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의 이승만의 주변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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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4.02.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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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치 중위의 눈에 비친 한국
버치 문서와 해방정국 -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독서후기   

2022. 2. 1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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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워싱턴에 소환되었다가 서울로 귀환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미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 간담회에서 자신이 다른 점령군 사령관에 비하여 두 가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러시아인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유럽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도 소련군과 협의를 했어야 했지만, 한국은 미군의 아시아 점령 지역 중 유일하게 분할이 이루어졌던 지역이었다. 또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미국과 소련 외에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에 참여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은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인들의 성격이었다.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아일랜드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고 유머 센스가 많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또한 주장이 많다. 공상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설화들이 있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파티와 휴가, 정치권력을 사랑한다. 질적 수준이 높으며 동시에 그러한 높은 수준으로 인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매우 획일적이며 중국인과 다르며, 일본인도 아니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내려왔으며,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양의 기준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버치 문서 Box 5)

 

- 버치 문서와 해방정국 -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박태균 지음, 역사비평사, 2021, 12 ~ 14쪽

 

평생을 야전에서 보냈던 하지John Reed Hodge 사령관으로서는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이끌어가면서 한국의 정치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국이 패전국이었다면 점령 지역의 거주민들이 독일이나 일본에서처럼 승전국에 고분고분한 자세를 보였겠지만, 한국은 패전한 일본 제국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패전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제국의 피해자들로서 승전과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한국인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일 수 있었다.

……

...미군정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빠진 딜레마는 그에게 더 큰 난관이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추진했던 신탁통치안을 보수 우익 세력들이 반대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우익 세력들을 지원하고, 이들이 신탁통치하의 주도권을 잡고 궁극적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지가 외신 인터뷰를 한 시점에서 보수 우익 세력들은 미국의 정책인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이러한 딜레마를 가장 크게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던 이는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중위였다. 그의 계급은 '중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통치했던 무렵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고, 미소공동위원회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하버드대학교 법학전문대학 출신으로 오하이오 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가 1945년 12월 15일 한국에 배치되자, 하지 사령관은 그를 중용했다. ...

하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때를 쓰고 있는' 골치 아픈 보수 우익의 지도자들이나 소위 '추수폭동'을 주도한 좌익이 아닌 중도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을 세우고 싶었고, 이를 위한 중재자로서 버치 중위를 선택했다. 버치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도록 지원했고, 유엔의 주도 아래 38선 이남에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책으로 확정될 때까지 좌우합작위원회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지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버치는 30대 중반(1910년 1월 8일생)의 나이에 한국의 쟁쟁한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거물이 되었다. 그는 정치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치적 동향을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흐름의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7년 1월 한국에 귀국하여 24군단 정보부서(G-2)에서 버치와 함께 일했던 토마스 주니어Fred Charles Thomas Jr.는 한국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하지에, 버치에, 러치에"라고 할 정도로 계급은 중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령관이나 군정장관급이었다고 회고했다.₁

...버치는 자신이 만난 정치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전달했는데, 그 복사본을 모두 보관했다. 또한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부 문서들과 개인 메모, 그리고 수많은 편지들 역시 보관했다. 자신이 받은 편지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낸 편지의 사본도 보관되어 있었다. 그가 그렇게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은 사후에 그가 졸업한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으로 옮겨졌다. ...

버치는 1948년 38선 이남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추진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통합 한국 정부의 수립이 실패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73년 버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미군정 시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로부터 그 시기를 전체적으로 평가해달라는 것이었다. 버치는 마치 자신이 실패했던 한국에서의 작업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10장이 넘는 분량의 답장을 보냈다.

그의 편지는 "나는 한국에서의 진행 상황을 보면서 철저하게 실망했고, 용기를 잃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하지 장군은 나에게 동의했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안정적 힘을 갖기 위하여 이승만이 필요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도쿄, 특히 연합군 최고 사령부로 인해서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활동이 실패했던 원인은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갖고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편지를 쓰기 전이었던 1965년『주한미군정사』를 집필한 호그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버치는 웨스트포인트 출신과 비육사 출신 간의 갈등과 함께 맥아더가 이끌고 있었던 연합군 최고 사령부와 미군정의 갈등, 국무성과 국방성 사이의 견해 차이에 대해 언급했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 하지 장군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미국을 대표해서 참여했다.

1973년의 편지에서 태평양 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다음, 버치는 한국 내 정치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승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중장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

 

물론 버치 역시 하지와 마찬가지로 소련과 협상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참여시켜야만 하는 미국의 딜레마를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편지는 "하지 행정부는 순진했다."라고 마무리되어 있다. 미군정의 경제 자문관이었던 번스Arthur C. Bunce와는 달리 버치는 하지 장군이 극우적이었던 러치Archer Lynn Lerch 장군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₂

버치는 왜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왜 좌절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추진했던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 분단이 되지 않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인가? 이는 당시 상황이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은 불가피했고, 이승만의 분단 정부 수립 정책은 현실적인 노선이었으며 결국 승리했다는 기존의 주장과는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다.

……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분단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합의안은 단지 합의일 뿐 전혀 실현될 수 없는 방안이었는가?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진정으로 지원한 것인가? 국내에 전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이 미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빠른 시간 내에 한국민주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의 재기용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알면서도 미군정은 왜 이들을 계속 고용했어야 했는가?

이러한 해답을 찾는 과정은 한편으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기원과 그 원형을 찾아낼 것이다. 이는 버치 중위가 갖고 있었던 자료들이 비이성적 세력들이 권력을 강화해나가는 과정과 함께 지방 정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연재를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의 탈냉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한국에서 매카시즘이 작동하고 있는 그 근원을 찾아가도록 하겠다.

https://adst.org/wp-content/uploads/2018/02/Korea.pdf

₂안종철,「해방 전후 아더 번스Arthur C. Bunce의 활동과 미국의 대한정책」,『미국사 연구』31, 2010 참조.

- 같은 책 14 ~ 21쪽 -

 

돌아가신 위대한 선생님에 대하여 나는 조선말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는 영원히 침묵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와 나는 항상 선생으로부터 감화받은 교훈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조선 사람들은 울고 있지만,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돌아가신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히 죽지 않은 인물입니다. 우리 이제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큰 교훈을 준 사람입니다.(버치 문서 Box 4)

 

버치는 서투른 한국어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바꾸어 조사를 읽었다. ...아마도 그가 한국에서 근무했던 2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유일하게 한국어로 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버치 문서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 연설문이다. 제대로 말하기도 힘든 한국어로 조사를 읽어나간 버치는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과 그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냉전 시대,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규정되었던 여운형에게 버치는 왜 이렇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던 것일까? 버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미군정 관리이자『주한미군사』의 저자였던 로빈슨Richard D. Robinson 역시 그의 책 맨 앞 장에 다음과 같이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표했다.

 

추모: 1947년 7월 19일 한국의 서울에서 암살된 여운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그는 미국의 분별없는 외교정책의 비극적인 희생자다. 인민의 대의를 옹호하던 진보적 민주주의자인 그는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버치 중위를 하지 사령관과 함께 가장 위험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버치 중위와 하지 사령관이 여운형이 참여하고 있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38선 이남에서 정부를 수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치에게, 그리고 당시 미군정에게 여운형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 정책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해방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목표는 한국을 전범 국가인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강대국 중 어느 한 국가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지 않으면서도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친러시아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아야 했다. 미국은 19세기 한반도가 강대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이것이 동북아 전체의 불안정과 나아가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공적이지 않았던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 정책에 적합한 지도자가 아니다.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군이 진주하지 직전 조선공산당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고, 1946년에는 민전('민주주의민족해방전선'의 약칭)을 조직했다. 아울러 그는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 김두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치 문서 중에는 여운형과 김일성, 김두봉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의 번역본이 있으며, 그 내용 중에는 미군정을 비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버치 문서 Box 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왜 여운형을 끌어안으려 했을까. 버치가 한국 땅을 밟기 이전에 여운형은 이미 미군정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미군정은 한국 통치를 위해 1945년 가을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보수적이고 자산가이거나 친일 경력이 있었더 한국민주당 소속의 인물들을 임명하면서, 예외적으로 여운형을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미군정의 자문위원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의 러브콜의 여운형의 거부는 1946년 2월 다시 재현되었다. 버치 중위가 한국에 부임해 정치인들을 담당하는 정치고문단Political Advisory Group 소속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 민주의원('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약칭)이 결성될 때 미군정은 여운형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하는 민주의원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특히 '친일파'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던 이승만이 주도하는 조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

미군정 내에서 정치 공작에 관여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이었던 링컨Lincoln 대령은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던 아서 번스Arthur Bunce 참사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여운형은 미군정의 정책으로부터 잘 도망다니고 있다."라고 지적했다.(1947년 4월 4일, 버치 문서 Box 2) 이렇게 잘 도망다니는 여운형을 미군정은 왜 그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붙잡으려 했고, 일부 요원들은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여운형도 그랬듯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좌냐 우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또 서울대 사회학과의 창시자이며 한국 농구계의 산 증인인 이상백 교수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정으로서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운형이 38선 이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소련군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운형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남한의 지도자로 이승만과 김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여운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미국과 달리 러시아가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국제정치학자 개디스James L. Gaddis가 언급한 것처럼 동유럽의 공산 정권은 '내부로부터 초대받지 않은 정권'이었다.₃그러나 아시아의 중국과 베트남에 수립된 공산 정권은 대중적 지지를 통해 수립되었다. 한국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러시아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미군정이 벌였던 공작에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을 갈라놓는 전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의 힘을 빼는 것 역시 또 다른 중요한 공작의 하나였다. 여운형의 힘을 뺀다면 잘 도망다니는 그에게 계속 구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

여운형에게 타격을 입히는 공작은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굿펠로Preston Goodfellow에서 시작되었다.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대령 출신인 굿펠로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부터 이승만을 옆에서 도왔던 '좋은 친구'였다. 미국 국무성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굿펠로는 비자 발급을 도왔다. 준장 진급에 실패한 굿펠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5년 12월 25일 방한했고, 하지 사령관의 특별 정치 고문으로 1946년 5월 26일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₄그는 처음에 보수 우익으로만 구성되어 '대표'도 아니고 '민주적'이지도 않은 민주의원에 여운형을 참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여운홍을 여운형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공작에 나선 것이다.

굿펠로는 여운홍에게서 조선인민당으로부터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치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는 버치 중위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여운홍의 탈당이 가져온 정치적 효과가 미미하자 정치자금 지원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버치 문서 Box 2) ...

따라서 링컨 대령의 1947년 4월 4일 문서에는 "여운형은 아직도 중요하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여운형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소비에트에게는 더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소비에트에게는 더 위협이 되고 있다."라는 점은 러시아가 지원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조선공산당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여운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의 비리를 찾아서 그의 대중적 영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여운형의 친일 행위를 찾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₁리차드 로빈슨,『미국의 배반 - 미군정과 남조선』, 과학과사상, 1988.

₂SWNCC 101/4에는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 그리고 20세기 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각축이 있었으며, 일본에 병합되기 전에 한국 정부가 매우 불안정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FRUS 1945 Vol. Ⅵ, p.1099.

₃존 루이스 개이스,『냉전의 역사』, 에코리브르, 2010.

₄정병준,『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30-532쪽 참조.

- 22 ~ 31쪽 -

 

미군정은 '잘 도망다니는' 여운형의 정치력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또는 여운형의 약점을 잡아 미군정에 협조하도록 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돌입했다.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찾는 것이었다. 1946년 8월 2일 버치는『여운형의 관계에 대해 제안된 조사』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이하 버치 문서 Box 1) 여운형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고위층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이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수차례 있었던 일본 여행이 조사 대상이었다. ...

여운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 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를 만났으며,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일본 제국 내에서 한국이 제한적인 자치를 얻고,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영속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의 혐의였다. 버치는 "그가 미군정과 어떤 관계를 갖든 간에 그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면서 여운형이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친일과 관련된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했다.

