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후예들(창세기 25장 19 ~ 23절)
이삭의 후예들(창세기 25장 19 ~ 23절)
  • 김용창
  • 승인 2018.06.2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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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 람 족속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 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네. 오늘 마태복음 서론이 너무 길어서 시간만 많이 가고 진도는 한 장 밖에 못 나갔죠. 이 마태복음이 우리를 조금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도 진도를 많이 못 나갈 것 같은데 아까 낮 예배 때 마태가 그 족보 이야기를 쓰면서 다비드라는 이름의 그 문자가 매개된 숫자로 할 때 14대라 거기에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 14대 그건 대수가 맞습니다.

그 다음에 2번째 14대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세 왕의 이름을 빼버리고 14대를 맞췄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마태복음 1장 11절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그러면서 여고냐부터 스알디엘, 스룹바벨, 아비훗 이 3번째 14대는 가만히 세어보면요 13대를 써놓고 13밖에 안 나오는데 지금 14대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니까 거기 빼먹은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거기 진짜 잘 챙기게 되면요 하나 빼먹은 사람을 집어넣으면 14대가 맞게 되는데 1사람을 빼먹고도 빼먹은 줄도 모르고 13대를 써놓고 또 14대라고 한 거란 말이에요. 이런 건 잘 안 보이죠?

성경이니까 무조건 맞겠지~ 믿습니다!! 맞을 줄로 그렇게 보니까 그냥 그걸 넘어간 것이지 자세히 집에 가서 세어 봐요. 여기 11절부터 보면은 예수님까지가 13대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마태가 빼먹은 브다야라는 그 이름을 12절에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알디엘이 브다야를 낳고 브다야가 스룹바벨을 낳았는데 그 스알디엘이 스룹바벨을 바로 낳은 것처럼 해놨잖아요. 아들도 안 낳고 손자가 바로 나온 거야. 그러니까 그걸 빼먹은 것도 또 깜빡 했는가 봐요. 그래서 이걸 누가 초창기에 필 사자, 손으로 베껴 쓴 사람의 실수였는지 모르지만 이런 족보 이야기에 2가지 고장 난 것은 2번째 14대는 세 왕을 빼먹고 14대를 맞추고 3번째 14대는 성실히 썼다면 14대가 맞는데 1사람을 빼먹고 또 14대라고 써놨습니다. 이런 고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러분 모르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누가 와서 불쑥 질문하면서 여러분에게 이거 성경이 안 맞잖아 하고 누가 따지고 덤빌 때 여러분이 모르면요 “어~거 정말 그렇네..” 그렇게 하면 아 이양반도 성경을 잘 모르는구나 하고 여러분의 실력이 의심받는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건 좀 성실히 공부를 해놔야 돼요. 뭐 좀 해서 한국 사람이 잘 안 묻습니다마는 그래도 가끔은 그런 걸 따져서 챙겨서 묻는 사람이 나온다는 거죠.

그 다음에 1장 거기 지나왔습니다만 23절에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런 것을 마태는 그저 지나치게 예언과 성취라는 공식에다가 짜 맞추려고, 하여간 구약성경에 이렇게 예언되었고 이루어졌느니라 이루어졌느니라 이루려 함이더라 이런 말을 8번이나 반복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뭐 어떻게 되어 진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의도하셨던 뜻이 이렇게 예언되었었고 이렇게 성취되었다 그걸 또 공식에다가 너무 몰입하다보니까 좀 무리한 인용을 합니다. 딱 부러진 인용이 아니고 저 같으면 그건 인용 못할 것 같은데 마태는 이런 것을 확실하지도 않은 엇비슷한 구절들을 성취되었다 이런 식으로 인용을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하는 말은 이사야 7장 14절 아하스 왕이, 한 번 찾아볼까요? 뭐 전에 설교를 들은 분도 있지만 안 들은 분도 계실 테니까 한 번 다시 복습하는 의미에서 잠깐 돌아보고 갑시다. 이사야서 7장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보면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구절을 보면 이것도 당연히 또 마태가 맞는 걸 인용을 했으리라 이렇게 보지만 엄밀히 보면 이것도 문제가 있다는 거죠. 저를 보세요. 이 이야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요 그 남 왕국 북 왕국, 이사야 시대에 남북 왕국이 갈라져 있었잖아요? 그 때에 아하스 왕이 무슨 소리를 들었냐 하면 아람나라 그 큰 나라하고 북 왕국 이스라엘의 베가하고 동맹을 맺었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자 아하스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얼마나 두려워 떨었는지 아시는 대로 유다지파는 두 지파 연합이에요. 북왕국은 열 지파에다가 아람나라까지 함께 동맹을 맺어가지고 위협적인 세력으로 다가 온다 그러면 이게 불안한 거죠.

