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한다고?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한다고?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3.12.2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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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그 건물은 양민학살 기념관이 될 것이다.

서울 빼고 거의 다 죽였다.

이승만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 국민보도연맹 사건

▲ 전남 신안 비금도 명사십리의 함평 민간인 집단학살지 표지석 ⓒ 윤태옥

 
2.5킬로미터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눈높이로는 고요하지만 생생한 수평선이 유혹하는 바다, 수평선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얇은 옷자락을 하늘하늘 흔들어대는 풍경. 얕게 밀려오는 파도는 끊임없이 모래를 핥고,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감미로운 노래를 부를 것 같은 해변. 이 아름다운 풍경은 전남 신안군의 비금도 명사십리다. 비금도는 도초도와 함께 목포에서 흑산도로 가는 길목에 방파제처럼 자리잡고 있다.

2022년 봄, 6개월 만에 다시 명사십리를 찾았다. 지난번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갯바위 쪽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검은 돌 비석이었다. 비문을 읽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가 2013년에 세운 '함평민간인 집단학살지 표지석'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천천히 읽어갔다. 

1950년 7월 13일 이 앞바다로 나온 전남경찰의 경비정 금강호에서 함평군 민간인 수십 명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군경이 집단학살하고 수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하나였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을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학살로 인정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1기 2005~2010년, 2020년부터 2기)는 2009년 진실을 규명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불법적인 학살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 어디쯤에선가, 흔들리는 경비정에서 손을 뒤로 묶인 장정 수십 명이 총에 맞고 피를 흘리며 바다에 버려지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명사십리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뒤집어진다. 참혹하다.

죄도 모른 채 죽은 사람들... 역사 속 '인종청소'와 뭐가 다른가
 

진실화해위원회가 몇 년에 걸쳐, 당시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피해자와 수십 년 동안 입도 뻥끗하지 못하던 유가족, 군경 측에서 근무했던 사람들과 그 외의 참고인들의 구술을 받고 많은 문헌기록들을 조사해 재구성한 함평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이랬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후 일군의 무장대가 함평군에 왔다. 주민 일부가 합세해 불갑산, 군유산 등지를 거점으로 빨치산으로 활동했고, 군경이 토벌에 나섰다. 주민들은 밤에는 빨치산에게, 낮에는 토벌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상황이 계속됐으나 1949년 겨울에 이르러 빨치산은 거의 토벌됐다.

1949년 검찰과 경찰이 주도해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당사자와 가족 친인척은 물론 그에 동조했거나, 밥 한 끼, 쌀 한 자루 도운 사람들까지 가입시켰다. 이들은 자수하면 용서해준다는 경찰의 강압적인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함평경찰은 관내 보도연맹원 등을 예비검속해 경찰서와 함평여중(현재의 함평교육청 자리)의 강당에 구금했다. 예비검속이란 지금 죄가 없지만 나중에 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니 미리 구금한다는, 일제의 악법이었다.

ⓒ 박종현

 
1차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13일 목포형무소로 이송됐다. 끌려간 이들은 징역을 살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밤 비금도 바다로 끌려가 경비정에서 총살된 후 바다로 던져졌다. 2차는 7월 21일 학교면의 얼음재에서, 3차는 7월 23일 나산면의 넙태라는 곳에서 집단으로 처형됐다.

