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형상으로 오시다(창세기 18장 1 ~ 5절)
사람의 형상으로 오시다(창세기 18장 1 ~ 5절)
  • 김용창
  • 승인 2018.06.1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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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 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세기 17장에서 지난시간 우리가 본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에 방문하신 일이 17장에 기록되었는데 또 다시 18장에 역시 또 기록한 내용이 비슷한 시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17장 방문 있은 후에 18장 방문까지가 1년이나 시간이 걸린 것 같지가 않고 그의 같은 시기에 방문한 이야기를 쓰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17장 보시면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기록도 있고 18장 10절에 보면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는데 그러면 같은 한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두 가지로 전례된 것인지 따로 예를 들어서 17장 방문이 있은 후에 몇 개월 안에 또 오셨다는 이야기 인지 어떻든 그 한해 안에 있었든 일입니다. 같은 해에 99세 때에 그 이듬해는 아들이 태어나니까 그런 이야기가 필요 없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이른 내용도 보면 아마도 아브라함 집에 방문한 이야기가 두 가지로 구전으로 내려온 겁니다. 두 가지 이야기가 그런데 어느 하나도 우리가 창세기 1장 창조기사와 2장 창조기사가 많이 다른데 그걸 섞어서 편집을 하지 않고 둘 다 버릴 수 없어서 그냥 나란히 배열한 것처럼 17장 방문기사와 18장 방문기사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 졌는데 약간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한곳에 섞어서 재편집을 한 게 아니라 두 가지 구전된 전승을 나란히 배열한 것 같다.

문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글쎄 한 번 더 오시고 그 해 안에 한 번 더 오시고 그럴 수 있지만은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요. 아들 있다는 얘기를 한번 했으면 되었지 두 번 와서 하실 리는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든 마르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오셨다는데 마르레가 어디냐면 헤브론 쪽에서 약 3킬로 남짓 데는 멀지않은 곳인데 거기는 아브라함도 거기 살았던 적인 있고 이삭도 헤브론 마르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를 뛰고 있는 그런 팔레스타인 지역이 대체로 더운 지역입니다. 덥기 때문에 서늘한 곳을 찾아가려면 표고가 높은 쪽으로 가야 되요. 해발 600-700고지가 넘어야 그런 데로 사람이 살만하다 하는 곳이고 평지는 더워서 살기가 힘드니까 꼭 그 도시가 800-700 그런 산꼭대기에 도시가 발달합니다. 헤브론은 근 1,000미터 가까이 되는 높은 곳에 있고 예루살렘도 780고지 좀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거기가 아브라함이 사는 곳이 지금 우리 개념으로 하면 동네에 우리는 살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산다든지 할 때는 동네에 사는 경우는 많지 않고 외딴 천막입니다. 외딴곳에 따로 천막 한 채만 있는 겁예요. 장막에. 오래있지도 못하고 양떼가 많고 풀밭은 제안되고 하면 또 옮겨가고 이렇게 하는데 자기 집 장막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 손님 왔으면 지나가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기 집에 온 사람인 거죠. 그래서 동네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 장막 한 개만 있는데 사람 셋이 오니까 우리 집에 오셨는가 보다고 볼 수도 있고 거기가 길목이라면 지나가시는 가보다 이런 정도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내 집에 오셨는데 그냥 지나가지 마옵시고 들어오시면 제가 물을 가져 올 테니까 발을 씻으시고 또 요기 할 것을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지난번에 아브라함에 덕목을 이야기 할 때 말씀드렸죠. 손님 대접하기를 잘 했다. 그런데 이거는 아브라함만 마음이 있어 되는 게 아니야, 사라가 즐거워해야 되고 종들이야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마는 사라에게 가서 6절에 보면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세 스아라는 것은 아마도 한 스아가 한 사람분의 빵이 되는가 봐요. 그러니까 세 사람이 왔기 때문에 삼명분의 가루를 가지고 반죽을 하여 떡이라고 했는데 빵인 거죠.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장막 뒤쪽에 그늘이 있어서 손님을 모시고 장막 안에서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 그런 구조 같아요.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생리가 끝났다는 거예요.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속으로 어떻게 웃는 거예요? 속으로 한번 웃어 봐요. 속으로 비웃었다는 게 이분들이 아직은 셋이 하나님과 천사라는 의식이 없거든요. 어떻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냥 대접을 했으면 드시고 가시지 저렇게 빈말을 하시나, 내가 생리가 끊어진 것도 모르고 하시는 것 보다.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러 번 말씀하시는 거든 요. 그러면 그때까지는 애기를 가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는 얘기죠. 다시 말하면 입덧도 그런 것도 없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사라가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는 거 보면 그렇다면 99세 때 아까 17장에 나타났던 것도 100살에 있을 거니까 시기가 같아요. 그의 다 방문한 시점이 18장 방문과 17장 방문이 그의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이기 때문에 그래야 말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한번 방문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인지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승되는데 구전으로 왜냐하면 이런 얘기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옵니다. 처음부터 노트에 받아 적은 것이 아니고 구전으로, 구전으로 내려오는데 족장 가문에는 글자 없을 당시에는 양치는 지팡이가 제법 길어요. 한길 넘어 정도로 양들이 멀리가면 사용해야 되니까, 그런 지팡이에다가 자기 가족 역사를 그림으로 새겨 놓아요. 그런 식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면서 계속 입에서 입으로 후손 대대로 전승되는 그런 스타일로 창세기 기사들이 오랫동안 전승 되다가 지금 현재 모습으로 기록된 거는 에스라 때 기록된 걸로 보기 때문에 두 가지 전승으로 내려온 것 같다는 거죠.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통 거짓말은 아니죠. “겉으로 웃지 않았으니까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속으로 웃어서 네가 무섭다.” 하나님하고 사라 사이에 웃었다 웃지 안했다 승강이 하는 것처럼.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이렇게 그냥 가 버릴 줄 알았는데 17절에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에게는 이야기를 해야지, 뭔가 일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틀어놓아야겠다. 아브라함에게는 알게 해야겠다는 뜻 인데.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 택한 목적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자식과 권속들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다. 여러분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야, 모든 하나님 백성들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하나님 백성들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선택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 우리는 그저 맨 날 믿음으로 구원받아 고치겠다. 이렇게 습관화 되어 있는데 근본 원 개념, 택한 목적의 원 개념은 여기 창세기 18장 19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믿음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