지금 우리가 가끔 불안해하는 게 이북만 해도 위협적인데 이북과 중공이 연합을 해가지고 남한을 위협한다면 우리가 겁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자꾸 미국하고 막 이렇게 연합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겁나니까. 아니면 이북하고 소련이 또 힘을 합했다. 아니면 소련하고 중국하고 이북이 함께 힘을 합해가지고 남한을 이래 압박한다 하면 겁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이 아하스 왕이 두려워한 것은 북왕국만 해도 센 나라인데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보다 합한 게 아람나라인데 그 아람과 북왕국이 동맹을 맺었다 하니까 아하스 왕이 뭐 얼마나 떠는지 사시나무 떨듯이 했다. 여기 보세요. 7장 2절에

(이사야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더라

되게 두려워했다는 거죠.

(이사야 7: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가지고

4절 보세요. 7장 4절에

(이사야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거나 조심해.

삼가며 종용하라

좀 침착해라.

아람 왕 르신과

아람 왕은 그 당시에 시리아 왕이 르신이라는 왕이고 또

북왕국의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여러분 부지깽이 같은 것이 연기가 난다는 것은 불이 탄다는 거예요 불이 꺼졌다는 말이에요? 예? 꺼졌죠. 타면 연기가 안 나요. 그 연기 나는 거, 연기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뭐 연기도 많으면 질식할 수 있지만은 그 부지깽이가 연기 나서 사람이 질식하겠나. 그거? 그러니까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해. 겁낼 거 없다 그거죠.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거기 줄을 그어 봐요. 그 아하스 왕을 보고 아람왕이나 북 왕국 르말이야의 아들 베가가 연합해봤자 그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까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사야 7:5)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이사야 7: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아하스왕을 폐해버리고 다브엘의 아들 중에 누구를 왕을 세우자 이런 공모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사야 7:7)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그 아람하고 북 왕국이 도모하는 이 도모가 성취되지 않는다.

(이사야 7: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65년 내에 북 왕국 자체가 미래에 종국적인 그 운명이 사라질 나라를 이미 하나님 앞에 결정된 나라니 두려워할 거 없다.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해.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그러니까 제발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그렇게 두려워가지고 벌벌 떨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에요. 담대하라. 자, 10절

(이사야 7: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사야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바다 밑에서 구하든지 높은 하늘에서 구하든지

뭐 안 믿어지거든 좀 믿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뭐 여러분 기드온처럼 솜에 이슬이 맺히게 했다가 땅만 말랐다 하든지 뭐 징조를 구하든지 해가지고 좀 믿고 좀 요동하지 말아란 말이죠. 여러분 지도자가 너무 벌벌벌벌 떨고 그러면 밑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아 왕이 안심하라 해도 밑에 있는 사람은 겁낼 텐데 왕이 뭐 저래 벌벌 떨면요 백성들은 얼마나 불안하겠냐고. 아 그랬더니 12절에

(이사야 7: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너무 겁이 많아서 또 하나님을 시험할까싶어서 그것도 또 못한다는 거라. 지금까지 우리나라 목회자들 중에 그 순 엉터리 방언하는 것을 왜 말리지 못했냐 하면 혹시 말렸다가 성령 훼방 죄에 걸릴까 싶어서. 거의 다 그럴 겁니다. 그게 성령 훼방 죄에 해당하는 줄로 알고 말리지도 못하고 그냥 벌벌, 벌벌 떨고 있는 거야. 꼭 아하스 왕 같애. 너무 겁이 많아가지고 바른 말 하지도 못하고.

아 그래서 징조를 구해서라도 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 이렇게 하니까 또 하나님 시험하는 죄를 지을까싶어서 징조도 못 구하겠다는 거야 또. 이런 나약하고 불안하고 겁이 많고 이런 사람이 아하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조금 짜증스럽게 해요. 13절 보세요.

(이사야 7: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다윗 집은 유다 다윗의 후손 왕들을 말하는 거죠.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믿지 않고 벌벌벌벌 떠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거에요 그게. 그래서 네가 징조를 안 구하겠다고 하니까 너 안 구해도 14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그거 이제 징조를 보고 믿겠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까 겁나서 징조를 못 구하겠다 하니까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말씀이 네가 징조를 못 구하겠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네게 주실 것이다. 자, 봐라. 지금 말이야.