3차 학살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함평여중에 구금됐다가 트럭에 태워졌고, 12대의 트럭이 넙태에 도착하는 대로 3인1조로 걷게 하고는 함평의 경찰과 해군목포기지사령부 군인들이 등 뒤에서 사격을 했다는 것이다. 함평경찰은 1950년 7월 23일 황급히 집단처형을 하고 완도 쪽으로 후퇴했다. 넙태와 얼음재에서 처형된 사람은 시신이나마 수습했으나 비금도 바다에 수장당한 사람들은 그마저도 수습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현재까지 115명이다. 사건발생 후 50년이나 지난 다음에 조사를 해서 겨우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만 그렇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이들은 무슨 죄로 처형을 당한 것일까. 형무소에 구금되지 않았으니 이들은 무죄였다. 이들이 처형당한 이유는 보도연맹원이기 때문이었다. 보도연맹원이란 뜻은, 과거에 좌익이었거나, 좌익의 가족 친인척이었거나, 좌익 활동에 크든 작든 연루된 사람들이었으나,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전향해서 '양심서'까지 썼고, 국가도 이를 인정해서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사람들이다. 일부 식량이나 비료 배급에 혜택을 준다고 해서 머릿수 채우기로 가입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애초에 경중을 따질 만한 사법적인 죄가 없었으나 예비검속을 했고 어떤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했다. 사법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으로 학살이란 처벌을 받은 것이다. 외신으로 접하면서 끔찍하다고 혀를 찼던 내전학살과 인종청소 또는 역사책에서나 읽었던 악마적인 종교전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적국의 군인도 전쟁 중에 살아서 잡히면 포로로 대우한다. 적국의 국민이라고 해도 직접 적대행위를 하지 않으면 공격하지는 않는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도 자국 내 일본인을 수용소에 수용하긴 했으나 이들을 처형하진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자국민을 학살했다.

'좌익' 낙인 없애려 가입했는데, 그대로 '죽음'의 낙인이 됐다
     

▲ 코발트광산에선 광산의 수직갱 앞에 사람을 세우고는 총을 쏜 뒤에 지하로 밀어 넣었다. ⓒ 윤태옥

 
보도연맹 사건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서부터 일제의 패망과 미소 강대국의 분할점령, 그리고 건국과 그 이후까지 지속돼 온 좌우갈등의 비극의 하나다. 임시정부 수립기에는 당장 독립운동의 방략이 서로 달라서 대립이 했지만, 새로 세우는 국가를 사회주의로 할 것인가 자본주의로 할 것인가를 두고 좌우가 대립했다. 반일세력을 한데 모아 대항하자는 유일당 운동도 좌우갈등으로 좌초됐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인지 공산당인지에 따라 갈렸다.

일제가 패망하자 분할점령이 됐고, 미국이냐 소련이냐는 살벌한 진영논리에 따라 좌우갈등이 남북갈등으로 굳어갔다. 여기에 친일파를 어느 정도 용인할 것이냐는 논쟁도 결합되고, 결국에는 이승만인가 김일성인가 하는, 대단히 배타적이고 부당한 선택을 강요했다.

갈등은 곳곳에서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1946년 정판사 조작사건과 대구 10월사건에 이어 1948년에는 제주4.3사건과 10.19여순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후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군에서부터 소위 좌익색출을 벌였다.

군대뿐이 아니었다. 1948년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주요 신문사 7개와 통신사 1개가 폐쇄됐다. 많은 기자가 체포되고 발행인과 편집인이 추방됐다. 1948년 12월 문교부 장관은 반정부혐의자를 솎아내기 위해 각급 교육기관의 교직원 모두 상세한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지시했다. 1949년 9~10월 사이 전국에서 132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해산됐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좌익색출로 인해 형무소 수감자가 급증했다. 1946년 7월 1만7324명이었던 수감자는 다음해 8월에는 3만5119명이나 됐다. 형무소의 수용능력 1만5000명을 두 배 이상 초과했다. 그런데 수감자의 80% 정도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었다. 1949년 10월 부천형무소와 영등포형무소를 신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형무소에 사상범이 넘쳐나자 이들을 적극적으로 전향시키고, 전향한 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하기로 했다. 준비작업을 거쳐 1949년 6월 5일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선포대회를 통해 대외적으로 공포했다.
          
