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의 친일파 청산
북한에서의 친일파 청산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4.03.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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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친일파를 조사하고 검거하였다

북한식 친일파 청산

남한에서 친일파 청산이 흐지부지되었다면 북한은 어떠했을까. 흔히 북한의 친일파 청산에 대하여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철저하게 처벌했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과거사 청산이란 사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도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복권되어서 북한 정권에 참여하였다. 특히 전문적인 소양이 필요한 영역일수록 쉽게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이상 그 공백은 친일파들에 의하여 메꾸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선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얘기이다.

처음부터 말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던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그나마 친일파 청산이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북한 지도자들의 의지가 더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 군정의 방침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대소 견제의 새로운 파트너로 삼은 이상 소련이 일본 잔재를 배척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만약 소련이 미국처럼 일본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활용하고 친일파들을 기용했다면 북한도 우리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어쨌든 그 과정에 우리 민족의 의지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저 미국이 하는 대로, 소련이 하는 대로 따르는 식이었다. 남의 힘으로 해방을 얻은 대가였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본 관료들과 경찰들 또한 모두 체포함으로서 북한 내에서 일제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제거해 나갔다.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취급하여 서울에 군정청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를 실시했다면 스탈린은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내세워 간접 통치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야말로 무지와 무능함을 드러내었던 하지 중장의 미 군정만큼이나 치스차코프 상장의 소 군정 또한 북한의 사정에 어둡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압적인 통치로 남한을 파산과 기아로 내몰았던 반면, 소련은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소련군이 상전 노릇을 하면서 간섭을 일삼기는 했지만, 남한의 정치 세력들이 미 군정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명목상의 자문 이외에는 아무런 권력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에 비하여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행정과 치안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북한이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빨리 혼란을 극복하여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1945년 10월에는 각 도 인민위원회 산하에 보안대가 창설되어 치안을 담당하였다. 보안대의 주된 역할 중 하나가 친일파 검거였다.

1945년 10월 12일 치스차코프 상장은 "북한 지역에서 일본 침략주의의 잔존을 영원히 근절시킨다."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친일파들을 단죄하겠다는 의미였다. 미국과 달리, 소련이 친일파 청산을 지지하는 이상 북한의 정치 세력들이 여기에 소극적일 이유는 없었다. 이들에게 친일파는 당연히 처벌되어 마땅한 존재였다. 문제는 "누가 친일파인가?"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규정하여 처벌해야 하는가. 누군가를 친일파로 낙인 찍어서 인민 재판에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친일파 단죄를 빌미로 사적인 보복과 마녀 사냥에 악용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해방 직후에는 흥분한 군중에 의하여 친일 경찰과 관리들에 대한 습격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1945년 8월 16일부터 25일까지 조선 총독부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전국에서 21명이 살해되고 6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18명이 구타를 당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친일 경찰과 면 사무소 직원들이었다. 군중들은 무법 상태에서 친일파들을 잡아다가 가마니를 뒤집어 씌운 다음 때려죽였다. 이런 모습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치안이 확립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더이상 군중에 의한 마녀 사냥 식 인민 재판이 아니라 사법 기관에 의한 법 규정에 따른 재판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는 말로는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 범주와 처벌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보다 오히려 관용을 강조했다. 친일파에 대한 규정은 애매하였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많았다. 설령 일제시대에 관리였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주변에서 증명할 수 있다면 친일파에서 제외하며 재산도 몰수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1946년 1월 31일 평양에서 열린 전국농민조합 북조선연맹 결성 대회에서 "일제 시기에 행정과 사법을 맡았던 관리라고 해도 인민 주권 수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여 보복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조선신민당 당수였던 김두봉 역시 "민중에게 큰 해를 끼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 일본의 고압에 이기지 못하여 소극적으로 복종한 사람, 생계를 위하여 하급 관리로 일한 사람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의 입장도 "관청에서 사무나 본 따위들에게는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라는 쪽이었다. 당장 김일성 자신만 하더라도 동생 김영주가 관동군 밑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기에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김영주는 해방 직후 형의 도움으로 모스크바로 가서 철저하게 옛 경력을 세탁한 다음 북한으로 돌아와 중책을 맡았고 나중에 부수상까지 오르게 된다.