보라 처녀가

여기 ‘처녀가’ 라고 돼 있는데 이건요 우리말로 하는 처녀하고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처녀는 동정녀죠. 전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그런 말의 히브리어는요 ‘뻬툴라’라고 하는 말이 따로 있어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이 히브리어 처녀라고 하는 말은 뻬툴라라고 하는 동정의 처녀가 아니고 여기서는 요 그냥 ‘알마’야. 알마라 하면 그냥 젊은 여자야. 할머니는 아니고 그냥 여인이야 여인 그냥. 처녀라는 아무 증거는 없고요 그냥 알마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지금 어떤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이게 예수님 탄생한다는 말이 아니고 아하스왕이 두려워할 바로 그 때에 친히 주께서 징조를 주시는데 젊은 어떤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건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까 어쩌라는 얘기죠? 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하나님이 아람왕과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북왕국 베가하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지금 그 이사야 때에 어떤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거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라.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지어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 그래놓고

(이사야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몇 살이야 그 때가? 이게 악이고 이게 선이다 하는 걸 선택할 수 있으면 몇 살쯤 되는 거예요? 예? 한 12살, 13살. 여러분 만 13살 되면, 한국 나이로 14살 되면 유대인들은 성년식을 해요. 얘는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고 토라를 읽을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많게 봐서 13살, 14살로 봅니다. 더 많게 보면 뭐 14살, 15살.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이르게 되면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젖만 먹는 게 아니고 말이에요.

(이사야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이 이사야하고 아하스왕 시대에 어떤 젊은 여자가 낳은 이 아이, 임마누엘이라고 이름 지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선택할 줄 알기 전에, 그러면 열 두 서너 살도 되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이 두 왕이 누구죠? 아람왕 르신과 북왕국 베가죠. 그러면 이 내용은 이사야하고 아하스 왕 때에 이루어질 일이지 그로부터 700년이나 지나가지고 요셉하고 마리아 사이에서 예수님 탄생하는 예언하고 아무 상관 없는 얘기죠.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뭐 비슷한 면을 갖다가 인용을 하다보니까 이게 무리한 인용이 됐다는 얘기죠 제가.

이런 얘기도 일절 일반 교회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 믿음 흔들릴까 싶어서. 그러니까 이건요 마태가 좀 무리한 인용을 한 것이 분명한데도 그걸 자꾸 우깁니다 사람들이요. 제가 이런 글을 홈페이지에 썼더니 막 그 밑에 달려드는 사람들이 막 아이고 별별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요. 마태가 틀렸다고 말하는 노목사가 틀렸다. 노목사가 틀렸지 어떻게 마태가 틀리겠냐 이렇게 막 어거지로 우기는 거예요. 여러분 마태가 완전한 사람인가요? 마태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 이것뿐 아닙니다. 여러 가지가 더 나옵니다. 이런 이상한 좀 무리한 인용이 많이 나오는데 목적은 선한 거야. 그 유대인들에게 그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그저 예수님 믿게 할까 하는 그런 열정과 욕심과 소원이 너무 지나친 거야. 그래서 항상 조심할 게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목적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무리수를 쓰는 거예요.

믿게 하겠다고 너무 무리한 인용을 해가지고 도리어 더 못 믿게 하는 수가 생긴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을 향한 1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복음서가 이 마태복음인데 어쩌면요 마태가 이런 무리한 인용을 한 것 때문에 그 똘똘한 유대인들이 더 못 믿게 된 것이 아니냐 할 정도로 처음부터 이렇게 무리한 인용을 한다는 거죠.

이제 이사야서 7장 그 14절은 이해가 됐죠? 실제로 그 아하스하고 히스기야 왕 때에 이루어질 일이지 그것도 또 이미 그건 다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다시 보세요. 자 2장 오늘

(창세기25장)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왔다.