의와 공도는 대게 공평하고 정의로운 윤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공평하고 정직한 윤리를 행하지 아니한다. 하면은 참 신앙생활이 아니다. 맨 날 우리는 오직 믿음 오직 믿음 하면서 그냥 교회만 다니고 예수 믿고 세례만 받으면 끝나는 걸로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이 말은 좀 번역이 여러 번역을 대조해 봤는데도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탄원하는 누군가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하는 그런 것이 컸다는 말인지 아니면 어떤 번역은 소돔 안에서 그렇게 소돔의 악한 죄악 때문에 거기서 눌린 사람들, 억압된 사람들의 비명 절규 같은 그런 부르짖음이 크다. 양쪽으로 다 해석할 수 문젠데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히브리어라는 언어가 우리 언어와 다르기 때문에 하여간 그곳은 악이 너무 크고 죄가 중하고 거기서 들리는 소리가 기도소리든 절규하는 소리든 간에 하나님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르짖음이 크다. 그래서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꼭 내려가서 봐야 압니까? 그냥 하늘에서 모르실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것은 아까 우리가 시편 89편에서 읽은 데로 주의 성실하심에 기인한다. 안와 봐도 아시죠. 전지전능한 분이 그것을 모르겠어요. 그러나 확인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 안가 봐도 다 알아, 안 가보는 것은 성실하다고 할 수 없어요. 가서 실제로 그런지 가본다.