……

일본에서의 조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일부 요원들은 일본 정부와 국회도서관 내의 문서 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오리오단Charles O'Riordan 소령과 호프Hope 소령은 1945년 이전에 여운형을 만났거나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₁...

주한 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은 8월 29일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9월 18일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 9월 20일 고이소 등 전 총독, 11월 17일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12월 12일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전 정무총감, 12월 19일 이소자키 히로유키磯崎廣行 전 조선총독부 경찰국장, 그리고 도조 히데키 전 일본 내각 수반(날짜 미상) 등을 심문했다. ...

질문의 첫 번째 범주는 여운형과 일본 총독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친한 일본인이 있었는가? 여운형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가? 여운형이 총독부의 돈을 받았는가? 그는 반일 활동을 했는데 왜 체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범주는 그가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가 스탈린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가? 그가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서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아는가?"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약점을 얘기해줄 다른 친구가 있는가?"

모든 심문자에게 공히 '이 조사는 전범에 대한 조사가 아니다'라는 전제 하에서 솔직하게 진술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조사 기록을 보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나는 진실로 여운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은 건전했다. ...여운형은 천성적으로 온화하기 때문에 그는 전쟁 후 한국인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이소)

 

내가 총독부에 있는 동안 공산당은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젊은 사람들이 여운형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들었다.(아베)

 

그는 극단적인 반일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지만, 내가 한국에 간 이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했다. ...상해에서 돌아오면서 그는 한국이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훌륭한 성격을 가진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다. ...만약 한국에게 정치적 힘이 있다면 그가 한국의 지도자로서 적합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우가키)

 

여운형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 급진적인 사람들이 풀려날 것이기 때문에 여운형의 권고대로 그 전에 이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여운형에게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약속을 깼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는 매우 세련된 사람이다. 강한 민족주의자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는 기회주의자이지만, 그건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성격이다. ...나는 그가 순수한 민족주의자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나 중국(국민당)을 따라갈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는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일본은 그를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싶어했다.(엔도)

 

일본의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으로부터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와 얘기했다. ...불가능했다. 우선 그는 독립을 원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독립과 상호 양보의 정신 하에서 함께 간다'라는 선언을 원했다. 이것은 자치나 반半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은 그것을 동의할 수 없었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는 민족주의자다. ...그는 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돈을 조금 주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돈을 준 목적은) 공산주의자들과 급진적 젊은이들의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원했지만,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피의 복수가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의 협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군사적으로 일본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전쟁 직후에 방송을 통해서 일본인들이 비극적인 학살을 모면하게 해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을 죽이지 말라는 생각을 주려고 한 것 같다.(니시히로)

 

그는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일본 지배의 반대자였다. ...(여운형이 100만엔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기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긍정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전쟁에 협력시키려고 했다.(이소자키)

 

심문 과정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더 미군정의 요원들은 일본 외무성의 문서를 조사했다. 조사관들이 찾아낸 외무성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미나미 총독은 남경으로 특사를 보내서 여운형에게 과거를 잊고 돌아와서 젊은이들의 조직을 이끌어달라고 했다. 고노에 내각의 시기인 1940년 여운형은 도쿄에 가서 고노에 총리를 만나 장개석과의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다고 했다. 아베 총독의 초대로 1945년 8월 16일 아베를 만났다. 아베는 여운형에게 평화와 질서 유지를 부탁했다. 이후 허헌, 김일성과 함께 여운형은 그때부터 한국의 진정학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했다.

 

...미군정 요원의 수도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여운형 개인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정예 요원을 파견했건만, 이들이 얻은 정보 중 여운형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1947년 1월 11일 최종 "조사 보고서"가 하지 사령관에게 제출되었다.(버치 문서 Box 1) 최종 보고서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₁이 조사와 관련된 일부 심문 자료는 정병준의『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아카데미, 1995, 234~236쪽에 일부 수록되어 있다.

- 32 ~ 39쪽 -

 

여운형의 친일 행위에 대한 1947년 1월 11일「최종 조사 보고서」는 "여운형이 비밀 요원으로서 일본 정부를 위해 봉사했거나 다른 외국 정부의 밀사로서 활동했다는 증거는 없다."라는 결론으로 시작했다. 아래에 나오는, 그의 친일 활동에 대한 최종 조사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와의 협력에 대해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여운형은 1940년 고노에 내각이 있는 동안 동경을 방문했는데, 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남경에 파견되어서 장카이섹(장개석) 총통을 만난다면 만족스럽게 갈등을 해결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바로 동경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1944년 가을 고이소 내각이 있는 동안 우가키가 중국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여운형과 가까운 친구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을 때 여운형을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여운형을 찾을 수 없었고, 우가키는 그 없이 상해로 떠났다.

 

우가키는 총독 재임 시절(1931~1936년) 여운형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총독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우가키는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전범으로 체포되었지만, 태평양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로서 이후에 곧 복권된 인물이다.

 

많은 경우에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을 그들과 협력할 수 있게 만들려고 했다. 1921년 봄 여운형은 도쿄에 초대를 받았지만 그 회의는 성과가 없었고, 여운형은 상해로 돌아갔다. 1933년 여운형은 우가키에 의해 귀국했고, 우가키는 그의 안전과 활동을 보장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을 이끌어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여운형이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의 절대적 독립을 위해 그의 노력과 일치하지 않은 방향으로 일본과 협력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우가키와 협력하기는 했지만 우가키는 일본의 자유주의자로 한국의 자치를 원하고 있었던 일본인이다. 우가키의 기억으로는 여운형이 한국 독립이라는 목적을 잊은 적은 없다. 물론 반 정도는 받아들인 적이 있다. 미나미가 우가키의 자유주의 정책을 따라서 여운형의 협력을 이끌어내려고 했지만, 여운형이 그렇게 하지 않아 실망했다고 말했다. 모든 일본인 총독이 그를 반일주의자라고 했지만, 그가 폭력을 음모하지 않았고 한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몇몇 사건을 빼고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무력으로 저항한 사례가 없었다. 스포츠를 통해,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포츠와 언론을 통해 젊은이들을 불러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일본 총독부는 이러한 노선을 갖고 있는 여운형을 회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눈에는 여운형이 암살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나 의열단과는 다른 인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사실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의열단의 지도자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비밀결사로 '건국동맹'을 만든 것 외에 그가 다른 정치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 역시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은 일본 항복 이후에 질서를 지키기 위해 일본과 협력했다. 항복 전에 엔도·니시히로·이소자키는 여운형과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그와 논의했다. ...일본 공권력은 여운형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유혈 사태를 막아줄 수 있다고 솔직하게 믿었던 것 같다. 여운형은 폭력을 삼가고 평화를 지킬 것에 대한 라디오 연설을 몇 차례 했다. 일본인들은 그의 연설이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믿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여운형이 올바른 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일본 행정부가 생각했던 바를 따르지 않았다. 일본이 원했던 것은 평화유지위원회의 장이었고, 연합군이 올 때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실질적인 정부로 여겨질 수 있는 정치적 조직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경찰국장 니시히로는 여운형에게 조직 자금으로 1백만 엔을 주었고, 이는 평화 유지를 위해 여운형의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모든 결정이 도쿄의 지시 없이 서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여운형이 연안이나 러시아와 접촉하려는 시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나 친러시아파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한국 민족운동을 대표하면서 반일주의자였다고 믿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주었지만, 38선 이남에 소련군이 아닌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치안권을 곧 회수했다. 이는 소련군이 들어올 경우에는 여운형이 소련군에 의한 일본인에 대한 탄압을 막아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진술에는 여운형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정치적 조직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하여 인민위원회로 전환된 것이 8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증언은 사실과 배치된다.

-40 ~ 45쪽 -

 

그러면 최종 보고서에 나타난 여운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여운형은 일본 총독부 입맛에 맞도록 행동해 왔다. 그는 스스로 일본의 지도자들과 가까운 개인적 친구로 알려지도록 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이들과 친구였다. 그의 방법은 미국의 일반적인 보스의 앞잡이와 동일했다. ...그는 일본의 문화를 숭상하면서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얘기를 했고, 그들에게 친화적인 인간상과 사회적 우아함이라는 인상을 안겼다. 그는 한국에 있는 그들의 친구에게 전달될 도쿄의 권력자들의 개인적 편지를 수집했다. 이러한 편지들은 항상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달할 나의 친구 여운형에게 나는 이 편지로서 신뢰하고 있다.등" 으로 그 사람들에게 그와 편지를 슨 사람 사이에 가까운 친구라는 인상을 주었다. 도쿄의 권력자들은 종종 총독부를 통해서 여운형과 소통을 유지했다. 모든 총독들은 도쿄에 있는 여운형의 친구들에게 탄원 같은 것을 보냈다. ...우가키 장군이 1944년 서울에 왔을 때 그의 중국행을 돕기 위하여 여운형을 지목했다. 그때 여운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여운형이 아베 장군의 사무실에 나타나 우가키가 아베 장군을 방문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아베보다 20년 위인 우가키와의 엄청난 우정을 강조했고, 아베는 혼란스러웠지만 극히 친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운형은 그러고나서 경찰국장에게 스스로를 소개했고, 총독으로 하여금 그에게 전화를 해서 그와의 관계가 깊음을 말하도록 요청했다. 국장은 감명을 받았고, 여운형은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식 감언이설snow job이다. 

그는 일본인과의 관계에 대한 '전설'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그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 9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했던 한 일본인 조사관은 많은 경우에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933년 한국으로의 귀환 이후 1945년까지 여운형은 일본인들로부터 심각한 탄압을 받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미군정 시대보다 일본 점령 시대에 경찰과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러치 장군보다도 우가키나 고이소와 더 가까웠다.

 

여운형과 총독부의 관계는 총독부 관계자들이 받은 인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실과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진술이 사실이라면,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에서 핍박받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총독부에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적과도 대화하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여운형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은 일본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일반적인 서양 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의견 차이를 극복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1933년 귀국하자마자 우가키 총독과 토론을 했다. 우가키는 여운형이 총독부를 위해 일해주기를 원했다. ...1933년 여운형은 우가키에게 자신은 지역적인 자치를 원한다고 말했고, 자신이 돕겠다고 했다. 어떻게 도울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우가키의 모든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운형의 지역적 자치는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토론 과정에서 양자는 매우 가까워졌고, 서로를 존경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독립을 실현할 수 있는 합리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가키에 의하면 그는 '낭인' 또는 프리랜서였다. ...그는 독립을 바랐지만, 합리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일본 경찰은 그가 미래에 혁명을 계획했다고 믿지 않았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수동적 저항자'로 인식했다. 여운형은 단지 '일본인을 싫어하라, 그리고 기다려라' 주의자로 알려졌을 뿐이다.

 

여운형이 친일의 혐의를 받는다면, 그가 총독과 대화하면서 '자치'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여운형이 주장했던 자치는 소위 친일파들이 주장했던 자치와는 다른 맥락의 것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자치는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였기 때문에 총독부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소위 친일파들이 주장했던 자치는 1930년대 중반 이후 그들 스스로가 황국신민이 됨으로써 일본 제국하에서의 자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 문제에 관련된 일본인들의 마음에 여운형은 현재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만이 한국을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들일 것이다.