1946년 9월 5일 <북조선 면, 군, 시 및 도 인민위원회 위원의 선거에 관한 규정>을 포고하면서 친일파의 선거권을 박탈하였다. 여기서 규정된 친일파는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와 고문, 조선인 도의회 의원, 조선 총독부 및 도 책임자로 근무했던 자, 경찰과 검사국, 재판소의 책임자로 근무했던 자, 자발적으로 일본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을 생산하거나 경제 자원을 지원한 자, 친일 단체의 지도자였다.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고관대작들이었다. 그러한 고위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무엇을 했던 것에 충분히 친일파로 볼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 규정에 따라서 실제로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전체 460만명의 유권자 중에서 겨우 575명에 불과하였다. 다음해 2월의 선거에서는 오히려 420명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단순히 일제 시대에 관리를 지냈다는 것만으로 모조리 민족 반역자로 규정해서는 안되며 구체적인 행적을 살피고 "민족을 위하여 특별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면 처벌의 예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북한 지도부의 입장이었다. 1947년 7월에는 위의 규정에 더하여 "일본군에 복무한 장교"와 "변절자"들이 친일파 대상에 추가되었다. 즉, 북한에서 말하는 친일파는 조선 총독부의 고관대작 이외에 경찰, 사법기관, 군인, 친일 단체 지도자, 군수업자, 변절자들이 해당되었다. 그 이외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부칙에는 "설령 위의 규정의 해당되는 친일파라고 해도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거나 건국 사업에 적극 협력하는 자는 그 죄를 감면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였다.

북한에서 정한 친일파의 범주는 남한의 제헌 국회가 정한 반민족처벌법에서 규정한 것보다도 훨씬 관대했고 그 범주 또한 좁았다. 이것은 서로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민중에 의하여 보복적인 친일파 청산이 진행된 북한은 오히려 이들에 대한 처벌보다 용서를 강조하여 민심을 달래야 하는 입장이었다. 친일파들 중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전문 지식과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무작정 원칙론만 내세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었다가는 정작 필요한 인재마저 확보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친일파 청산은 하되, 김일성 정권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인민의 용서를 받았다는 명목으로 얼마든지 친일파 명단에서 제외시켜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 북한의 친일파 청산, 분단 고착에 일조하다

남한의 친일파 청산이 미 군정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비호 아래 친일파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아예 손도 댈 수 없었던 반면,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정권의 필요에 따라서 지극히 자의적으로 진행되었다. 누가 친일파이고 친일파가 아니며 어느 수위에서 처벌할 지는 권력 가진 자들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또한 이들에 대한 처벌 역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철저한 조사와 증거를 토대로 일관성 있게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일부 악질 친일파들을 군중 앞에 세운 뒤 인민 재판을 하는 식으로 처벌하는 등 일종의 민심 달래기에 가까웠다. 많은 친일파들과 그 가족들이 선거권과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격리되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후손들 역시 연좌되어 친일파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 정책으로 재산을 모두 잃고 남한으로 탈출한 친일파들도 많았다. 소련 군정이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남한으로 도주한 숫자는 8만4천여명에 달하였다. 이들 전부가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소련과 북한 또한 체제의 불만 세력인 이들이 38선 이남으로 탈출하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남한은 친일파들의 배출구가 된 셈이었다. 이렇게 남한에 정착한 친일파들은 극도의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의 정치적 전위대가 되어서 남한의 좌파 세력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남한 사회를 극우화된 사회로 만들었다. 진짜 공산주의자만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거나 불만을 품는 자, 친일 문제를 거론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죄다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 남북한의 정치 구조를 재편하면서 서로의 증오심을 부추기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셈이었다.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지만 그 청산의 대상이 반드시 친일에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다. 즉, 친일파가 아닌 사람들조차 친일로 몰렸다는 얘기이다. 미국과 소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를 열고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논의하였다. 이것은 얄타 회담에서 이미 정해진 바였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두쪽으로 나뉘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졌다. 원래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쪽은 미국이었고 스탈린은 오히려 즉각적인 독립에 찬성했지만 이 때에 오면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미 군정을 맡고 있던 하지 중장은 한반도에서 좌파 세력이 우파 세력보다 훨씬 강력한 상황에서 은근히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한의 친미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데 소련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왜곡하여 우파 세력들을 자극하였다. 소련은 정반대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친일 반소 세력으로 몰아서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소련의 수탈에 반발하는 자들, 소련군을 적대하는 자들, 체제를 비판하는 자들도 죄다 친일 반동으로 규정되었다. 국가 권력에 저항하면 그게 곧 친일이고, 반동이라는 논리였다. 1946년에는 8,926명이, 1947년에는 12,838명이, 1948년에는 2,082명이 정치범으로 기소되었는데 그 중에서 친일 경력으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461명에 불과한 반면, 반소 반동으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3,171명에 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친일분자이니 반동분자이니 몰려서 체포되었지만 정작 그들 중에서 진짜 친일파는 극소수였다. 아무런 혐의도, 법률적인 근거도 없이 단지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뒤집어 씌우는 식이었다.