박사들이라는 말은 이게 마고스 라고 합니다 마고스. 우리 성경에 보면 왜 술사, 박사 그런 말이 있죠? 바벨론 쪽에 보면 술사와 박사 뭐 이런 사람들을 그때는요 박사가 바로 마고스야. 술사 박사 하는 사람들이 내가 어느 기록에서 오래전에 읽었는데 처음에 4사람이 출발했답니다. 중간에 1사람은 이탈했어요. 도착한 사람은 이름이 기록돼 있는데 메키올이라는 사람하고 가스팔이라는 사람하고 발다사르, 발다사르, 메키올, 가스팔 이 3사람만 박사들이 도착을 했다 그래요. 그리고는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하고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러니까 요즘 와서 이분들을 이해하기는 점성술사가 아니냐. 별을 보고 시대를 분별하는 어떤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 사람들이 그런 별을 보고 따라 왔느냐 하면 이 분들이 다니엘서를 알았을 거라는 거야. 다니엘이 페르시아에 있었잖아요? 고레스 왕 3년까지 있었는데 그 다니엘이 기록한 다니엘 문서를 읽어보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에 대해서 어떤 예언을 연구하다가 하늘의 별을 보고 그 징조를 찾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별이 움직이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셨다는 거죠.

그 별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그 별은 움직이는 속도가 사람 걸음에 맞추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 별은요 움직이는 속도가 사람 걸음걸이하고 비슷하게 보조를 맞췄는가 봐요. 별이 너무 빨리 가버리면 못 따라갈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출발할 때 아마 페르시아에서 출발했다면 베들레헴까지 대체로 보는 기간이 5개월 정돕니다. 뭐 5개월 내지 쉬엄쉬엄 오면 6개월이고 5-6개월 전부터 별이 나타나가지고 예수님 탄생할 때 그 날 밤에 베들레헴 위에 가지 않고 멈추고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예수님 탄생한 그 구유간을 찾아간 거죠. 어떻든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소동이 났다는 겁니다. 아니 그 어떤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가지고, 그 당시에 유대나라는 아주 작은 별 볼일 없는 그런 한 지방정부 밖에 안 되는데 페르시아라고 하면 물론 페르시아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 됐지만 그래도 돔은요 죽어도 돔이라는 거예요. 페르시아는 망한지 오래 됐어도 페르시아는 그 당시에 굉장한 문화를 갖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어떤 또 수준이 낮은 무당이나 점쟁이 이런 수준이 아니고 박사들이 3명이나 별을 보고 찾아왔다.

유대인의 왕으로 누가 나셨다 이렇게 하니까 예루살렘이 왜 소동하느냐. 헤롯왕은 자기가 떳떳하지 못한 왕이잖아요 신분상. 그러니까 백성들에게 어떻게 신뢰와 지지를 좀 받아보려고 뭐 여러 해 째 주전 19년 전부터 성전을 지어가지고 유대인들에게 바치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좋아 하련가 해서 굉장한 공사를 하고 있었죠. 반면에 그 헤롯이 악한 정치인인 건 다 아니까 국민들은 가짜 왕 헤롯 이런 거 말고 진짜 다윗의 자손 메시야, 기름 부은 왕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하고 다 손을 꼽아서 학수고대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소동하고 헤롯은 자기가 떳떳하지 못한데 누가 또 왕으로 났다는 거야 하고 굉장한 소동이 일어났다는 거죠.

그래가지고 유대인들 중에 성경학자 뭐 이런 사람들, 율법학자, 바리새인들, 서기관 이런 사람들을 불러가지고 물어봤겠죠. 4절에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여러분 선지자가 그렇게 말한 건 딱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한 사람. 미가 선지자라는 분이 미가서 5:2절에 딱 메시야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난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한 번만 한 구절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이 서기관들 내지는 대제사장 이런 사람들이 알았다는 거죠. 6절에 보면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가 언제쯤이냐

그렇게 물었다는 거예요. 그럼 뭐 우리가 이까지 오는데 벌써 한 5개월-6개월 걸렸습니다 했을 거 아니요? 그럼 이제 헤롯은 별이 나타났을 때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생각했겠죠. 그러니까 그 탄생한 지가 한 6개월 됐는가보다 뭐 이래 생각 안 했겠어요? 그래가지고 갓난애만 죽이라 한 게 아니고 2살 아래로 그냥 다 죽여라 이런 명령을 했다는 거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괄호 열고 에이~ 거짓말. 전혀 경배할 맘이 없죠. 어떻게 해서 죽이려고 마음먹는 거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그러니까 어떤 분이 말했어요. 처음부터 별을 따라 갔으면 계속 별을 따라 가면 되지 뭘 사람에게 물어가지고 소동을 벌여가지고 괜히 동방박사들이 그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별 의지하고 갔으면 될 걸 갖다가 사람에게 물어봐가지고 깜빡하는 순간에 그 베들레헴 안에 2살 아래 어린아이가 다 죽었다는 거야. 여러분 성경말씀 믿고 따라가면 되지 괜히 사람 말 듣다가 어려움 당하지 말고. 그래서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그 빛이 딱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더 이상 가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황금이라는 말은 ‘크리소스’라는 말이고요 황금과 그다음에 유향과 하는 건 유향은 ‘리바노스’라고 하는 건데 굉장히 비싼 뭐 유향이라고 하는 그 향은 아라비아하고 인도 어디에서 난다는데 식물성을 띠는데 어떤 기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향은 향인데 유향이죠 유향. 리바노스라고.

