정치의 실시 등 혁신적인 국정개혁을 요구했다. 

그때까지 이 땅의 백성들은 어디까지나 왕과 지배층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였지 정치 참여자들이 아니었다. 지배층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참다못해 봉기를 일으켜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면 조정(朝廷)은 이를 난(亂)으로 규정하고 반역죄로 다스렸다. 그러나 이제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판세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는 대중 집회를 개최함에 따라 백성들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로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를 통해 각성한 백성들의 근대적 민주 정신까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훗날 민중들에 의한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됐으며, 3·1 운동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배재학당에서 배운 학생들이 민족, 민주, 정의의 개념 등을 실제로 행동해 옮겼던 것의 결과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배재학당에서 독립협회가 잉태됐고, 독립협회가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민만공동회는 민주주의와 자유민권 사상을 시민들 사이에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배재학당의 근대식 교육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뜬 청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민중 계몽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구심점이 됐던 배재학당은 오늘날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배재학당 신학부는 현재 서대문구에 위치한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모체가 됐다. 

◇척박한 조선 땅에서 여성 평등 교육에 헌신한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1910년대 이화학당의 저학년생들의 모습.

남성들을 위한 근대 교육기관으로 배재학당이 있었다면, 이와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이 있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유교적 인습에 얽매여 배움이 기회를 얻지 못했던 조선 여성들을 깨우치면서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할 목적으로 정동에 설치한 여성 전용 학교로. 오늘날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이 전신이다. 

메리 스크랜턴은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심이 남달랐으며 해외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1853년 W.T. 스크랜턴과 결혼했지만 19년만에 남편과 사별한다. 이후 외아들 윌리엄이 의료를 통한 조선 선교를 결심하자 자신도 선교사로 여생을 헌신할 뜻을 굳히고 1885년 5월 아들 부부 및 어린 손녀와 함게 조선땅을 밟게 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2세 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조선에 첫 서양식 민간 병원인 정동병원을 세워 가난한 자들에게 무료진료를 베풀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를 도우며 척박한 조선의 땅에서 여성 평등 교육에도 헌신하며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녀가 이화학당을 설립한 것은 조선 사회에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던 여성들을 당당한 교육의 주체로 세운 가히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은 학교 설립을 준비하며 많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학교 건물이 완성되어 학생들을 모집하면 배움에 목마른 여성들이 많이 몰려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학생 모집부터 쉽지 않았다. 

이유는 먼저 당시 서양인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의심과 편견 때문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몰래 데려다가 잡아먹는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무지했던 부모들은 선교사들에게 의심과 경계를 나타내며 아이들을 단속했다. 당시 메리 스크랜턴의 별명도 ‘서양 도깨비’였다. 서양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 파란 눈의 금발 머리를 가진 메리 스크랜턴이 조선 사람들에게는 마치 도깨비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화학당 설립당시(왼쪽)와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이화학당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김점동은 그녀가 10세 때 선교사의 일을 돕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화학당에 처음 가서 스크랜턴 부인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열 살 때 스크랜턴 부인을 처음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매우 추운 날씨여서 부인이 나를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나는 부인이 나를 난로에 잡아넣어 태워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부인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했다.”

이화학당 학생 모집이 어려웠던 두 번째 이유는 조선의 뿌리 깊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의 굴레와 내외법(內外法)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도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저한 남녀유별 사상에 입각한 내외법으로 인해 여자들은 밤에만 외출할 수 있던 시대였던 것이다. 

결국 학생 모집을 시작한지 약 1년이 지나서야 메리 스크랜턴은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이화학당의 첫 학생을 받게 된다. 언젠가 왕후의 영어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 학생은 고위 관리의 첩이었는데, 병으로 석달만에 공부를 그만두고 만다. 

이어 두 번째 학생으로 ‘꽃님이’라는 열 살배기 소녀가 왔다. 집이 너무 가난해 딸을 부양할 수 없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데려다 맡긴 아이였다.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얼마 후 아이의 어머니가 딸을 도로 데리고 가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주변에서 ‘처음에는 좋은 음식과 옷을 주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부추겼기 때문이다. 결국 메리 스크랜턴은 꽃님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 주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킨 후에야 아이를 계속 이화학당에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 이 꽃님이가 이화학당 최초의 영구학생(학교 과정을 중도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마친 학생)이 된다. 