여러분 가끔 우리가 이번에 포항지진이나 아니면 제천에 화재 사건이나 뉴스 보면 알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마는 그래도 총리나 대통령 이런 분이들이 뉴스 봐도 알지마는 직접 가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도 그 성실하심 때문에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지마는 직접 또 가서 보신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말씀하시고 그 내용을 대충 들었을 때 아브라함 심중에는 두 가지가 이제 확실한 거죠. 소돔, 고모라가 악하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모를 리가 없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내려오셨다. 내려오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봐도 소돔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성읍에서 악한 사람들이야 심판받아 마땅하지마는 그 중에 의인이 있다면 의인도 함께 멸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뜻을 품하는 거죠.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만일 그 성에 의로운 사람 50명이 있으면 그들도 함께 다 죽어야 되는지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게 아니지 이렇게 여쭈어 보는 겁니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소돔, 고모라 성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10명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볼 때 제법 의로워 보여도 그런 의가 대부분 위선이거나 별거 아니야, 어떤 사람은 죄 짓는 게 서툴러서 다 들통 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죄를 더 크게 짓고도 잘 넘어간 것뿐이지 아니면 교양이라는 포장으로 약간 포장을 한 것뿐이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정말 의로운 사람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해요. 평화롭고 좋을 때는 모르는데 교회나 총회나 사회나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고 이해관계가 걸리고 그럴 때 보면 사람이 교양 속에 감추었던 본색이 막 드러나요.

저는 노회에 가서 목사, 장로만 모인 데에서도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래서‘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곁으로 하루, 이틀 봐서 잘 몰라요. 33절 보면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 심중에 실제로 의인 50이나 40이나 있다고 안다는 것이 아니죠. 만일이라고 갖다 부치고 하는데 그 배후에는 롯을 좀 생각하는 거죠. 자기 조카 롯. 그러니까 참아 아브라함도 염치가 있어서 그런지 내 조카 롯, 그 말은 못해요. 그 말은 못하지만 나중에 소돔성이 망할 때 보면 소돔성을 엎어시는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지라 멸망시키시는 중에 롯을 내 보셨더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꼭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님 알아 들어시는 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 그런 분 아닙니다. 그렇게 말 귀를 못 알아듣는 그런 분이 아니고 아브라함 중심에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니는 거예요. 기도가 염치가 있잖아요. 차마 내 조카 롯 그 말은 못했어요. 못했지만은 하나님은 아브라함 속에 무슨 말이 남아있는지 아신다는 거예요.

성경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관계 속에서 오고 가는 대화나 기도나 혹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 참 인격적이 시다. 하나님이 아주 젠 틀 하시고 지극히 인격적이시다. 그런 면면을 여러 군데에서 보게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이렇게 매달리는 모습을 어디서도 볼 수 없어요. 자기 조카 롯이 점점 소돔 문화에 젖어 들어가는데 롯은 들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 롯의 아내와 딸들이 점점 소돔 문화에 젖어가는 거예요. 그것은 이게 지금 2,000년이니까 이 소돔, 고모라 사건은 약4,000년 전 이야기거든요.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확실히 이 세상 문화에 잘 젖어드는 사람들이 여성들인 것 같습니다. 또 여성들은 어떻든 도시 문화에 젖어 살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소돔, 고모라에 롯은 소돔문화에 물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내와 딸들이 그러니까 세상 적이고 도시문화를 좋아하고 지금도 똑같아요. 별 차이가 없어요. 여기 산청에는 농촌이고 산촌이고 그러니까 논, 밭에 일들이 많은 곳이고 농업 노동이 굉장히 극심한 곳이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우리가 한 17-18살, 20살 안팎 그럴 때 청년들이 다 나갔습니다. 농촌에 남아있는 남자들 몇 사람은 있어요. 지금도 우리 고향 가면 내 친구들이고 나하고 동갑내기 사람들인데 그의 농촌 지키고 있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는 한명도 없고 다 도시로 갔어요.