그 가룟유다 계산방식으로 하면 요만한 옥합 하나에 크지 않았던 모양인데 한 3000만원, 1년 동안 장정이 벌어야 될 만한 비싼 그런 유향과 몰약도, 몰약이라면 ‘스미르나’라는 그 헬라어가 몰약으로 번역됐는데 여러분 우리 성경에 보면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 있죠? 서머나가 스미르나야. 똑같아요. 몰약 이라는 단어하고 서머나라는 단어가 똑같습니다. 그 말이 그 말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든 그 서머나가 몰약과 같은 어떤 향기로운 도시였는지 이름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몰약하고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경배하고 가는데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헤롯에게 가서 우리가 유대인의 왕으로 난 아기를 봤다 하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 해가지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애굽 땅에 가면 아기예수 피난교회라고 하는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그게 진짜인지 그건 모르겠는데 어떻든 그런 기념교회는 저도 몇 번 가봤습니다.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것도 내가 볼 때 좀 무리한 인용 같애요. 호세아서에 나오는 얘기거든요. 호세아서 11;1절에 보면, 저를 보세요. 그런 말이 있는데 호세아가 말한 것은 예수님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그 예언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노예살이하고 있던 것을 그 이스라엘 백성을 내가 애굽에서 불러냈다 하는 과거를 얘기한 것이지 미래를 예언한 게 아니거든요 호세아서 11장 1절이라는 말이 그런데 또 마태가 그 옛날에 무슨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낸 것처럼 그건 애굽으로부터 불러낸 거거든요

그렇죠? 맞습니까?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부른 게 아니고 호세아가 말한 것은 애굽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냈다는 뜻이죠, 맞습니까? 아 그런데 마태가 애굽에서 불렀다는 것은요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을 애굽에서 베들레헴으로부터 부른 것으로 돼 있어 그게. 그러니까 이것도 아무리 봐도 이것도 온당한 인정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끔 마태가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그래요. 성실한 건 좋은데 성실하게 막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려고 하는 마음은 좋아요. 그런데 목적이 선하면요 그 방법도 정직해야 돼. 아니 그 독자들을 좀 무시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든다니까? 아니면 자기가 뭘 잘 몰랐다든지 아무래도 이 인용도 어떻든 개운하거나 석연찮은 그런 면이 있다는 거죠.

하여튼 “이루려 함이라” 목적에 뭐 지나친 욕심 때문에 자꾸 뭐 ‘이루어졌느니라’‘이루려 함이 더 라’하는데 이건 유대인들이, 여기 봐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크게 봐서 2가지로 봐요. 율법과 선지자. 시가서 같은 건 약간 거룩하긴 하지만 그렇게 유대인들이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 율법서, 예언서 이걸 가장 중요시하고 비교적 좀 거룩하다 하는 게 이른 바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런 건 성문서라고 이렇게 구분하거든요. 그래서 율법은 너무 중요하고 예언서를 중시하죠. 그러니까 뭐 그 율법은 뭐 사람이 지키는 것이고 예언서는 이루어진다는 거죠. 이루어진다 해서 자꾸 그 예언된 것이 이루려 함이더라, 이루어 졌느니라 이런 말을 자꾸 쓰다보니까, 너무 많이 인용하려다보니까 무리한 인용이 나온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강의나 책이나 무슨 설교나 이런 중에 무리한 막 여러분 믿게 하려고 사실도 아닌 걸 가지고 막 무리하게 인용하고 이렇게 잘 안 해요 제가요. 마태복음 공부하다가 아 이거 무리한 소리 하면 안 되겠다. 확실한 것만 이야기해야지 목적이 뭐 믿게 하는 걸 목적으로 해가지고 너무 그저 사실도 아닌 걸 자꾸 끌어오게 되면 그런 순순하지 못한 인용이 나온다는 거죠. 그 다음에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것도 또 마음에 안 들어 또. 아니 거 베들레헴에 아이들 죽은 거하고 라마에서 우는 사람하고 그게 무슨 또 예레미야가 한 말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예레미야서 31장에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586년에 이제 580년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유대인들은 남은 사람을 몽땅 마지막으로 포로 잡아 갈 때 어디다 모이라 하냐면 그 라마에 모이라 했어요.