두 번째 영구학생으로 ‘별단이’라는 아이가 들어왔는데, 못된 전염병에 걸린 채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한 여인의 딸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들어온 학생이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된 박에스더(김점동)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처음에는 당시 양반집의 자녀들을 학생으로 구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난한 집의 아이들을 학생으로 얻게 됐다. 

이후 서양 선교사들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이 조금씩 바뀌면서 학생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7년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으며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교육기관이 된다. ‘이화(梨花)’는 배꽃이라는 뜻으로,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으로 내린 이름이었다. 물론 당시 이화학당이 있었던 정동 일대가 배밭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국가 인정 받고 더욱 박차 가하려는 찰나 반포된 ‘예수교 전도 금지령’

명동성당이 준공될 무렵인 1898년의 모습. 당시 천주교 측과 고종은 명동성당 건립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미션 스쿨들이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중 예기치 않던 위기가 오게 된다. 국가로부터 교육기관으로 정식 인정을 받은 여세를 몰아 선교 활동과 교육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는 찰나 조선 정부가 1988년 4월에 반포한 ‘예수교 전도 금지령’ 때문에 발목을 꽁꽁 묶이게 된 것이다. 

당시 천주교 측과 정부는 명동성당 건립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고종이 건축 중단 요구를 천주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분개한 고종이 천주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예수교 전도 금지령’을 반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천주교뿐만 아니라 애꿎은 개신교 선교사들까지 선교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약 한달여 뒤에는 조선 민초들 사이에서 선교사들을 몰아내자는 기독교 배척 운동이 발생한다. 이는 전도 금지령 후 선교사들이 대외 활동이 일절 금지된 1888년 6월,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아이들을 유괴해 잡아먹고 눈알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이 장안에 돌기 시작해 소위 ‘영아 소동(Baby Riot)’이라 알려진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 흥분한 민초들의 분노가 소요사태로까지 발전해 당시 선교사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선교사들은 ‘서양 도깨비’ 등으로 불리며 조선 민중들에게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었는데, 아이를 유괴해 잡아먹는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으니 헛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은 민초들이 흥분해 과격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민초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몰려가 아이를 내놓으라고 악을 쓰며 난동을 부렸다. 정동에 있던 이화학당과 배재학당도 무사할 리 없었다. 흥분한 군중들이 몰려가 사택에 돌을 던졌고, 선교사 집에 고용된 한국인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선교사들은 자국 공사관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고,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은 조선 정부에 엄중하게 항의하는 한편,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자국함대 장병들을 신속하게 서울로 이동시켜 무력시위까지 펼쳤다. 이에 조선 정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의 고시문(告示文)을 내걸며 강력한 단속을 시행해 소요사태는 겨우 진정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런데 ‘영아 소동’은 표면상으로는 선교사들에 대한 근거 없는 괴소문이 확산되며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과 연계해 추진되는 개화파 세력의 근대화 운동에 불만을 품은 수구파 보수 세력의 저항이 숨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한 1885년 이후 사회 분위기가 개혁 쪽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해 선교사를 모함하는 헛소문을 퍼뜨려 개화파 세력의 기세를 꺾으려 했던 것이다. 

◇‘영아 소동’,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를 오히려 불식시키다

'영아 소동'으로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불식됐을 뿐 아니라 선교사의 지위 및 선교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됐다. /CBS 화면 캡처  

영아 소동은 약 6주일이 지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는데,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에 들어온 후 겪는 가장 큰 위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소동을 통해 얻은 수확도 적지 않다. 크게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조선 민초들이 헛소문 유포자 처벌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하면서 정부가 외국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자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와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상당 부분 불식됐을 뿐 아니라 선교사의 지위 및 선교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됐다. 

특히 같은해 여름 서울 근교에서 전염병이 유행해 환자들이 많이 발생했을 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진료 활동을 목격한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더욱 신뢰하게 됐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영아 소동’을 겪고 난 후, 스크랜턴 선교사는 1989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통과했습니다. 전에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비웃기만 하던 그들이 이제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지, 한마음으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또 기운이 나는지 모릅니다. 확신하는 바는 우리가 한국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아 소동을 통한 두 번째 수확은 훗날 한국 교회의 위대한 목회자로 활약하게 될 인물들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 인물이 ‘조선의 바울’로 불린 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과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민중 목회자로 꼽히는 전덕기이다.

