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땅에서의 유대인들
중국 땅에서의 유대인들
  • 에스라 발행인
  • 승인 2024.02.26 1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카이펑 유대인들과 데이비트 사순가문 이야기

현재 중국 정부는 국내 소수민족을 55개로 분류한다. 총인구의 9% 미만. 거주지는 전국토의 60%에 퍼져있다. 하지만 이는 편의상 나눈 것이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한족 거주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중국내지선교회(CIM, OMF 전신) 선교사 존 쿤(John Kuhn, 1906∼1966)은 1944년 윈난(云南)성에만 100개의 종족이 있다며 이렇게 기록했다. “(1944년) 12월 23일 우리는 100개의 종족 일람표를 만들었다. 윈난성에 100개 종족이! 그리고 그들의 3분의 2는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종족이다.” 이에 앞서 1942년에 인류학자 울프그램 에버하드(Wolfgram Eberhard, 1909∼1989)는 “2000여 년에 이르는 중국 자료를 모으고 (…) 800종족의 이방인 혹은 주변 종족들에 대한 이름들과 문화 그리고 지리학적인 자료를 편집했다”고 술회했다.


1949년 10월 신(新)중국이 들어선 뒤 400개가 넘는 종족이 중국 정부에 자신들의 종족명을 공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1956년 정부는 16개 팀을 중국 전역으로 보내 과연 그러한지 조사했다. “몇몇은 같은 종족이 다른 이름으로 언급되고, 몇몇은 한 종족 계열의 다른 분파다. 어떤 종족은 그 종족이 사는 지역명이다. 몇몇 종족은 종족명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1964년 종족 수를 183개로 조정한 데 이어 1976년 51개로 줄였다가 최종적으로 민족 분류를 55개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것만일까. 아시아 하베스트(Asia Harvest) 대표인 폴 해터웨이(Paul Hattaway)는 이에 대해 “아니오”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2000년 ‘오퍼레이션 차이나(Operation China)’ 1판을 통해 중국 내 490개 소수민족에 대한 정보와 기도제목을 제시했다.


이번 호에는 중국 정부에 의해 소수민족으로 따로 구분돼 있지 않지만 유의미한 한 민족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 유대인. 많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땅과 중국은 거리상 만만치 않은데 어떻게 중국 내 유대인이 살겠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서 “아마도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채택한 1980년대 이후나 가능할까, 중국•이스라엘 관계가 좋다 보니 최근 들어 살게 된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중국 유대인 이야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1000년이 넘는 중국의 유대인 역사와 삶은 서구학자들과 중국학자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테마였다. 중국과 유대인의 인연은 디아스포라(Diaspor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디아스포라는 요즘은 상당히 일반화됐지만 ‘흩어짐’, ‘이산’, ‘분산’이라는 뜻의 헬라어다. 비자발적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의 ‘한’이 담겨있는 상징어다. 원래는 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규율과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지칭할 때 사용됐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동북아시아와의 인연, 특히 중국과의 관계 또한 매우 깊어지게 됐다. 유대인들에게 중국은 결코 낯선 곳이 아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9장 12절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성경학자들은 여기에서 언급된 시님 땅을 중국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즉, 시님은 오늘날 중국 남부 광동(广东)성과 푸젠(福建)성 지역을 가리킨다는 것. 즉 고대 중국 대외무역기지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유대인 사이에서 중국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사야 49장에서의 시님 언급은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절, 유대인들이 중국 내에서 설령 장기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양측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구약성경 가운데 BC 6세기 무렵에 기록된 이사야서 뿐 아니라 BC 8세기 후반에 기록된 아모스서도 유대인이 중국과 상업적인 왕래가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멋진 침대, 화려한 잠자리에서 뒹구는 사마리아 사람들아.” 아모스 3장 12절이다. 여기서 화려한 잠자리는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적 표현인데 원래는 꽃을 수놓은 침구로 수 놓여진 중국제 비단을 의미한다. 이는 유대인이 중국과 비단무역을 했음을 보여준다.


1908년에 중국 간쑤(甘肃)성 둔황(敦煌)의 막고굴(천불동, 天佛洞) 유적지를 발굴한 프랑스 고고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프랑스 학회지에 “유대인이 당나라 때 비단무역을 한 기록이 페르시아어로 된 고문서에 나타나 있다”고 밝혔다. AD 878년 ‘황소(黄巢)의 난’때 광저우(广州)에서 무슬림, 유대인, 그리스도인(경교도) 등 약 12만 명이 학살됐다. 칭기즈칸 군대가 유럽 원정을 감행한 뒤 유대인들이 몽고 군대를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유대인들은 시안(西安), 신장(新疆), 시짱(西藏), 취안저우(泉州), 둔황, 광저우,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카이펑(开封) 등지에서 살았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역법인 ‘계원법(契元法)’을 사용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중국에서 살아온 역사는 매우 길다. 유대 구전에 따르면 기원전 206-221년 한(汉)나라 시대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절 유대인 무역상이 히브리어로 쓴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AD 1127년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나와 있다. 카이펑에서 살던 유대인이 예수회의 중국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만났다는 기록도 구체적으로 남아있다.