그 때 다 모였는데 잡혀간 사람들 중에 자기 아들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가지고 죽은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니야. 그럼 아들이 없으니까 자기들 살아있어도 무슨 기쁨이 있겠어요. 그래서 그 이스라엘의 어머니 격이 되는 라헬의 무덤이 그곳에 있거든요. 라헬이라는 사람이 옛날에 아무리 남편이 열 아들보다 내가 낫지 아니 하뇨 하고 야곱이 해도 아들이 없으면 위로가 안 돼 그렇죠? 그 때처럼 바벨론 BC 586년에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바벨론 포로 잡혀갈 때 아들이 죽었거나 한 사람들은 그 위로받기를 거절했었다. 라헬이,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어머니들이.

그런데 그것이 그걸로 끝난 것이지 무슨 또 베들레헴에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이들의 엄마들이 슬퍼하는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거ㅖ요 제가 볼 때. 이것도 무리한 인용이야. 그래서 제가 마태가 자꾸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하는 이유가 좀 이렇게 무리한 인용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석연치 않은데 더 웃기는 건 아니 그 마태가 조금 실수했으면 실수한 걸요, 무리했으면 정직하게 고백하면 되는데 무조건 이걸 또 옳다고 우기는 건 내가 또 더 실망이 돼. 제가 이런 문서를 가지고 이제 제가 어떻게 바른말 바른 설교를 뭐 좀 성경대로 정직하게 해놓으면요 그저 목사에게 달려들어서 노목사 당신이 마태보다 옳다는 거냐 하고 덤비는 거예요. 뭐 내가 옳다는 건 아닌데 내가 옳거나 말았거나 상관하지 말고 이게 무리한 인용인 건 사실 아니냐. 그래도 무조건 옳다는 거예요. 성경은 무조건 옳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오늘 낮에 말씀드린 근본주의라는 거예요. 성경을 비평적으로 냉철하게 본문을 살펴보자 하는 입장이 나오니까 거기에 반발하는 심리로 근본주의가 나와서 무조건 옳으니까 딴소리하지 마라는 거예요. 이성이고 뭐고 필요 없어. 영으로 쓴 성경을 이성으로 판단하는 그 자체가 악한 거다 뭐 이렇게 하면서. 그러나 우리 통합측의 신학은요 본문에 고장 날 수 있다. 고장 난 건 정직하게 고장 난 걸로 인식을 하자. 그러나 신앙과 행위에 대해서 우리가 여기에 성경 자체는 의심할 바는 없다. 충분하다 그런 얘기죠.

그래서 지금 벌써 몇 번쨉니까? 지금 1장부터 2장, 3장도 아직 안 넘어가서 좀 무리한 인용이 다비드라는 14에다가 맞추려고 했다는 거라든지, 그 다음에 아까 임마누엘이라는 문제라든지 그렇게 무리한 게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아켈라오 그 헤롯의 아들이

그 부친 헤롯을 이어서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것도 내가 볼 때 마음에 안 들어요. 성경에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예언된 데가 한 군데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만약에 냉철하게 따져보는 유대인들 같으면 성경과 역사를 환히 아는 어떤 유대인들 같으면요, 유대인들 믿게 하려고 마태가 유대인들을 1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쓴 이 마태복음서가 오히려 첫 머리 1장, 2장 안에서 벌써 무리한 인용을 함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오히려 불신을 받지 않았겠나. 유대인을 믿지 못하게 하는 시험들 게 하는 기록이 되지 않았겠냐는 거예요.