김창식은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무작정 집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살았던 그는 돈도 배경도 배운것도 없어 머슴살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긍긍했다. 영아 소동이 일어났던 당시 남대문에 살고 있던 김창식은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괴소문의 진위를 밝히고 싶어 당시 조선에 온지 얼마 안 된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 집이 ‘행랑아범’으로 위장 취업을 했다.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해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를 출간하고, 여러 전도문서를 출판하는 등 한국 기독교 문서선교이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김창식은 바로 이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김창식이 올링거 선교사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살폈지만 조금도 해괴망측한 일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의 양반들과는 달리 하인에 불과한 그를 따뜻하게 가족처럼 대해주는 선교사 부부에게 깊은 감동을 받아 1890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훗날 김창식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01년 김창식 목사 목사 안수 기념 사진.
1901년 김창식 목사 목사 안수 기념 사진.

“내가 맨 처음 일하던 집은 미국 사람 올링거 목사의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 주인 내외의 생활을 매우 주의하여 살펴봤으나 아무리 살필지라도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몇 해 동안 그 집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 집 내외가 가히 본받을 만한 사람인 줄 깨닫고 그들에게 감화를 받아 예수 믿기를 작정하였다.”

이후 김창식은 1892년 감리교 전도사가 되어 평야 선교 개척자로 활동했고, 1901년 5월 상동교회에서 조선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뒤 1924년 은퇴하기까지 전국을 순행하며 복음의 불모지에 48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125곳의 교회를 맡아서 섬겼다. 그가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선교사에 감회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위해 일생 바치게 된 전덕기 목사

전덕기 역시 김창식과 비슷한 경험을 통해 기독교인이 됐다. 영아 소동이 발생한 당시 남대문에서 삼촌을 도와 숯 장사를 하던 그는 헛소문을 듣고 흥분한 군중들과 함께 정동으로 가서 선교사의 집에 돌을 던졌다. 이후 우연한 인연으로 스크랜턴 선교사의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게 됐는데 하인 신분인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주는 스크랜턴 가족의 행동에 감화 돼 1896년에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출석하게 된다. 이후 전덕기는 1907년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남대문 시장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헌신했다. 

당시는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이러한 참상은 특히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거둬 주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을 때, 죽은 사람이 교인이든 비교인이든 가리지 않고 팔을 걷고 나선 사람이 전덕기 목사였다. 

연고 없이 오랫동안 방치대 있던 시체는 부패돼 냄새가 심할뿐더러 대개 시체 썩은 물로 방안이 흥건했다. 때문에 전덕기는 늘 마른 쑥과 나막신, 종이 관(棺)을 가지고 다녔다. 마른 쑥으로 콧구멍을 막은 후 나막신을 신고 방안에 들어가 종이 관에 망자를 묻어 줬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한 전덕기 목사로 인해 상동교회는 그가 담임목사를 맡은지 5년 만에 교인수가 약 3000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상동교회 제6대 담임목사인 전덕기 목사(왼쪽)와 1901년 완공된 상동교회 전경. /보훈처
상동교회 제6대 담임목사인 전덕기 목사(왼쪽)와 1901년 완공된 상동교회 전경. /보훈처

아울러 전덕기는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김구, 이회영, 이동녕, 최남선, 남궁억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민족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움직이며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상동교회로 모이게 했다.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가 조직된 곳도,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우국지사들이 모여 헤이그 특사 파견에 대한 모의를 진행했던 곳도 바로 상동교회 지하실이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성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등 4인도 상동교회 출신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했던 민중 목회자이자 항일민족운동 거목이었던 전덕기는 한일합방 이후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휴유증으로 1914년 3월, 39세의 나이로 순교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명동성당 건립을 둘러싼 천주교 측과 조선 정부와의 갈등도 사용하시고, 정부 내 수구파와 개화파 세력들 간의 주도권 싸움에서 기인한 정치적 계략까지도 다 사용하셔서 선교 활동을 위협하는 영아 소동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어우러져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도하신바, 즉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선교 활동을 더욱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김창식과 전덕기 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부르시는 통로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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