우리 때는 나가도 들어가도 결혼도 하고 했는데 지금도 농촌에 남아 있는 총각들은 결혼을 못해요. 다 도시로 가버리고 하도 안 되니까 월남사람, 중국사람 수입해 와야 해요 처녀를. 그렇게 여성들은 도시 문화에 매료되는가 봐요. 남자도 그런 면이 있지마는 저는 모르겠어요. 촌놈이라 그런지 도시문화라는 것에 처음에는 와 하다가 얼마 안가서 매력이 없어요. 아무리 봐도 아무른 매력을 못 느껴요. 지금보다 더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꽃이 피고 해야지 시멘트 콘크리트 문화에 어떻게 살아간다는 건지 저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돼요 지금도.

여기 와서 에스라 근방에서 2-3년 3-4년 살아보신 분들은 대게 같은 말합니다. “목사님 도시에 가봤는데 정말 못살겠어요.”힘들다는 거요. 그리고 너무 시끄러워, 서울에 가서 보니까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전부 큰 소리 치고 다니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바빠서 정신이 없는 거예요.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거기서 어떻게 정신을 차리는지 그런데도 저는 여성들이 참 담대하다. 우리는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데.

여러분 소돔, 고모라에 살고 있든 롯과 그 아내, 딸들이 물들어서 나중에 19장에 보면 알겠지마는 롯은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그 아내하고 딸들은 결국 못 빠져 나와요. 딸은 빠져나왔지만은 나중에 타락하게 되고 어떻든 소돔, 고모라에 살아서 롯이 아내는 잃어버렸고 딸들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그래서 결국은 모압과 암몬 족속이 되고 말았는데 그 죄 얼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거예요. 여간 정신 차리지 않고는 세상문화 속에서 자기 영혼을 지키기 쉽지 않다.

여러분 창세기 18장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 일가친척이나 누구 또 소돔, 고모라 문화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봐야 돼요. 그리고 지금 우리사회는 그 소돔,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해가고 있고 변질되어가고 있고 윤리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도시생활 속에 경건한 사람도 혹 있지마는 문란한 사람들에 이야기는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날 소도,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인 인격이 형성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 우리 기독교는 자녀 교육에 실패합니다. 유대교는 이방선교나 이런 것은 잘 못해요. 유대인들이. 그런데 수직선교, 종적인 선교, 자기자녀 손자손녀로 내려오는 가족, 자녀선교는 확실히 하거든요. 그래서 유대교인으로 태어나서 유대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가는 일은 그의 없다시피 합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고 탈무드를 가르치고 하는 것만큼은 완벽하게 해요.

반면에 우리 기독교는 해외까지 선교를 가는데 자기 자녀선교를 못해요. 대부분 자녀들이 불경건한 쪽으로 갑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고 커닝하고 남에 리포트, 논문 빼기고 하는 이런 사람은 전부 목사, 장로 자녀들이야, 아주 뺀질뺀질 못되고 공부도 안하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실컷 놀다가 기도실로 가요. 공부를 안했는데 기도한다고 실력이 나옵니까, 떨어지면 또 교수에게 가는 거야, 무릎 꿇고 학점을 받아내는 거죠.