어떻든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는 예언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걸 굳이 억지라도 적용을 해보자면요 이사야서 11장 한 번 펴 봐요. 이사야서 11장 1절을 보면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가지라는 말에 동그라미를 하고요 그 밑에다가 ‘네제르’라고 써요 네제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났다는데 그 가지라는 말이 네제르라는 거에요 네제르. 그래서 이 네제르라는 가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난다, 그 가지에서 난 자, 네제르 사람이라는 데에서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냐. 거 무리한 인용이기는 하지만 말은 비슷해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마태가 이렇게 한 것은 네제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가지고 한 가지가 결실한다. 네제르 사람이다 하는 말을 그렇게 인용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학자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나사렛 사람이라는 건 동네 이름이에요 동네 이름 그렇죠? 만약에 예언이라는 게 그렇게 어줍잖게 예언된다면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면 유대인을 믿게 하려고 했던 마태복음이 처음에 너무 욕심이 지나쳐가지고 유대인을 믿게 하겠다는 그 욕심 때문에 인용하면서 구약의 어떤 구절을 합당하지 않은 그런 구절을 무리하게 인용한 것 때문에 오히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시험들 게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여기 신학을 하고 계신 분도 있고 목회자들도 계시는데 여기 또 설교를 듣는 분들이나 신학생들이요 잘 보시고 정확하지 않다든지 사실에 근거한 확실하게 적중된 말이 아니면 함부로 이렇게 인용하거나 목적이 선하다 해서 막 사실도 아닌 걸 가지고 꾸며대는 이야기를 조심해야 돼요. 저는 가능하면 사실이냐. 그것은 사실이냐? 이걸 제일 먼저 따져본다는 거예요.

이루려 함이더라 하는 그 의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무리한 인용이 여러 차례, 벌써 이 짧은 본문 안에서 4번 5번 나왔잖아요? 3장입니다.

제 3장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이것도 또 마음에 안 드는 거거든 이게. 여기 보세요. 이게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거거든요. 그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 있는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을 평탄케 하라는 말이지 지금 세례요한하고 사실 좀 다른 문제거든요 이것도요. 그래서 이건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바벨론에 종 되었던 사람들하고 죄에 종 되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온다. 바벨론에 종 되어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죄의 종 되었다가 예수님께 돌아온다. 어떤 유비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것도 어떤 딱 부러지는 예언과 성취라는 도식에서는 합당하지 않다는 거죠.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그래서 아 그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길을 예비하고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얘기지 예수님 믿을 수 있도록 요한이 와서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님 오는 길을 평탄케 한다하는 것으로 이걸 해석을 하고 인용을 했다면 이것도 역시 다소 무리한 부분이 있다는 거죠.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석청이라는 것은 돌 사이에 집을 지은 꿀벌이죠. 꿀을 먹었다는 거예요. 이건 탄수화물은 그런 고급 탄수화물로 이렇게 공급하고 메뚜기는 단백질원으로 그렇게 먹었다는 거예요. 채소가 좀 없긴 합니다만 그래도 괜찮죠? 정상으로 어떤 사치스러운 그런 음식을 차려놓고 먹지를 못하고 그냥 광야에서 살다보니까 먹는 건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는 얘기에요.