 

총독부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결과에서 나온 결론은 여운형만이 한국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였다. ...처음에는 "증언자들이 다시 일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고 믿었지만, "이러한 모든 혐의는 상상의 것이었으며 (여운형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조사 과정은 조사관들의 마음마저도 바꾸어놓았다. 여운형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찬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945년의 시점에서 한국인들에게 논쟁이 될 수 없는 지도자였다." 우가키나 고이소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여운형의 자질에 대해 20분 동안 얘기했으며, "심지어는 부통령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여운형이 미군과 협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들은 만약 미국이 진정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를 원한다면 여운형과 충분히 협조해야 하며, 그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보고자는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가 '밑으로부터' 남과 북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라고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공백으로부터 더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미국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잘 도망다니지만 여전히 중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친일 경력 조사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인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그 직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도, 좌우합작위원회도 모두 좌초했다. 그리고 미군정의 요원들이 그 암살의 배후로 의심하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던 이승만은 1년 후 38선 이남만의 단독정부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38선 이남의 미군정은 군정 요원의 부족으로 통치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의 오점을 발견하기 위해 전문 요원 2인을 도쿄로 파견했다. 그리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여운형이라는 인물을 계속 안고 가야 하며, 그의 명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 45 ~ 51쪽 -

 

미군정이 행한 정치 공작의 한 축이 여운형에 있었다면, 다른 한 축은 이승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당연히 미군정의 지지에 의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버치 문서가 보여주는 내용은 이와는 판이하다. 버치 문서에 나타나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는 어느 하나 긍정적인 부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내용이 버치의 편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버치 중위가 한국에서 떠나온 지 4년이 지난 1952년, 한 한국인이 주한 미국 대사관을 통해서 미국의 이민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전쟁이 진행 중인 한국에서 한국인이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한 정부가 자신을 탄압하면 북한을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북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정부를 돕고 있는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것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 시기가 아닐 때 독재국가의 시민이 망명 신청을 하면 인권의 측면에서 망명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미군이 남한 정부를 구하기 위해 파병되어 있는 상항에서 만약 망명을 수용한다면 미국이 독재 정부를 도와주고 있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남한 정부와 그 수반을 잘 알고 있는 버치에게 연락이 갔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버치는 서울의 주한 미국 대사관의 담당자인 킹Yutin C. King에게 장문의 답장을 썼다.

 

나는 3년 동안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다. 그의 활동을 분석하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예견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승만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미군이 사용하는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지금도 이승만과 함께 살고 있는,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인 미시즈Mrs. 이승만의 가사 도구 구매를 위하여 PX의 특권과 도서관 시설을 제공했다. (대통령의 본부인은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버치는 한국에 부임한 초기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미군정이 이승만을 한국으로 귀환하도록 요청했고, 이승만을 통해서 한국의 보수 우익 세력들을 통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

흥미로운 점은 이 편지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승만의 첩concubine이라고 표현한 사실이다. 이승만에게 첫 부인이 있었고, 이혼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미군정에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망명 신청자에 대한 불법적 육체적 폭력의 위험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박사의 성격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박사는 그의 권력을 견제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좌절시키는 데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이용했고, 대한민국 정부를 사적으로 마음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지 내용 중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부분은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 개헌'으로 알려져 있는 직선제 개헌, 그리고 제2대 대통령으로의 당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 대한 이승만의 철학은 나의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잘 드러난다. 하나는 볼셰비키라는 적에 충성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와 내가 토론하고 있을 때의 경우인데,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협력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나는 말하고 썼으며 이를 반복했다. 나는 모든 한국인들이 예외없이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두 달쯤 지난 1945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하 '독촉중협'으로 약칭)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19세기 말 독립협회로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비록 탄핵되기는 했지만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활동했으며,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에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등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은 김구, 여운형, 김일성과 함께 가장 명성이 높은 정치인이었고, 조선공산당이 주도하여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될 때도 국내에 없었던 이승만을 대통령에 올렸다. 물론 이승만의 동의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국 초기 이승만의 독촉중협에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의 주요 정당들이 모두 참여했다. 미군정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정치인들은 이승만이 분열되어 있는 정치 세력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친일파'들의 참여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었다는 점이었다. '친일파'는 일본에 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불의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한국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전쟁범죄자들이었기 때문에 새로 수립될 국가에 참여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국가 수립을 위한 조직에 이들을 참여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정당이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구호가 "덮어놓고 뭉치자."였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친일 부역자를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뭉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은 이러한 무원칙한 이승만의 원칙에 반발하면서 독촉중협으로부터 탈퇴했다. 이승만도 "덮어놓고 뭉치자."라고는 얘기했지만, '덮어놓고"는 수사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중요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위해서 "모든 한국인들이 예외없이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라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결국 "덮어놓고 뭉치자."라는 구호는 그 앞에 "공산주의자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다. 이승만을 반대하면 정치 노선에 관계없이 공산주의자를 이롭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 이승만의 판단이었다.

 

다른 사례는 그의 원칙에 충성한다는 이름 아래 고문과 살해를 자행하는 대한민족청년동맹에서 일하는 정치적 암살자와 강탈자들로 구성된 이승만의 요원들에 대해 항의했을 때였다. 이 박사가 나에게 답변했다. "당신은 내가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좌파들이다."(덧붙여 말하면, 그때 죽고 강탈당한 많은 사람들은 좌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야만주의가 더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정치적 통찰력을 갖지 못한 문맹의 한국인 농민들을 적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 추종 그룹과 이승만 정부 구성원의 잔인함과 타락 때문이었다. 이승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총으로 쏜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매리놀 수도회의 캐롤Carroll 신부님과 영국성공회의 세실 코퍼Cecil Copper 주교가 항의했을 때 이승만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₁

 

...이승만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축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돈을 벌었던 친일 부역자들이었고, 다른 한 축은 물리력을 갖고 있었던 경찰과 청년단이었다. 그런데 후자는 미군정에게 가장 큰 고민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활동을 자행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보수 우익의 정치 세력들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부합될 수 있었지만, 미군정으로서는 불법적인 테러를 자행하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이승만은 청년단이 다치게 한 사람들은 좌파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애국자'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좌파는 인간적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들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애국적 행위인가? 보수적인 미국의 가치관에 충실했던 버치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정치적 도구로서의 살인에 대한 용서와 탄압을 위한 적극적인 지시가 이승만의 정책이었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부터 잘 드러난다. 하지 장군 아래에서 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전문적 살인 청부업자이고 강탈자이며 마약업자인 김두한은 감옥에서 나와 이승만에게 갔고 대통령궁 경호실의 높은 지위에 임명되었다. 위대한 대중주의자이자 이승만의 경쟁자인 좌파 여운형이 1947년 10월에 암살된 것은 이승만과 김구의 모임에서 결정되었다.₂나는 그 사실을 사건 3일 전과 암살 다음 날 미군정에 보고했다. 김구 살인은 이승만에게 충성의 열정이 넘치는 육군 중위에 의해 실행되었다.(김구는 진정한 대중적 우익 지도자였고, 앞으로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암살자는 장기간 징역형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이승만 정부에게 보상을 받았으며 소위에서 중령으로 진급했다.(그는 그 이후 <뉴욕타임스>의 리차드 존스톤에 의해 목격되었다.)

 

이 부분은 버치의 편지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이승만이 김두한과 가까운 사이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948년 이승만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김두한이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둘째로 여운형 암살에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 있었다는 주장 역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셋째로 존스톤은 1946년 1월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박헌영을 인터뷰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유명해진 기자였다. 인터뷰를 한 뒤 존스톤은 박헌영이 한국을 소련의 복속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기사를 <뉴욕타임스>에 게재했다. 조선공산당은 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조선공산당으로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찬성을 하면서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세력'으로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사는 더 큰 타격이 되었다. 버치 문서에 의하면 존스톤은 이승만과 가까운 사이였다. ...

 

이러한 문제들은 이승만의 재정적 횡령과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와의 선전전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2,500만 엔을 주었다.(민주의원에게 주었고 그들을 통해 그에게 개인적으로 전달했다.)

이 돈은 반공 선전전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가 받은 돈은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달러로) 교환해 미국으로 송금되었고, 선교사 재단이 이용활 수 있는 미국의 선교사 달러가 되어 이승만을 위한 돈으로 사용되었다. 돌아가신 러치 장군이 이러한 과정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을 때 이승만을 이를 거절했고, 그때 나는 공식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의 경제협조처(ECA, 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책임자였던 번스Arthur Bunce에 의해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의 음모가 밝혀지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을 위한 미국의 부흥원조 자금 중 4천만 달러를 해외 거주 교포들이 채권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미국에 빼돌렸다.

 

이승만에게 전달했는 2,500만 엔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버치가 갖고 있던 메모를 보면 미군정이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전달한 자금은 10만 엔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5년 당시 100엔은 2006년 가치로 19만 엔 정도였다. 2,500만 엔은 475억 엔이고, 1945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 물가가 10배 상승한 점, 그리고 민주의원이 조직된 1946년의 인플레이션(1945년의 478%)을 고려하면 약 8억에서 10억 원 상당의 액수로 추정된다. 당시 미군정의 문서는 '원'이 아닌 '엔'단위를 썼다. 한국에서의 엔 가치를 일본 엔 가치의 1/3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3억원 이상의 거액이었다.

한편, 버치 문서 속에는 이승만의 자금이 선교사 달러로 불법 송금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후술하겠지만,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에 갔을 때 사용한 돈이 불법 송금한 자금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 돈은 미국 내에서 이승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일했던 한미협회의 자금도 이런 방식으로 충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승만이 원조 자금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가까운 미국인들을 로비스트로 쓰려고 했던 증거는 적지 않다. 굿펠로와 밴플리트Van Fleet 장군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₃미국이 1950년대에 경제조정관실을 두고 이승만 정부의 원조 사용을 통제했던 것은 이승만의 이러한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진정한 우익인 김성수와 신익희는 정부로부터 밀려나 있다. 이승만 정부는 테러 친화적 생각을 갖고 있으며, 도덕적인 면에서 북한 공산주의의 야만적 정권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당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망명을 하고자 했던 사람에게는 사형에 준하는 형이 선고될 것이다.

하지 장군이 떠난 이후 한국에서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공개적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것은 이승만을 비판하는 그러한 성명이 야만적인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한국 행정부가 이번 경우에 한해서 정당하게 법을 적용하겠다고 약속한다고 할지라도 한국의 관리들이 미국 정부에게 했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던 이전의 사실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버치 문서 Box 3)

 

한국을 떠난 이후 썼던 버치의 이러한 편지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결코 이승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그가 한국에서 근무할 때 모아놓았던 문서들에서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일정한 편견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승만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버치를 김규식이나 여운형을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편지는 많은 시사점과 함께 의문점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버치는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그러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미국 대표로 한국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는 길에도 그에게 군용기를 제공하며 하지 사령관으로 하여금 도쿄로 날아와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말에는 이승만의 좋은 친구이자 전 전략사무국OSS 대령이었던 굿펠로Goodfellow를 미군정의 정치 고문으로 초대했다. ...그는 미군정이 한국인 대표들이 참석하는 기관으로 조직한 민주의원(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이승만이 대표직을 맡도록 정치 공작을 담당했다. 한국에 인맥이 전혀 없는 굿펠로가 정치 공작을 하는 데는 미군정의 배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버치는 굿펠로가 정치 공작을 진행하는 대부분의 자리에 동석했다. 그렇다면 버치는 동업자였나, 아니면 감시자였나? 그리고 위의 편지에서 나오듯이 적지 않은 돈이 미군정으로부터 민주의원에 지원되었고, 그 돈은 이승만에게 다시 흘러들어갔다. 미군정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그런데 왜 미군정과 이승만의 사이는 나빠졌을까? 언제 그리고 무엇이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결국 미군정이 추진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에 다시 이승만이 취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군정이 마지막에 가서 다시 마음을 바꾸고 이승만에 대해 지원했던 것인가?

₁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있었던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학살 사건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이 편지에서 언급된 내용인 것 같다.

₂1947년 7월의 오기로 보인다.

₃밴플리트에 대해서는 이동원,「'전쟁영웅'의 이면, 밴플리트의 대한 민간투자 유치 활동」,『역사비평』125호, 2018 참조

- 52 ~ 64쪽 -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 막연히 나라를 팔아먹고도 대대로 잘 먹고 잘 사는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은 수없이 했지만 '전쟁범죄자', 즉 전범戰犯이라고 왜 생각하지 못했나 싶다. 그렇다! 그들은 간단하고 분명하게 '전쟁 범죄자들'인 것이다.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보면, 수많은 신생독립국가에서 발생했던 '독립영웅' 출신의 권력자가 보여주는 온갖 부패와 독재의 난맥상이 판에 박힌 공식처럼 그대로 재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7년 3월 5일 버치 문서의 제목은「이승만」이다.