정부는 보도연맹을 전향자 단체라고 했으나 이 조직의 지도부는 검찰과 경찰 등 수사간부들이었다. 보도연맹은 국가가 주도한 관변단체였고, 근거법률도 없이 수사기관이 만든 임의단체였다. 보도연맹의 전체 가입자 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보도연맹을 주도한 인사들은 약 30만 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보도연맹의 가입대상은 전향자였고 실제로 초기 가입자들은 전향자가 다수였다. 그러나 권력의 상부에서 보기에는 이보다 '빨갱이'가 훨씬 많다며 질타했다. 이에 맞춰 말단 행정기관에 가입인원을 할당하자 본인의 경력이나 의사와 상관없이 반강제로 가입시키기도 했다. 비료나 배급의 혜택을 준다고 유인해 가입시키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도민증(지금의 주민등록증) 대신 보도연맹원증이 지급됐다. 완벽한 낙인이었다. 이사는 물론 외지로 출타하려면 경찰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일정한 교육을 거쳐 완전히 전향했다고 인정되면 이들을 탈퇴시키겠다고 했다. 전향자단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전향하지 않은 자들의 단체로 다룬 것이다.

실제로 탈퇴시킨 경우는 한 번뿐이었다. 서울특별시 보도연맹은 1950년 6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6928명의 탈맹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지방의 보도연맹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시군지부와 읍면지부를 계속해서 결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비료 배급 등으로 유인한 어처구니없는 가입사례가 적지 않았다. 가입하는 사람은 보도연맹을 통해 좌익 혐의를 벗는다고 기대했을 뿐 가입 자체가 처형대상이라는 낙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제주 섯알오름 예비검속자희생자 추모비 모습 ⓒ 윤태옥

 
전국 어디에나 보도연맹 학살지가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전국적이었고 그 과정은 대동소이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경찰국에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전국 요시찰인들을 구금하라는 비상통첩을 보냈다. 우선 보도연맹 간부급(갑종 또는 A급)들이 수감됐고, 인민군이 계속 남진해 오면서 나머지 보도연맹원(을종, 병종 또는 B, C급)들도 구금됐다. 구금장소로는 지서 유치장 형무소는 물론 창고나 학교의 강당까지도 사용됐다. 

예비검속 제도는 일제가 시행한 조선정치범 예비구금령(1941년 5월 5일)에서 비롯됐다. 이 법은 대표적인 악법으로 규정돼 1945년 10월 미군정이 폐지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예비검속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계엄법을 법적 근거로 한다고 해도 7월, 8일 이전에 이루어진 전국의 예비검속과 7월 21일 이전에 실행된 전라도 지역의 예비검속은 모두 불법이다. 제헌헌법 제9조에는 인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공권력 행사는 절차상의 적법성을 갖춰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도연맹원들의 예비검속은 절차적 적법성을 위배한 것임은 물론이다.

구금한 뒤에 좌익활동 경력과 사상을 심사해 분류했고, 군경이 후퇴하기 전에 일부 혹은 전부를 처형했다. 군경이 후퇴하지 않은 대구 이남의 영남에서는 장기간 구금 끝에 처형했다. 처형장소는 1차는 대개 구금장소에서 떨어진 골짜기나 바다였지만 2차, 3차는 군경의 후퇴 직전에 구금장소와 가까운 곳에서 황급하게 이루어졌다. 재판 없이 처형한 것은 예비검속보다 훨씬 위중한 헌법위반이고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다. 

ⓒ 박종현

 
얼마나 많은 곳에서 보도연맹 학살이 이루어졌을까. 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보면서 보도연맹 학살이 확인된 시와 군을 지도에 빨간 점으로 체크해봤다. 형무소 재소자 학살이나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발생한 소위 부역자 학살이 아닌, 국군이 남으로 밀리면서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만 표시했다. 모두 107개의 빨간 점이 지도를 벌겋게 덮었다.

서쪽에서 태안·서산·당진·평택·안성·홍성·원주·횡성·영월·봉화·울진을 잇는 선 아래로는 빨간 표시가 가득 찼다. 이 선 북쪽에서는 시흥(안양) 한 곳에서만 보도연맹 학살이 확인됐다. 서울과 경기 중북부, 강원 중북부는 전황이 급박해보도연맹 학살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피란에 급급했던 것이다. 반면에 인민군이 점령하지 않았고 군경이 후퇴하지 않은 영남 지역은 단 한 곳도 예외 없이 학살이 집행됐다. 