반대로 많은 친일파들이 일본에 협력한 죄가 경미하거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라는 명목으로 옛 경력을 지우고 북한 정권에 참여하였다. 1948년 9월 당시 북한 검사의 약 20%가 일제 시대 검사 출신이었다. 행정과 사법, 교육 등 광범위한 곳에 친일파들이 잔존하였다. 일본군 출신은 철저하게 배제했다는 북한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군 창설 초기에 박승환(만주군관학교 7기), 최창륜(일본육사 56기), 방원철(만주군관학교 1기) 등 다수의 만주군, 일본군 출신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숙청되거나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 일본군 출신이 가장 많이 포진한 곳은 공군이었다. 신의주 항공대장을 맡아서 북한 공군의 창설에 앞장섰으며 나중에 김일성에게 '공화국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던 이활은 일본 나고야 항공 학교를 졸업한 대표적인 일본군 출신이었다. 이활 이외에도 최현옥, 허민국, 현용서 등 북한 공군의 수뇌부 중에는 다수의 일본군 출신들이 있었다. 인재가 부족했던 북한 공군으로서는 이들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북한 정권 초기에 참여한 친일파들의 상당수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순분자로 규정되어 대거 숙청되었다.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확보하게 되면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친일파 숙청은 김일성의 일인 독재와 결부되어 1960년대까지 꾸준히 진행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과거의 경력을 철저하게 지우는데 성공하거나 정권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다.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란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니라 김일성의 필요에 따라서 남길 놈과 제거할 놈으로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친일과는 상관없지만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불만 분자들에 대해서도 친일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모조리 숙청하였다. 남한에서 "빨갱이"가 지울 수 없는 낙인이라면 북한에서는 "친일"이 그러했다.

* 처벌은 아니라도 반성은 있어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해방 당시 조선인 엘리트 계층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는 좌파 지식인들의 생각과 달리, 북한 또한 친일파들을 무조건 숙청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활용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또한 나라를 잃고 일본의 지배에 철저하게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승자가 패자를 단죄하는 것만이 반드시 능사는 아니며 지난 과오를 대승적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또한 또 다른 방식의 과거 청산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운형, 송진우 등 당시 명망 있는 국내파 민족주의 지도자들조차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과도 손을 잡으려 하였고 친일파들을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임정을 향하여 "해외에 있던 자들이 국내에 남아 있던 자들을 처벌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되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를 어떻게 청산할 것이며 누구를 단죄하고 용서할지는 사회적인 합의를 충분히 거친 뒤의 일이지, 소수의 권력자가 국민을 무시한 채 권력의 필요에 따라서 정치 야합으로 결정한다면 화합은 커녕 도리어 더 큰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사 문제를 놓고 극심한 대립과 진영 싸움이 벌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인도처럼 지배자로부터 협상을 거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주권을 양여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의 지배 체제는 하루 아침에 흔들리고 친일파들 또한 공황 상태에 빠져서 보복을 우려하여 숨거나 달아났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은 우리가 아닌 미-소가 차지하였다. 소 군정은 명목상이나마 조선인 자치조직을 존중하고 구 체제의 청산에 나섰지만 미 군정은 기존 통치 구조를 그대로 활용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덕분에 친일파들은 친미파로 둔갑하여 미 군정에 재빨리 순응한 반면, 끝까지 미 군정에 비타협주의를 고수한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반미 친소 세력으로 몰려서 혹독한 탄압을 받고 북한으로 달아나야 했다. 우파 진영 또한 찬탁과 반탁, 통일과 분단을 놓고 분열되었다. 제헌 선거 최대 승자는 이승만을 비롯한 가장 호전적인 극우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에 빌붙은 친일파들이었다. 이들이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남한 사회에서 친일파 청산의 목소리는 나올 수 조차 없었다.