 

이승만이 한국의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다. 서투른 방식의 노력이 이승만에 의해 분명히 진행되고 있다. 그는 군정과 라이벌의 포지션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킬 것이다. 그가 이러한 역할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미군정만이 유일한 정부인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7년 3월이면 아직 38선 이남에서의 분단 정부 수립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귀국 직후 쿠데타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인가?

1947년 4월 8일 버치는 또 다른 문서를 작성했다.

 

미국 국무성이 이승만에게 항공편을 제공한 것은 유감이다. 이승만 캠프는 이승만이 4월 15일 돌아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입법의원에서 대통령으로서 저항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김규식과의 만남Meeting With Kimm, Kiusic」, 버치 문서 Box 5)

 

이 문서는 김규식과 만나서 나눈 대화를 보고하는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분에서 미국 정부의 국무성에서 이승만이 귀국할 수 있도록 항공편을 제공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밝히고 있다. 이는 곧 1946년 12월 로비를 위해 미국에 간 이승만이 귀국할 수 없도록 항공편 제공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야 한다는 바람을 표시한 것이기도 하다.

날짜 미상의 또 다른 문서에서는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에 장택상 경기도 경찰청장을 숙청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택상이 경찰 조직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장택상 위에는 조병옥 경무부장이 있었지만, 조병옥이 경찰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버치 문서에 있는 경찰과 관련된 문서들은 거의 장택상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모든 사람의 친구이면서 적이었다." 단지, 이승만에게는 적이 아니었다.

미군정은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 했고, 그가 한국에 없는 동안 그의 힘을 빼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려고 했다. 미국 국무성이나 육군성의 도움 없이 귀국하는 비행기 편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국에서 배를 타고 한국에 온다면 직항도 없었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는데, 그 사이 한국에서 어떤 정치적 변화가 발생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승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실제로는 우익 내에서 김구와 경쟁 관계였으며, 조선공산당과 여운형 등 좌파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해방 직후 이승만을 구세주로 모셨던 친일파들은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조금씩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

그러나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그의 성공적인 귀국이 누구의 도움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45년 10월 처음 귀국했을 때처럼 맥아더 장군이 도와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가 귀국할 즈음인 1947년 4월 19일 버치 문서의 제목은「이승만의 외교적 성공Diplomatic Success of Syngman Rhee」이다.(버치 문서 Box 3) 이승만이 국내외적으로 '실패'했던 4.19혁명으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이다.

 

이승만이 워싱턴의 직접적인 위임을 받아 귀국한다는 거대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승만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그룹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엄격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 경고는『현대일보』와 몇 개의 지방신문에 실렸다. 이승만은 미군정이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고 하는데, 자신들이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반미적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승만이 도착하기 전에 그는 미국의 정책 변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한국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나 마셜과 몰로토프의 서한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성명을 사령관이 직접 내야 할 필요가 있다.₁

 

이 문서들은 이승만의 거짓말 공세와 함께 미군정과 이승만 사이의 극단적 불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 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

버치 문서에 있는 이승만 관련 문건들에는 이런 식의 그의 활동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45년 이전 그와 함께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이승만의 배신과 거짓,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하와이 교포들의 분노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컨대 1947년 4월 24일「김호, 김원영과의 만남Meeting with Kim, ho and Kim, Won Young」(버치 문서 Box 3)이라는 문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잠깐 하와이에 들렀을 때, 매우 적은 수의 사람만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이승만의 '사기 행위'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대한 정책은 우유부단하고 자주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했고, 이를 위한 정치 공작으로 민주의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었고, 이승만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미군정의 정책은 조석지변이었다. 이승만은 1953년 정전협정을 반대할 때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미국의 정책이 확고하지 않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1953년 6월 17일 편지를 통해 "미국의 정책이 왜 이렇게 자주 바뀌는가?"라면서 자신은 "애초의 미국 정책에 따르고자 한다."라고 했다. 반공포로석방 하루 전날에 보낸 편지였다. 그것은 곧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허가했던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의미했다. 북한의 남침 직후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임무가 원래의 국경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이승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 중 38선을 넘어서는 순간 미국의 정책은 바뀌었다. '한반도 전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기존의 유엔한국위원단 대신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언커크, UNCURK)을 조직했다. 중국군의 참전 이후 미국의 정책은 다시 바뀌었고, 38선 부근의 일정한 전선 이상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하지 않는 제한전이자 국지전의 성격이 되었다. ...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어쩔 수 없는 정책 변화였다. 첫 번째 정책 변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전열이 무너지면서 공세가 가능했던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두 번째 변화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패닉 상태에 빠진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옵션이었다. 이승만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책을 고수했고, 이는 결국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계획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이승만의 주위에서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한국민주당이나 안재홍의 국민당이 모두 이승만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승만을 통해 한국 내 보수 세력을 통합하고 좌파에 대응하겠다는 계획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이승만을 '최고의 애국자'라고 소개하면서 화려하게 데뷔시켰던 미군정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러한 실패는 이미 1946년 5월부터 명백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을 잘못 쓴 것이다.

하지 사령관은 1946년 6월 20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승만과 김구에게 전면에 나서지 말고 뒤에서 김규식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6월 26일에 하지는 자신의 관저에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취지를 밝혔다. 이제 미군정은 더 이상 이승만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이상 버치 문서 Box 1) 다른 정치인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한 것은 이승만에게 엄청난 모욕이었으며 동시에 위기감을 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미국은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미군정을 설치하는 순간부터 상황을 잘못 읽고 있었다. 한국 정치인들의 성향도 객관적으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설치된 후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지만, 어쩌면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을 수도 있었다.

₁미국 국무장관 마셜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 사이에 1947년 4월 8일과 19일에 걸쳐 미소공위의 재개에 대한 서신이 오갔다. 국내에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은 1947년 7월이었다.(『동아일보』1947년 7월 17일) 이 서신은 미소공위를 재개한다는 것과 함께 미소공위에 참석하는 대상에 대해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3개월 전에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이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미군정 내에서 그를 돕는 정보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 65 ~ 73쪽 -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서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문구가 있다.

 

이승만은 미국보다 더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다.

 

이승만의 가까운 친구로서 그의 입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했던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의 평가다. 이승만에게는 많은 미국인 친구와 로비스트들이 있었는데, 대통령이 된 이후 이승만을 도왔던 미국인 친구들은 그 이전과 차이가 있었다.

해방 이전부터 미군정 시기까지 이승만을 도왔고 한국에서의 다양한 이권 사업에 개입했던 굿펠로의 이름은 1950년 이후 이승만의 근처에서 사라졌고, 1954년 이후에는 한국전쟁의 영웅 밴플리트 장군이 미국 내 로비스트로 이름을 올렸다.₁그 외에도 많은 미국인들이 이승만의 옆에서 부침을 겪었다.

단지 올리버 교수만이 1940년대부터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날 때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이승만의 영문 편지나 연설문을 수정해주는 역할을 충실해 수행했다. 그만큼 그는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₂그렇다면 "미국보다 더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했다."라는 올리버의 평가는 맞을까?

이승만에 대한 올리버의 평가는 때로는 미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이승만의 정책은 결국 미국의 국가 이익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평가는 올리버의 생각과 달랐다. 이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당혹해 했던 트루만 대통령의 생각과도 마찬가지였다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목적으로 미군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군대를 유엔의 깃발 아래 동원했던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부산정치파동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오죽하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을 입안하기까지 했을까?₃

이승만이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던 1947년 1월 2일 버치가 작성한 문서에는 그와 같은 미군정의 심정이 나타나고 있다.(버치 문서 Box 2)

 

이승만의 행동은 실제로 미국의 입장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고 ...군정하의 한국인들은 그를 위한 모금을 강요당하고 있다 ...경상북도의 경우 미군정의 허가 아래 그러한 모금이 이루어지는 걸로 알고 있다.

 

도대체 이승만은 어떤 인물인가? 어떤 정치인이든 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미군, 그리고 소련군과의 협조 없이는 정부 수립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련군과 협조가 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미군과는 협조가 이루어져야 했다. 38선 이남에서만 분단 정부가 수립된다면 이후 발생할 남북 간의 갈등을 막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치의 문서군 속에는 1947년 초 이후 이승만을 분석하기 위한 문서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1948년 1월 13일 버치가 작성한 문서이다. 제목은「이승만과 김구」다. ...

 

서구의 정치적 기준으로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고대 로마의 삼두정치에서 나타났던 정치 동맹의 관점에서 내부적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정치적 또는 사적 애정이 없다. 제한적 목적을 위하여 단지 임시적인 연합이 있을 뿐이다.

각각은 서로를 불안해하고 싫어한다.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 정권을 잡고나면 상대를 제거할 것이다. 삼두정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시시때때로 입장을 바꾸면서도 상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송진우 암살에서 보이는 것처럼 서로 간의 옆구리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8년 초 38선 이남에서의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발표되기 전까지 표면적으로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미군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하고, 소련과의 협조하에서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면서, 미군정이 자신들에게 바로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당연히 미군정과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버치를 비롯한 미군정 인사들은 이승만과 김구가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실질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송진우 암살 사건의 경우를 그 사례로 제시했다.

반탁운동에 미온적 입장을 취했던 송진우가 암살된 사건에 대해 반탁운동을 주도한 김구 진영에서 이 사건을 배후 조종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있었다. 경기도 경찰청장 장택상은 김구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밝혀진 사실은 과거에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던 자가 암살했다는 것과 그들이 김구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미군정의 문건을 보면 김구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위한 시도가 있을 때마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항상 언급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인 질투, 허영심,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그들의 배경과 현재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노여움이 나오는 가장 분명한 이슈는 돈 문제다. 돈 문제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승만과 상해 그룹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났다. 1945년 가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현금이 없었다. 반면에 김구에게는 1억 8백만 엔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국민당의 선물이었다. 김구는 이승만과 이 돈을 공유하기를 거부했고, 그 돈을 아끼지 않고 쓰다가 1946년 여름에는 재정적으로 부실한 상태가 되었다.

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심리적인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

1946년 겨울 굿펠로한테 이승만이 얻어낸 자금은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갈등을 야기했다. 이승만은 펀드의 전부를 요구했고, 김구는 나눌 것을 요구했다. 결국 이 돈을 불평등하게 나누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 김구는 적은 부분의 일부라도 받는 것을 기부했다.

 

버치가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명확히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 전문가들 역시 같은 반공주의 노선을 갖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신익희와 장면 사이에서 정치사상의 차이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버치가 찾아낸 것은 돈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 차이다. 한 사람은 돈을 정치적 목적으로 중요시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사적인 측면에서 돈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정치사상으로부터 이합집산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어쩌면 버치처럼 '정치자금의 출처', 그리고 '정치자금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정치인들의 차이를 찾는 것이 더 정확한 구분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1932년 히틀러에 대한 후겐베르크Hugenberg의 지지와 유사한 평행선을 보이고 있다.₄ 이승만은 부자와 전통적 보수 우익의 리더인 데 반해 김구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극단적 우익들의 지도자다. 테러리스트 그룹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이승만은 젊은 암살단 조직을 완전히 독점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 무리를 이끌고 있다.

……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의 추종자 사이의 문제다. 김구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의 추종자들이 친일 협력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손을 씻지 않은 채 혁명 추진에 불타는 사람들로 구성된 (김구의) 사람들을 반대하고 있다. 최소한의 진실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 사이의 관계를 계속 안 좋게 만들고 있다.