다음은 마테오 리치와 카이펑 유대인의 만남을 서술한 것이다. 1605년 6월 하순 베이징의 날씨는 폭염 그 자체였다. 29년 전 광동성을 떠나 베이징으로 온 예수회 신부 리치는 이런 날씨에 이미 적응이 된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광동의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서도 19년간 복음을 전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는 1595년 6월 사서오경(四书五经)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하는 데 큰 진전을 보였다. 명나라의 관리 쉬광치(徐光启)와 공동으로 ‘기하원본(几何原本)’의 번역까지 끝마쳤다. 기하원본은 수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에우클레이데스, 일명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번역한 것. 리치의 서가의 옆문으로 들어가면 잘 정돈된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예배당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상의 그림이, 좌우에는 어린 예수와 세례자 요한상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리치는 한 손으로는 가슴에 있는 십자가를 만지작거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롱징(龙井)차를 담은 찻잔을 들고, 양쪽 눈으로는 찻주전자에 새겨져 있는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허난(河南)성 카이펑으로부터 리치를 찾아온 한 서생의 목소리였다. 카이펑은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로 춘추전국시대의 위(魏), 5대 10국의 양(梁), 진(晋), 한, 주(周), 북송(北宋), 금(金) 등 7개 왕조의 수도였다. 명청대(明清代)에는 허난의 성도였다. 리치는 중국의 선비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여느 때처럼 리치는 카이펑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선비일거라고 여기곤 자신의 서가로 낯선 자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카이펑에서 온 선비는 그동안 그가 알았던 여느 중국 선비들과는 전혀 다른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넓고 평평한 이마에다 매부리코와 눈구멍이 움푹 들어간 모습이었다. 선비는 자신을 “아이톈(艾田)”이라고 소개했다. 리치는 선비가 후이(回)족인지 서역인인지 페르시아인인지 궁금했다. 아이톈은 여느 중국 선비 못지않은 문장을 섞어가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여러 차례 리치가 전하는 종교의 특수성에 대해 언급했다.


“당신은 천주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아십니까?” 리치가 물었다. 그러자 아이톈은 흥분한 듯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전능하신 하나님이오. 존경하는 선생님, 저는 당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한 서적을 읽었습니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라는 책입니다. 우리들은 당신과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는 무슬림이 아닙니다. 혹시 저는 당신과 같은 종교 신앙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에 리치는 매우 놀라면서 “당신들?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아이톈은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허난 카이펑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약 500∼600년 전부터 카이펑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가족이 카이펑에는 10여 가정이 넘습니다. 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당신과 같은 하나님이요.”“그럼, 예수는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십니까?” 리치가 쏜살같이 물어보았다. 아이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서가 안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 대해 흥미를 보이고 “보세요. 우리도 이 같은 단이 있는데요. 선생님, 걸려있는 그림이 리브가와 그녀의 아들인 야곱과 에서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아이톈은 예배당으로 들어가 그 그림을 보고 공손하게 절을 했다. 리치는 전대미문의 중대 발견이나 한 듯 흥분했다. “당신들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시오.” 이에 아이톈은 리치에게 카이펑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이때의 아이톈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조상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500∼600년 전, 수 세기 동안의 이주 끝에 중국 허난 카이펑에 정착하게 됐죠. 우리는 조상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했으며 우리 조상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즉, 남자 아이는 생후 8일이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남자와 여자 아이는 13살이 되면 성년식을 가집니다. 안식일이면 성결한 의식을 거행했죠. 돼지고기는 물론 소와 양고기의 넓적다리 힘살은 먹지 않습니다.”아이톈에 따르면 카이펑 유대인은 당시 후이족이라고 오해를 받았다. “우리는 후이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변의 중국인들은 우리를 후이후이(回回)족이라고 부르죠. 우리 문화에서는 남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머리에 남색 천을 쓰죠. 그러나 후이족은 머리에 하얀 천을 씁니다. 중국인들은 이 때문에 우리를 ‘남색 모자를 쓰는 후이족’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죠.”


뜻밖에 중국의 유대인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리치는 매우 분방하게 지내던 터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아이톈의 말을 확인하지 못한 채 3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1608년 리치의 나이는 56세. 정신력과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자신이 키워낸 중국 신도를 카이펑에 보내 유대인들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하지만 중국 신도가 입수한 정보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저 당시 카이펑 유대인의 개괄적인 모습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펑 유대인의 존재를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리치는 그해 3월 로마 가톨릭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중국 경내에 기독교인이 존재하고 그 역사 또한 500여 년이 넘습니다. 현재 우리는 중국 중부 허난의 카이펑에 5,6개의 기독교 가정이 있는 걸 알게 됐습니다. 비록 현재 그곳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이 몇몇에 불과하지만 유대회당은 매우 잘 보존돼 내려오고 있습니다.”