그런데 보도연맹 학살 표시가 없는 시군은 아산·천안·진안·순창·구례의 다섯 곳이다. 이 가운데 구례는 학살을 하지 않은 게 확인돼 있다.

▲ 안종삼 구례경찰서장 동상 ⓒ 윤태옥

 
당시 구례경찰서장 안종삼은 인민군이 남원까지 남진해오자 이미 구금된 보도연맹원 수백 명을 사살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안종삼은 7월 14일 오전 11시 수감자 전원을 경찰서 뒷마당에 모이게 한 뒤 "내가 반역으로 몰려 죽는다면 나의 혼이 480명 각자의 가슴에 들어가 지킬 것이니 새사람이 돼 주십시오"라고 당부하고는 전원 방면했다. 이런 내력으로 그의 동상이 지금 구례경찰서에 세워져 있다. 참혹한 역사를 읽으며 목이 타는 순간 한 모금의 샘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다시 내가 그린 어설픈 학살지도를 보면, 전국 어느 시군이든 보도연맹 학살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당시의 참혹한 학살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역사유적지로 조성됐다. 내가 명사십리에서 우연히 보게 된 함평사건 피해자들의 표지가 그렇다. 앞의 글에서 찾아본 대전의 산내 골령골도 그렇다. 경북 경산의 코발트광산도 보도연맹 학살지로 유명하다. 코발트광산에선 광산의 수직갱 앞에 사람을 세우고는 총을 쏜 뒤에 지하로 밀어 넣었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의 섯알오름에는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제주여행객을 실은 여객기가 뜨고 내리는 활주로 역시 학살의 현장이다. 활주로의 동쪽 바깥에 예비검속자위령비(제주시 용담삼동 1199)가 있을 뿐, 활주로가 돼 버린 학살지는 발굴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경남의 바다에 수장된 시신은 생각지 못한 흔적으로 남았다. 마산·통영 등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실어 바다로 나가 처형하고 수장하기도 했다. 이들 시신은 해류를 따라 대마도로 흘러갔고 대마도의 어부들은 바닷가에 떠밀려온 시신을 수습했다. 당시의 대마도 어부들에 의하면 전쟁 전에도 떠밀려왔는데(해난사고 희생자도 일부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제주4.3사건 희생자일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훨씬 많은 시신이 떠밀려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의 대마도에는 시신들을 수습한 흔적이 남아 있다. 대마도의 무연고 한국인 위령탑이 그것이다. 대마도 서쪽 오우미 마을에는 대마도해협조난자추도비가 있고, 한국전쟁 직후에 수백 구의 시신이 밀려들었던 북서쪽 사고만에는 에토 유키하루라고 하는 사람이 세운 공양탑이 있다.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이즈하라 경찰서 부근의 태평사(太平寺)에 있는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碑)는 제주4․3사건의 추모비다. 
   

▲ 보도연맹 학살지인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 윤태옥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에 세워진 희생자 추모비 ⓒ 윤태옥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기이하고 참혹한 전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것일까. 진실화해위원회(1기)가 2010년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때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5129명이다. 2기 위원회가 2020년 이후 확인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 숫자가 더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가족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조사를 신청해 확인된 숫자일 뿐 전체 숫자와는 거리가 대단히 멀다.

보도연맹원이 30만 명 정도(이것도 충분히 확인된 숫자는 아니다)였다고 하니 3분의 1만 잡아도 10만 명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다. 많은 학자들이 언급하는 숫자다. 구례의 경우 처형 대상이 480명이었으니 이를 감안해보더라도 5만 명은 훌쩍 넘을 것 같다. 이 숫자를 반으로 축소해 2~3만 명이라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전향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재판 없이 처형한 것은 부당하다. 하물며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처형한 것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정부라 하더라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국 국민이든 자국민이든 죽일 권한은 없다.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면서 반민주적 방법으로 학살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것은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었다는, 기이하고도 참혹한 한국전쟁의 단면이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갈고 갈고 닦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은 반면(反面)의 주홍글씨다.  

#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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