1947년 12월 3일 장덕수 암살은 그들의 내부적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김구와 그의 추종자들은 군정으로부터 강력한 징벌이 올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김구 진영은 (장덕수 암살 사건의 책임과 관련된) 대중적 반작용의 크기와 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이승만과 연대의 제스처를 통해 그들의 불안감을 표현했고, 이승만은 마지못해 김구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통합에 대한 성명이 자주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조직은 당분간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국민대표자회의와 김구의 국민의회는 지속적으로 통합을 요구하면서도 대중적 행사에 각각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서를 통해서 읽어본다면 통합에 대한 요구는 적대적임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 정치사를 분석하면서 김영삼, 김대중 두 전 대통령을 비교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나는 리더십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다. 두 사람은 수십 년간 야당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온 리더였지만, 그들은 결코 손을 잡을 수 없었고, 이는 결국 민주화와 독재 잔재의 청산을 5년간 미루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역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주제다. 당시 미군정 역시 두 지도자의 비교를 통해 두 사람에 접근하고자 했다. 물론 버치의 이러한 평가가 객관적이며 보편적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문서는 버치가 두 정치인을 직접 만나면서 느꼈던 부분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정치인들과 정보원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평가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 문서 안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명확히 대비된다. 김구가 1946년 1월 이후로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미군정의 문서를 찾기 어렵다면, 이승만의 경우에는 1946년 6월 이후가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도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어떠한 비밀이 숨어 있었을까? 미군정이 겉으로는 이승만을 싫어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그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던 것일까? 이승만에 대한 맥아더의 지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일까? 아니면 이승만 개인의 뛰어난 정치력과 정치 감각이 스스로를 대통령의 위치로 이끌었던 것일까?

₁「이승만대통령 영문서한 자료집」, 대통령기록관, 2012.

₂이승만의 미국인 로비스트들에 대해서는 정병준,「이승만의 정치고문들」,『역사비평』43호, 1998 참조

₃졸고,『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의 3장 참조.

₄후겐베르크는 히틀러를 총통에 앉혔고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은 제3제국에서 히틀러에 의해 숙청되었다.

- 74 ~ 83쪽 - 

 

이승만은 일개 정치인보다는 '국부國父'가 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는 1951년 자유당이 결성될 때까지 정당에 몸을 담지 않았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해도, 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총재로 모시고 싶어해도, 이승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를 결성했다. 독촉중협의 결성대회에는 보수 우익 인사들뿐만 아니라 좌익 정치인들도 초대했다. 그는 좌우익이 모두 추대하는 인물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친일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 때문에 좌파 정치인들은 대부분 그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이승만은 독촉중협과 그 후신인 독립촉성국민회를 제외하고는 특정 정치단체에 참가하지 않았다. 국부가 일개 정당에 소속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의 또 다른 문제는 외국인 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귀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1946년 3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직전이었던 1948년 5월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물론 이때 그의 외국 국적이 포기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이후 4.19혁명 때까지 12년간 경무대에서 거주했다. ...

지금까지는 이승만 대통령을 뒤에서 잘 보필했던 현모양처였다는 이미지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4.19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던 이기붕을 정부 여당의 2인자로 만들고, 부통령 후보가 되도록 함으로써 국정을 흔든 장본인이 그녀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이자 이기붕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와 절친한 사이였고, 이기붕의 아들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양자였다. 프란체스카가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점은 1947년 6월 20일 버치가 만든 메모에도 지적되고 있다.(버치 문서 Box 1-H-12~13) ...

……

버치의 문서 속에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1946년 말 미국으로 날아가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을 때였다. 미군정은 주요 인물들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작업을 했다. 여운형과 김일성 사이의 편지도 미군정이 중간에서 입수하여 영어로 번역해 놓았다. 그런데 CIC가 중간에서 가로챈 프란체스카의 편지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아마도 케이블로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프란체스카도 이 편지가 이승만에게 전달되기 전에 미군정이 가로챌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버치 문서 Box 1-H-14~22)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이승만에게 국내의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프란체스카의 생각이나 활동을 보여주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프란체스카는 우선 이승만이 1947년 신년사를 발표하고 이를 국내에 유포하는 활동을 도왔다. 프란체스카는 "우리는 정말로 밤낮으로 계속 일했다."라고 하면서 신년사를 전국으로 유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보수 우익의 지도자인 김구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하지 사령관과 김구의 좋지 않은 관계와 함께, 김구와 김규식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했다. 김규식이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김구는 김규식을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로 선전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분홍색은 없고 빨갱이라고 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하지 장군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아침에 OOO가 전화하여 하지 장군이 나를 아침 11시에 만나고 싶다고 전해줬다. 내가 이 씨와 같이 갔는데 12시 20분쯤까지 있다가 돌아왔다. 나는 주로 하지 장군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당신이 잘해왔지만 이제 실망시켰다고 했다. 당신이 워싱턴에서 정보를 잘못 얻고 있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속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육군 장관, 미국 의회, 그리고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으니, 당신 자신이 맥아더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헛소리라고 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연기된 것은 위원회의 탓이라고 했다.[내가 그 당시 당신이 (민주의원) 의장이 아니며 외국 출장 중이라고 상기시켜줬다.] 중경 임시정부파는 개인 이득을 얻기 위해 신탁 통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정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다고 했다. 하지 장군은 러시아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중략) 하지 장군은 우리가 왕래하는 편지들을 모두 가로막아 보관해놓았다. 그는 당신이 시위를 하도록 지시를 해놓고 간 것을 알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동안 당신은 미국에서 한국을 지지하는 정서를 유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 장군은 국민들이 신탁통치만 두고 난리를 치는 지금 같은 상황하에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당신의 대변인으로서 시위를 진압하는 데 도와 달라고 했다. 그는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인들을 동원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당신이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돌아와도 된다고 했다.

내가 대답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을 때 당신은 없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늘 하지 장군을 전적인 지지를 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의 대변인이 아니라 비서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시위를 진압하는 데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또는 김구에 대한 영향력도 별로 없다고 했다. 아마도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

 

프란체스카의 마지막 조언은 기적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당신이 (미국에) 간 것에 대하여 국민들이 큰 보람을 기대하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김구는 자신이 하던 것처럼 다시 하고 있는데 놔둬도 될 것 같다. 당신이 돌아오는 것이 그에게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해낼 줄 안다. 그는 그들에게 간디처럼 체포되어도 신경 안 쓸 거라고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당신이 미국 의회에서 무엇을 통과시킬 수 있겠나?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이 대단히 실망하고 기가 죽을 것이다. 당신이 고립되어 있으니 하지 장군이 인기를 즐기고 있는데, 지금처럼 돌아오면 안 된다. 미국 정책이 바뀌거나 다른 일이 생겨야 한다. 국민들이 모두 하지 장군이 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것을 당신이 잘 알잖아. 돌아오는 데 내가 알려줄 테니 급해 하지 말아. 당신이 국민에게 도움이 되려고 불려져야 될 정도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기다려라.

 

미군정 측에서 이승만과 관련된 거짓 뉴스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을 때 그 뉴스의 내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는 프란체스카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

프란체스카가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신 중에 '러치 계획'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오고 있다. 러치 장군은 미군정 내에서 버치와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 계획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는 모든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84 ~ 91쪽 -

 

1946년 강용흘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19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을 자문하고 있었던 아더 번스는 강용흘의 제안을 받아「미군정에 대한 생각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이라는 문서를 제출했다.(1947년 9월 25일. 버치 문서 Box 1) ...

이 문서에서 강용흘은 먼저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생각이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은, 일제하 가장 큰 협력자들이 정부 고위 관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아직도 한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은 미군정 교육부장인 유억겸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일본을 위해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이며, 김연수와 신영욱이 또 다른 사례라고 할수 있다.

적산 은행과 기업들이 극우 정치 그룹에 많은 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는 비밀이다. 일제 시기 가장 큰 친일파들이 이러한 극우 정치 그룹들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김성수, 이승만을 지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1943년 11월 5일『서울신문』(당시에는『매일신보』을 통해서 학생들을 전쟁터로 동원했다. 백낙준은 '조지 백'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을 위해 더 매국적인 연설을 했다. 장덕수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기간 중 가장 매국적인 연설들을 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이 군정청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지금 상황이 식민지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그들의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으며, 이것이 테러리스트들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탄압을 받고 있었다.

 

백남운 같은 사람이 감옥에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김성수와 이광수 같은 사람은 모든 특혜를 누리고 있다. 군정청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한국의 사정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다. 미국에서 접시닦이였던 사람이 군정의 민정 관리로 일하고 있으며, 미국 대학의 학장이나 지방 도시의 목사가 대학총장을 하고 있다. 건축가가 국가식량처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배치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국의 훌륭한 소설가, 미술가, 무용가들이 북으로 가고 있다. 이들은 북에 집이 있거나 공산주의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다. 북으로 못 간 사람들은 지하에 묻혀 있다. 미국으로 간 몇몇은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다. 예컨대 로디 현으로 알려져 있는 현제명은 훌륭한 연주자가 아니며 과거 일본 히로히토의 군인들을 위해 연주를 했었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미군정하에서의 상황을 정리한 후 강용흘은 미군정 아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찰을 꼽았다. 경찰 문제는 이미 1946년 대구를 중심으로 발생한 소위 '추수폭동(대구항쟁)'을 통해서 가시화되었고, 미군정 내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경무부장인)조병옥은 계속 자리에 두어야 한다. 둑으로 도둑을 잡는다. 경찰은 혁명적인 아니라 점진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바로 해고해야 한다. 장택상은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있다. 장택상은 암살 이틀 전 여운형에게 지방에 머물 것을 권고했다. 그는 암살 관련 정보를 그 자신의 부하들로부터 얻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여운형이 암살되기 며칠 전에 열린 한 회의에서 여운형으 제거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서울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고, 여운형은 암살되었다.(고인에 대한 편지를 여운형의 딸에게 전달한 것은 김구가 아니라 이승만이었다.)

 

강용흘은 해방 정국에서의 암살 사건에 경찰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이들은 모두 배후에 있었다는 혐의로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이승만이 갖고 있는 시나리오와 여운형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언급했다.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실패하고 전쟁이 일어나서 미국이 승리하면 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민주당이 집권하면 히틀러 아래의 독일이나 무솔리니 아래의 이탈리아처럼 될 것이다. 여운형의 죽음은 한국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김구와 이승만이 집권한다면 한국은 혼돈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총통Feuhrer이 될 것이다.

 

...위의 보고서에서 주목되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친일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경찰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 시기 주요 정치인의 암살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실상 이 두 문제는 이승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가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암살 사건과 관련해서 암살범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련자들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지금와 와서 그것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죽음으로써 초래된 상황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주요 지도자들이 암살당한 이후 과연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지도자가 있었을까? 미군정은 김규식이 여운형 없이 단독으로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1947년 3월 29일, 번스가 웨컬링Weckerling 준장에게 보낸「남조선 과도정부 수반 문제」, 버치 문서 Box 3)

 

물론 이들 외에도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당시 돈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지도자가 누구인가였다. 일단 친일 잔재 청산을 주장했던 정치인들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친일 경력으로 인해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었던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군정의 환대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다음과 같은 한 한국인의 말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승만을 보았고, 그가 군정에 의해 잘 대우받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박사가 즉각적인 정부 수립을 가져달 줄 것으로 생각했고, 그에게 1백만 엔을 주었다. 영수증도 없었고 감사의 말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느끼겠는가? 나는 멍청했다.

그의 최고의 약점은 다른 동료들과 협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게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는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외로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반쯤 최면에 걸린semi-hypnotized 사람들은 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그에게 기꺼이 이끌렸다. 그가 지금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그의 능력 때문도 아니고, 그가 성취한 것 때문도 아니다. 단지 지금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1947년 8월 4일, 정치고문단의 D. C. 유스Youth가 작성한「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배경: 그의 현재 상태의 원인과 이유」, 버치 문서 Box 3)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영원히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협조했던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보호막이 필요했다. 어쩌면 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그 보호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던 송진우는 1945년 12월 암살되었다. 그나마 한국민주당 내에 원세훈이나 김약수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 즉 전범들에게 안전한 우산이 되기는 어려웠다.