그래서 자녀교육을 거의 다 실패를 해요. 이것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문화 자체가 정착이 안됐고 또 교회에서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없고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인격도 안 되거나 실력이 안 되거나 그래서 어설프게 하는 주일학교에 거기다가 맡겨놓으면 되는 걸로. 전혀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돼버린 거예요.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인데 이게 꼭 하나님을 믿데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믿으면 좋겠는데 꼭 롯의 가정처럼 비슷하게 돼요. 오늘 기독교인들의 신앙 상태가 은근히 롯의 가정하고 같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가정 같지 않고 롯의 가정하고 비슷하다.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럽도 다 실패했고 기독교는, 미국도 실패했고 한국도 여지없이 똑같이 실패합니다. 자녀교육이 안돼요.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예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경을 읽어주는 정도 가지고 안 되고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길이 없나? 아이들하고 부모가 성경공부를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데 그것을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거든요 지금도 그의 아버지가 가르치고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랍비에게 물어요. 우리는 묻는 게 없는 문화예요. 교회에서도 묻지 않고 학교에서도 질문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거든 요. 유대인들이 머리가 나빠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부지런히 묻고 또 랍비가 묻고 학교에 가서도 묻고 끝없이 질문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창세기 18장에서 혹시라도 우리가정에 신앙상태가 롯의 가정처럼 되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믿는다 할지라도 어머니하고 딸들이, 자녀들이 롯의 자녀들처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참 심각한 문제야, 그래서 어려서부터 우리엄마 우리아빠는 성경에 도사들이다. 이런 신뢰를 가지고 가정에서 엄마, 아빠에게 성경을 묻도록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될 텐데 너무 오랫동안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안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2018년도에는 창세기 18장을 생각해 보시도록 우리가정이 혹시라도 롯의 가정처럼 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깊이 각성하고 늦었지만은 여러분 우리교회 성도들이라 해서 마음이 나태해서 샤론교회에만 다니면 다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서 성경이야기가 계속되는 그런 변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영주에 갔을 때 영주반산교회 담임목사님이 우리교단인데 자기가 에스라 성경강좌를 알게 된 것은 자기 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처음에 형은 형이기도 하고 신학을 했고 목사가 되었고 동생은 동생이기도 하고 신학도 안한 주제에 만나면 성경이야기를 꺼내서 형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거야, 곤욕스럽게 하고 형이 아는 게 잘못됐었다. 틀렸다. 그런데 대게 기분 나쁜데 형이 그래도 가끔 맞는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날 때 마다 싸움이 벌어지고 성경강좌 말하지 마라, 목사라는 사람이 동생보고 이렇게 할 정도로 맨 날 다투었는데 한해 두해 한 게 아니고 여러 해 명절 때마다 집안사람이 말릴 정도로 싸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싸우면서 들어도 하도 많이 들으니까 한번 들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래서 보나마나 불법 시디인데 들어 보았다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반발하던 그 연장선상에서 속으로 반발하다고 하다가 들리고 보이고 하니까 ‘이것 봐라, 이것 봐라’하면서 목사님이 변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 부터는 성경이 열리고 보이면서는 형제가 만나면 다른 일가친척들은 다 저리가라하고 둘이서 성경가지고 얼마나 희희낙락을 하고 둘이 좋아하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둘만 똘똘 뭉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최근에 동생 되는 분도 신학을 시작 한 거예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래서 지난 1월 1일 집회에 동생 되는 분이 왔더라고요. 신학을 시작했는데 여기 온 거예요.

그래서 가족끼리도 모이면 다른 걸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성경을 깊이 있게 서로 대화하고 질문하고 피차 가르치고 이런 게 되어야 돼 가족들이. 명절이 곧 구정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도 자꾸 쉬쉬하고 피할게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이야기 하는 그런 분위기로 가야 되는데 이게 하도 익숙하지 않아서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안하면 일가친척이나 자녀나 가족이나 할 것 없이 성경강좌에 참여 하도록 더러 권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 완전 불신자를 전도할 때도 여기 성경강좌에 한번 참석하도록 권해 보세요. 최고의 전도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여러 분, 교회 발도 대보지 않은 분들이 여기 4박5일 참여하고 완전히 거듭나서 정상 신앙으로 오래 믿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그런 케이스를 많이 보거든요.

우리 저기 마산서 오시는 뒤에 앉아 계시는 분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전혀 교회 안다녀 보셨는데 누가 꼭 가보라 해서 제가 전에 얘기 한번 한 것 같아요. 마산에서 마산제일극장하든 극장주인의 아들인데 마산 창동에다가 피자집을 엄청나게 규모 있게 했어요. 인테리어만 11억을 들어서 인테리어를 했어 피자집을 했는데 이탈리아 최고의 브랜드‘ 루메롱 우노’라고 하는 그런 간판을 걸어놓고 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오는 것 같더니 얼마 있다가 하루에 피자 10판도 안 팔리는 거예요. 인건비하며 인테리어하고 신협에서 대출을 내었는데 어떻게 돼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회복 안 되서 정말 인생에 파탄이 나버릴 정도로 그 사람이 피자집을 개업할 때 잘 아시죠.“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착 붙여놓고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꾸로 시작은 창대했는데 나중에 아주 미약하게 되어서 피자 열판도 안 팔리고 인테리어를 너무 잘해놓으니까 피자 먹는 사람이 얼마나 비싸나 해서 목에 안 넘어가요 겁이 나서 그래서 팔리겠어요. 그래서 11억 빚을 안고 결국은 갚지 못하고 파산했을 겁니다. 그러고 있다가 누군가가 제가 강의한 성경강좌 그때는 카세트테이프 이걸 담아 보냈는데 그때 24개가 되었어요 90분으로. 듣다가 다 들어가는데 다 듣고 나면 목사님 찾아뵀겠습니다. 전화가 왔더라고요. “안보고 믿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다. 오지마시라.”그랬더니 기어이 왔어요.