그나마 북한은 청산의 시늉이라도 하면서 친일파들을 선별적으로 단죄하고 용서했다면 우리는 그조차 하지 못한 채 아예 일제 36년이라는 역사 자체가 없었던 일인양 지우는 쪽을 선택하였다. 일제 시대에 조선 총독부와 결탁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던 자들은 해방 이후 일본의 빈자리를 차지하여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남한 제헌 국회가 뒤늦게나마 반민족특별법의 제정을 강행한 것 또한 친일파들의 득세와 북한의 친일파 청산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체제의 정통성 경쟁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고 있던 극우 진영과 친일파들은 미-소 냉전의 격화를 이용하여 반공 이념을 '전가의 보도'인양 휘둘렸고 권력의 두꺼운 벽 앞에서 과거사 청산은 흐지부지될 수 밖에 없었다.

친일파들은 독재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남한 사회의 주류층이 되었고 식민지 시대의 잔재 또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았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병영 문화이다. 우리 군대가 미군에 의하여 만들어졌는데도 막상 인권 의식의 부재나 사적인 구타, 갑질 문화 등 구 일본군의 병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도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군의 핵심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친일파들은 학계와 재계, 언론계, 문화, 예술, 관료 계층, 군대 등 곳곳에 자리잡았지만 의외로 정치권에 진출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정치를 하다보면 아무래도 자기 집안의 불편한 내력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보니 어지간히 감투에 눈이 멀지 않는 한,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여론의 방패 막이로 삼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다. 단적으로, 김무성 씨만 하더라도 친일 단체의 지도자였던 부친의 친일 경력이 뒤늦게 논란이 되자 "괜히 내가 정치를 한다고 해서 이런 곤욕을 치룬다."라는 것이 그 양반의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부친을 대신하여 사죄한다거나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정치를 안하겠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더라.

혹자는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남한은 고도 성장에 성공했고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데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승자인가,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잘 살고 북한은 못 사는 이유가 친일파를 청산하고 말고와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일으킨 한강의 기적이 친일파들의 도움 없이는 결코 불가능했다는 말인가. 우리같은 대다수 국민들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서 친일파이 만든 성과에 단물만 빨아 먹는 기생충같은 존재란 말인가. 오히려 친일파에 대한 면죄부는 국가 기강을 무너뜨림으로서 한국 현대사를 왜곡시켰고 우리 사회 지도층들의 모럴 해저드를 확산시켰으며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을 초래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창씨 개명하면 친일파이고 일본말 하면 친일파이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면 친일파이니 당시에 조선 사람치고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항변한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는 전형적인 논점 일탈이다. 반민족 행위 특별법에는 친일파에 대한 정의와 처벌 대상이 엄연히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 총독부에서 고관 대작을 지낸 자, 일본과 결탁하여 경술 국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 독립 운동가들을 악의적으로 박해했던 악질 형사, 친일 단체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자, 친일 관리로서 그 죄질이 매우 악질적인 자 등 일본의 강압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민족을 팔아먹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대가를 받는 등 인류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도저히 변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아무나 싸잡아서 친일파가 아니다.

많은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받고 건국 공신이 되어서 온갖 특권과 함께 부의 대물림을 하는 반면, 독립 운동가들은 독재 권력과 결탁했던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는 철저하게 배제당한 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비영리 독립 언론인 뉴스 타파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 운동가 후손의 3/4가 월 200만원도 벌지 못하고 있으며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우리 사회의 냉소적인 말이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국난이 닥쳤을 때 누가 싸울 것인가.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에게 불편한 역사에 대해서는 잊기를 강요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우리의 해방자이며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 또한 미국의 은덕이므로 어디 감히 비판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게는 미국이 그야말로 구세주일지 몰라도 역사의 피해자들 또한 엄연히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침묵과 망각을 강요할 권리가 누구한테 있다는 말인가.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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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1, 정병준 외,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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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남북한의 공군력 인식과 한국전쟁 준비과정, 김경록, 2008

북한 공군 창설과정을 통해 본 식민지 유산의 연속과 단절, 김선호, 2012

북한의 친일파 청산(북한바로알기), 홍민,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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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북한에서는 어떻게 되었나, 김창순, 1994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 북한에서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김창순,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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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북한의 과거청산(1945~1948), 전현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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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북한 보안국의 조직과 활동, 김선호,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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