강용흘이 이승만과 김구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했지만, 김구는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친일과 전범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김구는 친일 경찰의 청산을 비롯하여 철저하게 일제 잔재를 청소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따라서 김구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경찰과 공무원들의 우산이 될 수는 없었다.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이승만이었다. 하지만 위의 유스Youth의 문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승만과 미군정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이승만에게만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우산을 찾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 협력자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한국민주당의 수석 총무였던 장덕수였다. 특히 장덕수의 경우 강용흘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제국에 협력한 경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미군정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반면 장덕수는 송진우처럼 미군정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느 친일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언변과 영어 실력, 그리고 서구적 매너를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미군정의 눈에는 매우 합리적 사고를 가진 보수적이며 친미적인 지도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 정부는 38선 이남에서의 선거를 통해 남쪽에서만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미군정은 장덕수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주고 싶었다. 장덕수가 이승만만큼 알려진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최고지도자로 내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가 수석 총무로 있었던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해서 내각책임제 정부를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민족 반역자이면서 전쟁 범죄자였던 이들이 정말 원한다면, 이승만을 내각책임제 아래에서 힘 빠진 바지저고리 대통령에 앉히면 되었다. 이승만이 그것을 받아들였을지는 모르지만. 미군정은 이승만을 신뢰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의견이었지만, 버치는 한국을 방문했던 마크 게인 기자에게 "이승만은 파시즘이 나타나나기 2세기 전에 있었던, 진정으로 완고한 보수주의자다."라고 말했다.₁

그런데 왜 이런 상황에서 내각책임제가 아닌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체제로 대한민국 정부가 시작된 것일까?

₁마크 게인, Japan Diary, New York: William Sloane, 1948, p.352.

- 92 ~ 101쪽 -

 

1947년 12월 2일 미군정을 당혹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 총무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한 것이다.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더 이상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직후의 시기였다. 미군정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분단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게는 보수 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이었던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장덕수가 암살된 후 열흘이 지나 버치는 하지 사령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장덕수의 암살」,1947년 12월 12일, 버치 문서 Box 1)

 

12월 2일 나는 김성수, 백남훈과 함께 장덕수와 긴 화합을 가졌다. 회합의 주제는 하지 장군을 비난하는 이승만의 캠페인과, 총선과 관련된 이승만의 주장에 대한 한국민주당의 태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나는 남상훈을 통해서 11월 29일 저녁에 이들이 이승만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민주당의 수뇌부는 이승만에게 그를 지원할 수 없다고 알렸고, 이승만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노여워했다고 한다. 그는 문을 잠그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그와 국가의 반역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모임에 대해서 장덕수는 이승만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말을 하지에게도 했기 때문에 내(버치)가 이 내용을 하지에게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제 의문의 열쇠 하나가 풀린다. 미군정하에서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왜 야당이 되었을까?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정당으로 유일하게 참가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국부'라고 하면서 일개 정당의 대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당에도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상황에서, 국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되었다. 김도연 재무부 장관을 제외하고 한국민주당 소속의 어느 누구도 이승만 정부의 내각에 입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1949년 한국민주당은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았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이 왜 한국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았는가는 하나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위의 문서는 그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1948년 3월 17일 문서(「UN Report」, 버치 문서 Box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구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12월 2일 월요일 김성수, 장덕수, 그리고 4명의 다른 한민당 대표들이 나와 점심을 가졌다. 농지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월 2일 저녁, 내가 떠날 때 장덕수는 따로 나에게 와서 김성수가 자신에 대한 암살 계획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알렸다. 김성수는 그러한 계획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버치는 장덕수가 암살되기 직전 그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될 경우 미군정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이 주도권을 갖도록 하는 계획이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운형의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장덕수 암살 이전에 이미 암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그 대상이 장덕수가 아니라 김성수라고 오해했을 뿐이었다. 아래에서「장덕수의 암살」문서가 계속된다.

 

12월 5일 저녁 나는 장택상에게 그의 친구인 장덕수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전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박광옥과 배희범이 실질적인 범인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의 조사에서 그들의 암살 의도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장택상은 그들의 동기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극우들이다. 그들은 고위층 사람들에 의해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너는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이다. 이번에는 그 범죄자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암살자들은 지시에 의해 행동했고, 진보와 지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김구의 식솔들로부터 들어온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김구와 이승만은 11월 30일 회합을 가졌다. 김구의 집에서 회합이 열렸다. 엄항섭도 참석했으며, 나의 정보원에 의하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사람들도 참여했다.

 

친일 경찰을 발탁하고 지원하고 있었던 장택상이 '진보'와 '지성'을 언급했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더 주목할 점은 장덕수 암살 사건에 현직 경찰이 가담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의 암살 수법이 매우 대담했다.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범죄 사건과 달리 암살범들은 자신의 얼굴을 본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져도 아무런 문제 될 일이 없었던 것일까? 배후에 자신들을 구제해줄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다른 암살 사건과 공통점도 있다.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은 송진우와 여운형, 그리고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에 대한 직접적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구가 일제강점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테러를 가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었으며, 장택상은 배후의 화살을 김구에게 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장택상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장택상의 아버지는 임시정부에 대한 정치자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에게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장택상의 집안 내력이 그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조준호는 서울 지역을 잘 알고 있고 (다양한 정치인들과) 많은 접촉이 있지만, 비정치적인 인물이다. 나는 다른 버전의 정보를 그로부터 받았다. 그가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김구의 친구들은 그가 장덕수의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김구의 친구 관계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정당들은 서로를 헐뜯고, 김구는 장덕수에게 일본의 주구라고 말했고, 장덕수는 김구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나 바보 같다고 말했다.)

김구의 친구들은 김석황을 암살범으로 비난했다고 조준호가 말했다. 김석황은 김구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암살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엄항섭에게 김구가 장덕수와 김성수의 죽음을 승인했다고 말을 잘못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택상은 재판에서도 정의가 들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치는 여러 곳에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중 하나는 이전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의 제일 앞에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불편한 관계를 얘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구와 관련된 사람이 암살을 지시했지만, 이는 김구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알아서 긴다'고 했던가? 보스를 기쁘게 하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어떤 정보도 믿을 수 없었다. 모두 소문일 수도 있었다.

 

장택상은 이 사건의 해결이 자기 부서의 권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문제는 오직 사령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한국의 범죄사를 보면 한국인들은 작은 보상을 통해서 금욕적 침묵을 지키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의 제도로서 강압적으로 수사를 할 수는 없다. 사령관만이 할 수 있다. 자백을 할 경우 감형을 해주는 것이다.

 

...2005년 겨울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잘츠부르크 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전 주한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 전 에모리대학 총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947년 미군정의 정보기관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 한국에 부임한 직후 그가 맡았던 사건이 여운형과 장덕수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가 조사를 하면서 배후를 캐고 또 캐서 이승만의 주위에 있는 인물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미군정의 고위층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수사를 그만두라는 명령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여운형과 장덕수 둘 중 한 사람의 암살 사건이었다고 한다.

장택상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하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지 사령관밖에 없다고 말했건만, 레이니 전 대사의 증언에 기초하면 실제로는 미군정 측에서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레이니 대사는 그 때가 자신의 한국 부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의문은 또 남는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더 이상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를 덮어주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레이니 대사의 기억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장덕수 암살 사건을 다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것인가?

- 111쪽 -

 

장덕수 암살이 버치와 미군정에게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앞으로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

 

신문에서는 용의선상에 있는 경찰과 관계가 있는 청년단의 의장을 체포했고, 그는 두 명의 용의자들이 한양병원에 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그 젊은이는 신일준이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암살자의 배후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김구의 추종자다. 그는 전문적인 청년 지도자이며, 민주의원의 성원이었다.

이 보고서와 관련해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에 대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로마의 삼두정치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며, 그들은 목표도 다르다. 그들은 개인적, 정치적 애정 없이 제한적으로 연합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고 있다고 서로 믿고 있다.

삼두정치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은 각각 다른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보호받으며, 또는 서로 간의 동의에 의해 희생되기도 한다. 김구가 (친일 경력을 갖고 있었던) 김성수나 그의 동료들에게 몇 달 동안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구를 따랐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과격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극우 보수의 선봉대 또는 돌격대라고 할까? 이들 중 일부는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청부 살인 업자들이었던 것 같다. 시키는 사람이 좌익만 아니라면, 누구든 돈만 준다면, 그리고 사후 신분만 보장해준다면, 암살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구가 암살당했을 때 처음 나온 주장은 자신의 추종자에 의해서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만나기 위해서 경교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낯이 익은 안두희의 방문에 김구의 경호원들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김구와 관련된 조직에 가입한 적도 있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김구가 있던 경교장 2층으로 가서 김구를 암살했다. 오랫동안 김구의 암살을 계획한 흔적들이 보인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안두희는 김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으며, 오히려 김구를 '여순 사건을 조정한 빨갱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김구가 빨갱이라니! 타이완의 장제스(장개석)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과 미군 CIC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₁ 안두희는 김구를 '좌파'로 매도했다.

……

이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치가들의 암살범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출옥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안두희는 출옥 이후에도 호의호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덕수의 암살범은 현역 경찰이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암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버치)는 김성수에 대한 암살 시도와 장덕수의 암살이 11월 30일 이승만의 늦은 동의의 결과였다고 보며, 김성수의 정당이 이승만으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이승만이 알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장덕수가 이승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

나는 처음 암살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암살이 좌파에 의해서 실행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왜냐하면 장덕수는 좌파의 정적들 중 얼마 되지 않는 (이론과 신념이) 확고한 지식인이었다. 장덕수의 죽음이 좌파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제 이러한 가정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암살을 했다는 것은 과도정부의 한국인 관료들을 놀라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암살자들은 장덕수의 부인에게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울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체포된 후 완전히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경찰에)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테러의 배후로 이승만이 언급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으로 인해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항상 첫 번째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의 지원하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기 6개월 전의 상황이었다. 송진우와 여운형은 암살당했고, 김규식의 리더십은 약했다. 이제 남은 지도자는 장덕수와 이승만밖에 없었다. 1948년 3월 5일 버치를 만난 장택상은 "장덕수의 가장 큰 실수는 이승만을 자주 만났다는 것이다. 장덕수는 경멸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고, 이것이 바로 이승만이 그를 심각하게 증오하는 이유"라고 말했다.(버치 문서 Box 3)

……

...갑자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기 시작했고,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12월 11일 장택상은 추가적인 암살 시도에 대해 언급했다. 테러리스트 그룹을 통제하는 것은 다섯 사람이다. 김구, 조소앙, 조완구, 조경한, 엄항섭, 김석황은 이 리스트에는 없지만, 김구의 충실한 추종자다. 김석황 역시 황해도 출신으로 김구의 가장 가까운 신임을 받는 사람이다. 암살 대상은 김규식, 안재홍, 조병옥, 김성수, 그리고 그 자신(장택상)이라고 한다.

 

갑자기 암살의 배후가 김구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재판을 빨리 진행해서 암살범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김구 역시 일급살인 혐의로 기소가 가능할 것이다. 이는 미국에게 유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김구를 미국의 도구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역시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다. 이승만 그룹의 불법적 강찰 행위가 근절되다면, 한국은 진정 사령관과 협조적이며 국제 상황에 그 필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치 그룹들에 의해 재탄생할 것이다.

김구가 순교자가 될 것이라는 염려도 있지만, 그럴 리가 없다. 한국인의 기질은 순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많은 한국인들은 김구의 제거를 환영할 것이다.(이상「장덕수의 암살」, 1947년 12월 12일, 버치 문서 Box 1)

 

냄새가 진동한다. 김구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아닌가? 미군정의 법원은 김구에게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청했다. 김구는 당연히 이를 일축했다. 미군정은 김구에게 법정에 나와 달라는 트루만 대통령 명의의 소환장을 전달했다.(『경향신문』,1948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이 아직 독립정부도 세우지 않은 조그만 지역에서 일어난 한 살인 사건의 재판에 늙은 정치인 하나를 세우기 위해 본인 명의의 '소환장'을 보낸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결국 김구는 법정에 섰다.