올 때 자기가 상상을 했데요.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니까 키가 짤막하고, 깡말라가지고 대게 깐깐한 그런 분 일거다 하고 날 만나면 끌어안고 울어버린다고 그러고 왔는데 키가 너무 커서 울어 버리지도 못하고 전혀 음성하고 모습하고 매칭이 안되어서 어리바리 하다가 울도 못하고 넘어갔어요. 강의 중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은 잘못 된 거다. 전부 자기보고 한 말인 것 같더래요.

저보고 종이에다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고 힘을 다하여 너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저것을 써 주시면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시작은 창대하리라.”떼 내고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붙여놓고 하고 싶다고 제가 미쳐 못써드렸어요. 내가 마음이 좀 준비가 되고 하면 붓글씨로 써서 드리겠다. 했더니 결국 못 기다리고 자기 본 교회 돌아가서 김기현 목사 문창교회 담임목사에게 써달라고 했는데 목사님이 만년필로 쓰더라고요. 만년필로 써서 자기 카운터에 놓고 그렇게 정말 하나님을 이기적으로 믿었던 잘못된 신앙을 내려놓고 정말 이제는 장사가 안 되어도 내가 그랬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장사가 망해도 품위 있게 해야 된다.

그래서 ‘루메롱 우노’피자집 문 닫을 때 패업 예배를 피자를 많이 구워서 했다는 거예요. 망할 때도 예수 믿는 사람은 품위 있게 망해야 된다. 그래서 예수 믿고 피자집이 쫄딱 망했지만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래도 그때부터 열심히 전도했는데 이 사람은 병원에 냄새, 공기, 분위가가 싫어서 일가친척이 아파도 병원방문 잘 안하는 사람인데 성경강좌 듣고 변화되어서 병원전도를 일을 삼고 다니면서 그래서 많은 사람을 전도해요 지금도.

그러나 가정은 얼핏 들었는데 이혼해버리고 부인이 도망가 버리고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힘을 다해 전도하는 거예요. 나보다 훨씬 더 낫다. 그렇게 지금도 열심히 전도해요.

여러분 우리가 2018년도에 우리가정들이 자치하면은 아브라함 가정하고 두 가정을 지금 보여주는 거든 요. 아브라함은 중보 하는 가정, 롯의 가정은 중보를 통해서 겨우 혼자 구원받고 딸들도 교육도 제대로 못하고 아내도 잃어버리고 이런 가정도 다 하나님 믿기는 믿는 가정들입니다. 그러나 소돔 땅에 오래 사는 동안에 롯의 가정은 변질되었다는 거예요. 혹시 우리가정들이 아브라함 가정처럼 되지 않고 롯의 가정처럼 세속문화에 물들어 가는 게 아닌가? 또 자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게 아니가 깊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2018년도 두 번째 주일에 주님에 전에 와서 하나님 말씀 들어볼 때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헤야 할 텐데 소돔 문화 속에 우리 자녀들이 혹은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게 하옵시고 다시 우리가 가정에 경건과 신앙이 회복되어서 다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정들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또 전도하는 그런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드리고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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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2020-08-31 00:29:56
아멘~! 창세기 18장 2절에서 언급된 세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의 사자인지 궁금해서 검색해서 들어왔는데 좋은 말씀 듣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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