카이펑을 중심으로 1000년 넘게 거주해오던 전통적인 중국 유대인은 현재 한족으로 분류된다. 1990년 이전만 해도 중국 정부는 이들을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유대인은 종족 언어적으로 사멸됐다. 한족 문화에 완전 동화돼 그들만의 독특한 풍습이 남아있지 않다. “가난에 찌들고 다른 유대인들과의 접촉이 없이 오랫동안 고립됐다. 이 때문에 1850년 자신들의 회당을 부수고 벽돌을 팔았다”는 치욕적인 기록이 있을 뿐이다. 히브리어나 아람어 사용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전 세계 국가별 종족정보를 제공해 주는 ‘여호수아프로젝트(Joshua Project)’에 따르면 현재 중국 유대인 후예는 카이펑 등을 중심으로 중국 동부 지역에 26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무신론자는 40%, 기독교인은 30%(복음주의자 25%), 민족종교 신봉자는 20%, 무슬림은 10%에 달한다. 이는 폴 해터웨이의 ‘오퍼레이션 차이나’가 카이펑 유대인은 대부분 무신론자이고 후이족 공동체에 의해 몇몇 가정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기독교인이 없다는 기술과는 상이하다.


유대인의 중국 이주는 한 번에 이뤄진 게 아니라 여러 경로를 거쳐 이뤄졌다. 근대에 와서도 유대인들에게 중국은 결코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홍콩을 조계지로 선택한 것도, 패전 위기에 몰린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유대인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1930년대 일본이 만주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자고 제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밖에 상하이를 국제적인 도시로 끌어올리는 데도 유대인들이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상하이는 유대인의 생존공간이자 반(反)나치운동, 시온주의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즉, 1000여 년 전 카이펑 유대인들이 실크로드와 해로 등을 통해 중국 내지로 들어왔다면 근대에 들어 유대인들은 몇 차례로 나눠 상하이로 이주했다. 첫 번째는 1842년 상하이가 개항된 뒤 데이비드 사순(David Sassoon, 1792∼1864) 일가의 주도로 인도와 바그다드를 거쳐 유대인 700명이 상하이로 들어왔다. 이후 1895년부터 10년간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이 러시아 왕정을 붕괴시킨 볼셰비키 혁명과 그에 따른 인종적 박해를 피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이주했다. 1930년대 말 상하이의 러시아 유대인은 4000명을 넘어섰고 유대회당만 7곳에 달했다.


현재 상하이에는 오헬 라헬(Ohel Rachel)과 오헬 모세(Ohel Moishe) 등 2개가 남아있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호텔(Fairmont Peace Hotel, 和平饭店), 메트로폴호텔(Metropole Hotel, 新城饭店), 그로스브너하우스(Grosvenor House, JinJiang Hotel, 锦江饭店) 등 유대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건물들도 적잖다. 1999년만 해도 100명이 채 안됐던 상하이의 유대인 커뮤니티가 벌써 1500명을 넘어섰다. 앞으로 5000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나치 독일의 앞선 박해도 유대인이 비자나 여권이 필요치 않았던 상하이로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됐다. 2만 명에 달한 유대인들이 데이비드 사순, 엘리 카두리(Elly Kadoorie, 1867∼1944) 두 가문의 주도하에 무역, 은행, 부동산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중국공산당 정권이 1948년 5월 14일과 1949년 10월 1일에 차례로 세워지면서 상하이 유대인 대부분은 이스라엘 또는 미국, 호주 등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 유대인들이 1992년 이스라엘과 중국의 수교에 따라 상하이를 다시 찾고 있다. 특히 2006년 3월 조부와 부친이 중국 헤이롱장(黑龙江)성 하얼빈(哈尔滨)에 정착해 살기도 했던 에후드 올메르트가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면서 이스라엘과 중국, 유대인과 중국인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됐다. 올메르트는 “나의 절반은 중국 하얼빈 사람이다”고 할 정도로 친중국적 이었다. 그의 조부는 1917년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이주해 하얼빈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 부친은 하얼빈공대를 졸업한 뒤 중국어와 러시아어 교사로 일했다. 유언을 중국어로 남길 정도로 중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올메르트의 친형은 주중 이스라엘대사관 공사로 일하면서 하얼빈에서 이스라엘 과학기술합작시범농장, 젖소 우량종 번식센터, 화훼 공단, 농산품가공기지 등의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얼빈에는 1920년대 당시 유대인들이 2만여 명까지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도 유대인 공동묘지와 교회당, 유대인학교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올메르트 조부모의 무덤도 하얼빈 유대인 공동묘지 안에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산청군 석대로365번길 39 (에스라하우스) 유앙겔리온
  • 대표전화 : 055-972-7753
  • 팩스 : 055-972-0691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용창
  • 법인명 : 유앙겔리온
  • 제호 : 유앙겔리온
  • 등록번호 :
  • 등록일 : 2017-04-05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노우호
  • 편집인 : 엄인영
  • 후원계좌 : 우체국 610212-01-001231 에스라하우스
  • 유앙겔리온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유앙겔리온.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orbaea.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