미군정은 김구를 일급 살인 협의로 기소하고 이것이 소련과의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던 김구를 소련은 비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에 김구가 있는 것으로 몰고 갔던 것은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가 정치적으로 가져올 파장을 축소하기 위해 김구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가능하려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여 그를 몰아세우는 시점이 최소한 1948년 2월 이후가 되어야 했다. 김구가 남한만의 선거에 불참을 선언하고 남북협상의 제안과 참여를 결정한 것이 1948년 2월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문서는 1947년 12월에 입안되었다. 그렇다면 김구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고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버치 문서에 있는 미군정의 '김구 깎아내리기' 계획은 이미 1948년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제안하기 전이며, 남한에서의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전이었다.

 

김구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점점 더 떨어질 것이다. 장덕수 사건에 대한 김구의 유죄가 분명해질 것이다.(「김석황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 1948년 1월 22일, 버치 문서 Box 2)

 

이제 새로운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장덕수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 남은 지도자는 이승만과 김구밖에 없다. 만약 38선 이남의 미군정 통치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한다면 가장 인기 있는 두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것이다. 둘 다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했을까?

그 선택은 미군정이 해야만 하는 선택이 아닐 수도 있었다. 미군정이 해체되고 미군이 떠난 후 38선 이남 지역에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배 그룹의 선택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바로 경찰과 관료, 그리고 자산가들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김구가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었을까? 1948년 1월 22일 문서를 보면 김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김석황의 편지를 "이승만을 위하여" 신문사에 공개한 것은 경기도 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수사 기밀을 언론에 유출하는 기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승만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의 정치적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희망 섞인 말을 했고, 더 이상 잠재적 중요성을 갖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계속 남아 있는 사실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만은 아직도 김구의 영향력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귀한 지위에 위협이 되는 김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 실행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날짜와 제목 미상의, 김구의 법정 출석 직후 작성된 문서. 버치 문서 Box 4)

 

김구의 암살은 장덕수 암살 사건 직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위의 문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작성된 문서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고, 개인적 차원의 범죄도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₁『한겨레신문』2001년 9월 5일.

- 112 ~ 121쪽 -

 

1946년 가을, 대구에서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미군정은 이를 '추수폭동'이라고 불렀다.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미군정의 쌀 수집에 반대하는 농민과 시민들의 집단행동이 발생한 것이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이 시위 도중에 사망했다. 박상희의 딸은 김종필과 결혼했다. 박상희의 친구인 황태성은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를 만나러 왔다가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미군정은 당황했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한국을 지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립 정부를 세우러 왔는데,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전 세계적으로 지원해야 할 곳이 많은데, 그 와중에 중요도가 떨어지는 한국에서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도와주고 뺨 맞는 꼴인가? 미군정은 이 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

조사 결과 이 사건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첫째로 쌀 수집 문제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쟁 시기에 강제로 쌀을 걷어갔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자유시장 정책을 쌀 수급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한국인들은 이제 쌀 공출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자유시장이 시작되자 다음 해 봄에 차익을 노린 일부 몰지각한 상인들에 의해 매점매석이 시작되었고, 쌀의 심각한 공급 부족과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미군정은 다시 쌀 수집을 시작했다. 공급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

또 하나의 이유는 친일 경찰의 문제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 노릇을 했던 경찰들이 해방 공간에서 다시 권력을 휘두르면서 쌀 수집에 나섰던 것이다. 38선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쫓겨난 친일 경찰들 역시 38선 이남에 자리잡았다. 미국으로서는 친일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경찰로서의 업무 능력이 채용의 가장 큰 기준이 되었다. 특히 반공 정책이 필요했던 미군정의 이해관계와 독립운동을 했던 공산주의자들을 공비共匪로 때려잡으면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경찰의 경험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때 그 유명한 프로잡Pro-Job, 프로잽Pro-Jap 논쟁이 나오기도 했다. 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일본 제국주의에 복무한 경찰은 '친일의 프로잽'이 아니라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프로잡'이라고 주장했다. 직분에 충실히 종사하는 과정에서 붉어진 독립운동가 탄압 문제를 모든 경찰에 적용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개도 웃을 말이었다.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할 수 있는가? 물론 총독부 직원이었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친일파로 간주하면 안 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군수 군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강진 군수였던 윤길중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과 일본 제국군 장교의 경우에는 일반 하위 관료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어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경찰들의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중도파나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문제였다.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수시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 경찰은 암살범들과 그 배후를 조사하는 것보다 여운형이 타고 있었던 차의 운전기사와 경호원을 체포 조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버치 문서 Box 3~4)

이런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미군정의 제안에 대해 김규식이 "이승만 계열이 경찰과 공무원들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지지자들이 박해를 받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이 제안을 거절했던 것도 너무나 당연한 처사였다.(「김규식과의 만남」, 1947년 4월 8일, 버치 문서 Box 5) 김규식은 공정한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핵심에는 경찰 문제가 있었다.

……

둘째로 경찰들의 불법적인 행위였다. 특히 경찰의 힘을 이용한 강탈이 문제가 되었다.

……

아이들을 지방에 버리기도 했다.

 

경찰들이 비행소년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식을 택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 최근 주목되고 있다. 방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소년들을 도시 밖 50~60마일까지 태우고 나가 거기에 내버려두고 온다.

버치는 9월 18일 오후에 한 여인이 경찰서에서 항의하는 것을 발견했다. 꽃 가게에 갔다가 6살 된 아들을 밖에 두었는데, 나와서 보니까 경찰에 끌려가 지방으로 간 상태였다(브라운 장군에게 보낸 편지,「소수자들에 대한 경찰의 행동」,1947년 9월 30일, 버치 문서 Box 2)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경찰의 세 번째 특징이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극우 테러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경찰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왜? "반탁운동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 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버치 문서 Box 3)

- 122 ~ 131쪽 -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30일 군정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 총파업에서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경찰에게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송진우도, 여운형도, 장덕수도 모두 암살되었지만, 이들이 암살되기 이전부터 경찰의 희망은 이승만이었다. 1952년과 1953년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에서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작전을 세울 때도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군 내에도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군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에게도 믿을 수 있는 물리력은 경찰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기간 동안 진정한 의미의 '경찰국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이승만과 경찰의 관계만으로 그가 집권을 했던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김구의 조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 경력의 경찰들은 이승만과 함께 김구를 그들의 경력을 은폐할 수 있는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 때 각 지방의 경찰서에는 이승만과 김구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미군정청에서 지방 경찰서에 두 사람의 초상화를 붙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초상화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방 경찰서의 중앙 벽면에 붙어 있었다.(「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 대한 정치적 조사」, 1947년 9월 29일, 버치 문서 Box 2)

버치의 문서군에는 1946년 이후 지방의 상황 변화에 관한 다양한 문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경찰과 청년단, 그리고 정치조직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1947년 3월의 조사 문건이 가장 눈에 띈다.(1947년 3월 22일, 사령관에게 보낸「3월 5일부터 20일까지 남한 지방의 정치조직과 지도자에 대한 보고」, H. Habson, advisor, Political Analysis section, 버치 문서 Box 2) 여기에서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정당 평가를 위해서는 왜 한국의 정당이 미국과 다른가를 이해해야 한다. (1) 한국인들은 3개 또는 그 이상의 정당들이 인민에 의해 자유롭게 구성된 상황을 경험하거나 관찰했던 적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 역시 없었다. (2) 현재 한국의 정치에는 정치적 책임이 없다. 사람들과 당원들은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관리와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미군정 시대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고, 한국 사회는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정당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정치인들은 변하지 않는가?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을 이용하고, 어떤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든 잘못은 다른 정당에 돌린다.

……

한국에서 미군정이 수립되었던 1945년 9월, 하지 사령관의 정치 담당 고문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사항은 해외에서 교육받은, 그러나 친일의 오명이 있는 소수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국무부 장관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2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지방에서의 상황은 더더욱 그랬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사실은 미군 관계자들이 한국의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또는 무시)하다는 사실이며, 일반적인 미국 정치의 순진함과 언어적 장벽에 의해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군정 관리들은 우리 지역에서는 정치적 행위가 없다고 알려주거나 공산주의자들을 눌렀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5개월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사라졌고, 한국인 관리, 사업가, 정치인들에 대한 조사와 토론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온 미국인 관리가 자신들과 그들의 조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우쭐해 했다.

 

1946년 가을의 '추수봉기'는 지방에서 좌우익 사이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상황을 조사한 대부분의 문서들을 1947년 이후 우익 세력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46년 가을의 봉기는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사 표시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각 지역에서의 좌파 조직이 대부분 노출되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수배되었으며, 일부 좌파 신문들은 발간이 금지되었다. 박헌영을 포함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38선 이북으로 도피했다.

 

100명 정도의 한국 정치인과 사업가들, 50명의 미군정 관리, 그리고 많은 노동자, 농민들과 인터뷰를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다.

우익의 생각은, (1) 지금 독립을 원하며, 러시아인들이 미국인들처럼 신탁통치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반탁운동을 강하게 하고 있다. (2) 만약 군정이 현재의 정부를 망명 임시정부에게 넘긴다면, 현재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있지만, 이 정부는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고, 이 그룹에 의해 조심스러운 계몽이 있은 후에 자유선거가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가 북한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한다. (3) 우익은 북쪽의 50만 군대를 걱정하고 있으며, 미군이 러시아로 하여금 그 군대를 해체하거나 비슷한 규모의 남한군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우익은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이다. 그들은 미군들이 한국인들을 배신했다고 느끼고 있다.

 

운동장이 우익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좌익에 대한 얘기는 없다. 단지 북한에 50만의 군대가 있다는 가짜 뉴스만이 돌고 있다. 1950년 북한이 남침을 할 때도 북한 군대의 규모는 15만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주목되는 점은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크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서 임시정부는 김구 한 사람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아니었다. 이승만과 김규식 역시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지방에서는 "한국민주당 코트"라는 농담이 있는데 좋은 털을 목에 두른 코트를 말한다. 이것은 부자들이 일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의 38선 이남에서 첫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

이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유일하게 정당으로서 참여했다. 해방 정국을 호령했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독립당, 국민당 등은 개인적인 참여를 제외하고는 정당 차원에서는 모두 불참했다. 한국민주당이 이 선거에서 프리미엄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역시 이를 기대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을 미군정이 뼈아파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군정 시기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미국에 우호적인 의원내각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우익의 고집쟁이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한국민주당은 참패했다. 득표율은 12.17%에 그쳤으며 전체 200석 가운데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한민당은 유일한 정당이었고 다수당이었지만, 전체 의석의 2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를 주도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민주당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상이 중요했다. 즉,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자산가들이 그 중심이라고 여겨졌다. '한민당 코트'는 지방에서의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초기 한국민주당에는 김병로와 이인, 김약수와 원세훈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₁해방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한국민주당이라는 공간에서 친일 경력의 인사들과 손잡은 이유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당내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민주당은 계속 친일파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정당 마케팅이 실패한 것인가?

한국민주당은 우익이었고, 이승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세력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한국민주당이 이승만과 갈라선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민주당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승만의 정치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한 지도자, 한국민주당은 친일 부자들의 정당, 특히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는 '한민당 코트'라는 용어가 서울이 아닌 지방을 조사하는 문건에서 나왔다는 점은 1948년의 선거 결과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₁박태균,「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국사관논총』58, 1994.

- 132 ~ 138쪽 -

->이승만과 김구 모두 3·1운동 이후 한반도 전역의 사람들에게 조선의 법통을 이었다고 받아들여진 임시정부의 지도자였기에 해방 후 정치활동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국가들은 예외 없이 독재를 경험했다. 이는 결코 그들이 원했던 체제가 아니었지만, 식민지와 냉전은 독재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비정상적 사회 구조는 식민지에서 "분열시켜 지배하기divide and rule"라는 정책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이로 인해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은 예외 없이 독재 체제가 형성되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동화와 배제' 정책은 한 국가나 지역 내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이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 사회의 모습 사이에 큰 편차를 만들어냈다. ...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제국에 편입되면서 나타났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되었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든 간에 그 결과가 '근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모습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원을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식민지적 근대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던 대도시, 그리고 전통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지방 사이의 차이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

대부분의 연구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실상 독재 체제가 어떻게 지속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지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1945년 이후 제국이 무너지면서 한국을 비롯해 많은 신생국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예외 없이 미국이나 유럽식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직능이나 계층을 중심으로 대표를 뽑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인구수가 기준이 되어 보통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 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도시보다 지방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지방 분권이 존재하지 않는 신생국에서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가 갑자기 도입되자, 농촌을 비롯한 비도시권이 정치적으로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는 시점에서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

...근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사례로 드는 대도시의 모습보다 전통 시대로부터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시기의 억압과 모순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지방 사회의 모습이 당시 한국 사회의 더 일반적인 구조였다. 왜냐하면 당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대도시가 아닌 농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독립촉성국민회는 가장 잘 조직된 정당으로 성원도 가장 많고 영향력도 크다. 모든 지역과 타운town에서 지부가 발견된다. 단지 제주도에서만 그 영향력이 약하다. 또한 전라남도에서도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 편이다. 독촉 청년회는 도시에서도 활발하며 우익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에 책임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당이 아니고 애국 조직이라고 말한다.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하느냐고 했을 때 그들은 답변하지 않았다.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은 독촉이 비정치적 성격을 보이는 곳에서 강하다. 한국독립당은 광복재건회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농민과 노동자의 조직은 작고 약하다. '대한(노총)'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과 철도 중심지인 대전과 대구에서 싸우고 있다. 애국부인회는 조직과 성원을 늘려가고 있다.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다.(1947년 3월 22일, 사령관에게 보낸「3월 5일부터 20일까지 남한 지방의 정치조직과 지도자에 대한 보고」, 버치 문서 Box 2)

 

이승만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은 암살당하거나 월북하거나 김구나 김규식처럼 1948년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불참했다. ...이승만은 비록 미군정과 불화를 빚고 있었지만, 지방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고 있었다. 정병준이『우남 이승만 연구』(543~563쪽)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1946년 5월의 지방 순회 이후 그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고, 이는 위의 보고서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1989년 천안문사건으로 위기에 빠졌던 덩샤오핑이 1992년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과 중국공산당의 권력을 재확인했던 상황을 보는 듯하다.

인민위원회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던 좌익으로 기울어졌던 운동장은 1946년 대구 경북 지역에서 발생한 소위 '추수폭동(대구항쟁)'을 통해 우익으로 현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우익의 우위 속에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던 운동장은 경찰과 청년 단체의 적극적 활동으로 다시 이승만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1947년 초의 상황이었고, 미군정의 지방 정세 보고에 의하면 같은 해 가을이 되면 비도시 지역은 거의 이승만 지지 세력에게 장악되었다.

 

익산군의 경우 청년단이 매우 활동적이며,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른 정치조직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단과 공무원과 경찰은 연합적으로 일하는 집단이다. (중략)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지역은 극우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다. 다른 그룹은 보이지 않았다.(미군정 공보처,「전라북도에 대한 세 번째 현지 조사」, 1947년 8월 20일부터 25일까지, 버치 문서 Box 2)

 

순천의 검사장에 의하면, 이승만 그룹의 리더가 송광면에서 우익의 반대파인 장인숙을 납치해서 20일간 창고에 구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략) 이승만과 김구의 조직들은 민족청년단, 광복청년단, 서북청년단, 그리고 경찰 등 4개 조직을 돕고 있다. 청년단은 광주에 사설 감옥을 갖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구금하고 있다. 서북청년단은 광주, 목포, 순천, 여수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 이들은 주로 좌익에 반대하면서 경찰의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서북청년단은 광주에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을 자신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적산관리청에서 이들에게 나가라고 했지만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재는 이승만 그룹이 완전히 장악했다. 이승만을 반대하는 우파들은 거의 다 제거되었다.(「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 대한 정치적 조사」, 버치 문서 Box 2)

 

이승만 그룹에게 있어서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좌파로 여겨지고 있으며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이승만 그룹의 힘은 정읍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주로 법원 판사와 검찰에 의해서 그 힘이 드러나고 있다. 10개의 정당 사무실이 타운town에 있는데 9개가 이승만, 1개가 김성수 소속이다. 김성수의 조직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군산도 1946년 10월 이후 이승만 쪽으로 기울었다. 민족청년단과 서북청년단의 세력이 가장 크다. 전주의 미국 경찰 고문인 퍼거슨은 그의 통역관이 그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토마스 캠벨,「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전라북도 상황: 이리, 군산, 남원, 정읍」, 버치 문서 Box 2)

 

이승만을 중심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한국의 운동장은 미군정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방국 중 신생독립국가에 대해서 내용에 관계없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강조하고 있었던 미국이었기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던 지방의 상황은 보통선거 실시라는 조건 하에서 미군정 역시 손쓸 수 없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미군정 조사관 스스로 이렇게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정당들이 적산을 본부로 사용해야 하는가? 서북청년단이 적산을 사용해야 하는가? 경찰이 광복청년단과 서북청년단, 그리고 민족청년단을 정보원으로 써야 하는가? 이승만과 김구의 사진과 어록이 모든 경찰서에 붙어 있어야 하는가?(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 대한 정치적 조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0년 선거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관권이 개입하기 힘든 도시 지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표가 나올 여지가 있었지만, 감시의 눈이 미치지 않는 비도시 지역은 경찰과 공무원, 그리고 청년단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강고한 카르텔이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여촌야도與村野都란 말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 139 ~ 148쪽 -

 

해방 직후 많은 청년단이 있었지만, 그중 서북청년단은 지금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서북이라 함은 한반도의 서북쪽 평안도 지역을 가리킨다. ...

서북 지역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시대부터 특징이 있었다. 중국의 북경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중국과의 사이에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정보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지역이었다. 또한 중국을 거쳐서 들어오는 기독교가 일찍부터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에 비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이 넓었기 때문에 지주-소작인의 계층 관계도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선진 정보가 들어오는 곳이면서 유산 계층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교육열이 높았다. 19세기 초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지역적 특징과 관련이 있었다. 교육열도 높고 가르칠 돈도 있는데, 이 지역 출신은 과거에 합격해도 고위 관료로 성장하지 못했다. 높은 경제력과 교육열에 비하여 사족이 없는 지역이 평안도였다.₁...

해방 후 서북 지역에는 비상이 걸렸다. 소련군이 들어온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업자본이 융성하고, 지주도 적지 않으며, 기독교가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숭실과 오산처럼 역사 깊은 기독교 학교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때문이며, 김일성의 외가가 기독교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지역적 특징과 관련이 있었다. 소작인들이 주가 되는 농민조합이 활발했던 남쪽을 소련군이, 기독교인과 상업자본가가 많았던 북쪽을 미군이 점령했다면, 해방 직후의 소용돌이가 심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북쪽에서 이들에게 소련군이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남한에서는 이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서북청년단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아무런 물적, 지적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다양한 청년단이 경찰의 비호 속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미군정도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47년의 지방 조사를 통해 이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한 조사에 들어갔다. 미군정의 지방 조사 중 서북청년단의 임원 한 사람을 경주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

답변에는 논란의 여지가 컸다. 조사관이 먼저 만난 사람은 모두 서북이 아닌 지역에서 왔거나 해당 지역의 청년들이었다. 서북 출신의 청년들만으로 전국적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유권자를 데리고 투표소에 간다는 것이다. 투표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서북은 분명 스스로를 민병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히틀러의 브라운 셔츠₂와 KKK를 합친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주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20명의 이상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연설에 의해서 변화를 얻을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먹과 무기가 가장 효과적인 타입이었다. 그들과의 문답에서 중학 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단지 소학교를 다녔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부잣집의 아들이거나 성공한 집안의 자손은 없었다. 북한에서 그들은 머슴 일을 했을 뿐이다. 그들은 정치적 이익보다는 경제적 이유를 위해 남한에 온 것이 맹백했다.

 

어찌 보면 조사관도 편견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겉모습을 보고, 단지 몇 마디를 나누어본 후 그는 모여 있는 청년들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는 듯한 보고서를 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집안 출신의 청년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지주와 기독교인들이 주로 월남했다는 기존의 연구는 잘못된 것인가? 그들은 설득이나 통제가 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청년단은 25세 이하의 열혈 청년들을 정치적으로 세뇌시키고 이용하려고 했다. 어쩌면 그들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피해자들일 수 있었다.

 

...광복청년단은 서북의 친구 조직이다. 모든 광복 성원들은 38선 이남 출신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서북 본부가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 광복과 서북은 가까운 연결과 협조를 유지하고 있다. (중략) 우리가 인터뷰를 한 경찰, 검찰, 판사들은 모두 서북과 광복에 호의적이었고, 그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영덕 검사는 "서북은 진정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공짜로 길을 고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지역의 조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서북청년단은 대부분 20~26세 사이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북에서 내려왔는데, 직업이 없으며 앞으로도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없다. 최광준(29세)은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테러리즘의 행동은 필요하다. 어떠한 민주주의도 피 없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희 미국도 전쟁이 있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대전에 서북이 400명 있다. 이들은 주로 경찰 정보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경북과 전북의 기지로 대전을 이용하고 있다. 서산에서는 서북이 매우 강하다. 30명의 서북 대원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 모두 수원 사람들이다.(「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 대한 정치적 조사

 

청년단에 대한 조사는 마치 미군정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제3자로서, 오히려 이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2017년 미국에서 블레인 하든의『스파이의 왕King of Spies』이라는 흥미로운 저서가 발간되었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리울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첩보 부대 책임자 니콜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승만의 지원으로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 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니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버치는 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까? 일부러 감춘 것일까? 버치가 활동하고 있었던 정치 고문단과 군 정보국(CIC), 그리고 미 공군 소속 니콜스의 첩보 부대는 서로 분리된 활동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버치의 문서군 속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에 대해 다른 부서에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보국이나 첩보 부대의 활동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버치의 정치 고문단에게는 오히려 포섭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버치의 문서군에 있는 청년단 관련 문서들은 마치 제3자의 입장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실상은 문서의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버치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₁오수창,「조선후기 경상도, 평안도 지역차별의 비교」,『역사비평』59호, 2002.

₂나치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가 브라운색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에 브라운 셔츠라고 불렸다. 무솔리니의 준군사 조직이었던 검은 셔츠와 대비하여 브라운 셔츠로 불렸다고 한다.

- 149 ~ 158쪽 -

 

청산 지역의 경우는 해방 직후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친일 부역자와 지식 청년들, 그리고 농민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일제의 강압 때문에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농촌에 내려가 다양한 형태의 계몽운동을 했다. 소비조합도 만들도 농민조합도 만들면서 식민지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던 지주들로부터 농민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당연히 해방 이후 해당 지역 건국준비위원회와 자치위원회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소설『태백산맥』의 주인공인 김범우도 이러한 범주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친일 지주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의 청년과 농민들은 해방 이후 친일 지주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지주들의 땅을 몰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편파적인 지주-소작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미군정이 시행한 3.7제 소작료도 철저하게 시행하고자 했다. 소작료도 마음대로 하고 비료값마저 소작인에게 전가하면서 이들을 머슴같이 부리던 지주들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결코 편안할 수 없었다.

……

친일 지주는 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청년단을 불러들였다. 서북청년단과 광복청년단이었다. 이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 조용했던 마을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

건의서를 작성한 권태석은,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에 따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마치 소설『태백산맥』에 나오는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아마도 해방 직후 대부분 지역에서 이런 갈등과 테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좌익을 척결한다는 명분하에 중도적인 인사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지역에서 계몽 사업을 했던 지식인들이 모두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훗날 한국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 권력은 '부역자 청산'이라는 미명하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역 사회는 재편되었고, 이는 결국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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