그냥 뭐 허기지면 그저 바위틈에 있는 그 벌은요 이스라엘 땅은 숲이 많이 그리 우거진 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숲이 너무 우거지면 벌이 나는 걸 잘 못 보는데 이스라엘 척박한 땅에 대개 나무들은 키가 작고 풀들은 꽃을 다 피우는데 비가 적게 오는 곳인데 벌이 병에 안 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석청이라는 그런 벌꿀이 상당히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는 석청보다 목청이라는 게 썩은 나무 안에다가 집을 지은 게 많아요. 그런데 워낙 숲이 우거지니까 그걸 잘 못 찾습니다. 어떻든 그런 것을 양식으로 삼고 그냥 메뚜기도 먹고 그랬다는 거예요.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이것도 구약에서는 ‘세례’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엇비슷한 근원을 찾자고 하면 결례, 정결케 하는 절차, 결례, 혹은 조금이라도 부정해졌으면 물로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고 저녁까지 부정하니라. 물로 몸을 씻으라 하는 이런 명령이 있지만 갑자기 세례가 어떤 그 예전적으로든지 회개의 어떤 징표로써 세례 받게 하는 것은요 그야말로 이 세례자 요한 거기서 독창적으로 나온 것이지 구약 성경에서는 딱 부러지게 어떤 세례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갑자기 세례요한에서 기독교로 넘어오면서 세례가 나온 거예요.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이요 회개하고 세례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세례 베푸는 데 와 봤다는 거죠. 뭔지 싶어가지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세례를 받으러 와야지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없으면서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이따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여러분 이건 복음이 아니죠. 이건 두려운 말씀이죠.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이것도 전에 한 번 말씀드렸는데 성령으로 세례 주시고 불로 세례 주신다 하는데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건 구원 얻는 세례고요, 불로 세례라는 것은요 불같은 성령 세례가 아니고 심판의 세례라고 봐요. 알곡은 모아서 성령 세례로 쭉정이는 꺼지는 불로, 여러분 이렇게 봐야 될 텐데 그 뒤에 보면요 그 ‘불로’라는 말이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면 그 뒤에 12절 봐요. 불로 세례가 뭐에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게 불세례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오순절 이 신비주의 사람들은 불 세례가 성령 세례다 이렇게 하니까 이제 완전히 성경을, 그러니까 계속 불 받아라 하고 빠이야~ 빠이야~ 하면서. 여러분 이상한 거 맞죠? 그래서 정말 성도들을 참 이 목사들이 헷갈리게 합니다 오늘날. 말을 줄이는 건 좋은데 요한이 너무 줄여버리니까 또 이것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는 거예요.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마땅할 터인데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여러분 15절 봐요. 요한이 세례를 안 주겠다고했어요. 그렇죠?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당신이 내게로 옵니까?” 하니까 자기가 6개월 아래거든요. 그런데 6개월 아래 되는 분을 보고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되는데 당신이 어떻게 내게 나옵니까 이렇게 한 거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허락을 해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이게 무슨 소리냐. 여러분 예수님이 죄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요.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는 분이에요. 그럼 세례 받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께서 왜 받으려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해석하기를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모범으로, 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범으로 죄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다 받으라 하는 모범으로 했다 그렇게 하기도 하고요, 또 어떤 분들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례 받을 이유도 없고 세례 받을 마음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너무 경건해. 너무 경건해가지고 “형님, 형님도 갑시다. 세례 받으셔야 돼요.” 어떻게 야고보가 애를 태우고 보채는지 이렇게 해야 집안이 편안하다. 야고보라는 사람은 항상 예수님은 좀 불경건하다. 너무 자유주의다. 예사로 그저 장로의 유전 같은 그런 정통을 예사로 예수님께서 무시해버리거든요. 야고보가 볼 때 예수님이 너무 자유하다는 거죠.

그래서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세례만큼은 우리 가족이 다 함께 가서 다 받읍시다 하고 야고보가 막 너무 우겼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무 세례 받을 이유도 없고 세례 받을 마음도 없었지만 집안이 편하기 위해서 받았다는 거예요. 이와 같이 하여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요한도 마지못해서 그저 예수님이 너무 원하니까, 그런 해석도 있는 거예요.

문제는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여기에 3위가 함께 조우하는 것 같아요 그렇죠?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또 땅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시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처럼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는 거예요. 그 3위가 함께 조우하는 장면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여러분 그냥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고요, 이게 공식적으로 하면요 대관식 용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 다윗에게 아들이 19명이 있어요. 그러면 그 아들 중에 누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왕통을 이을 것이냐 하고 초미의 관심이 모아졌을 거 아니요? 그럴 때에 이제 다윗이 누워가지고 “솔로몬, 이리 오너라. 자리에서 일어나라.” 하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면 그게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는 황태자가 되는 거예요.

대관식으로 할 때. 이 공식 법정용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다윗의 자손 왕으로 지명하고 인정하는, 확정적인 말씀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뭐 시편 2편에 나오는 말이죠? 이것이 보통 얘기가 아니고 굉장히 중요한 선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음성을 하늘로부터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태복음서 앞에 너무 무리한 인용한 것은 우리가 좀 삼가고 우리가 혹시 마태 같은 그런 실수하지 않도록, 무리한 인용, 예화도 또 무리한 예화 이런 건 조심해야 돼. 성경에 있는 정직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말아야지 자꾸 구약에 있는 걸 갖다가, 제가 볼 때 무리한 인용이 지금도 많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겁니다. 이런 것도 일반 설교에서 보면 무리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얘기가 성경에 기록된 그 본문에 기록된 원 목적을 설교하라. 그 본문이 기록된 원 목적을 전해야지, 거 왜 자꾸 사람 목적을 갖다가 거기다가 희석해가지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목사 말이 돼가지고 성경 말씀이 전달되면 이건 곤란하다는 거예요. 성경말씀에 있는 그대로가 더하거나 빼지 않고 훼손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고 전달되는 이것이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설교라는 거예요. 그것만 하면 충분합니다. 괜히 억지로 억지해석을 해가지고 억지인용을 해가지고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믿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이제 세례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공생애에 들어가기 위한 한 관문이죠. 그 다음에 세례 받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제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시는데 제가 놀라웠던 것은요 얼마나 시험을 하느냐. 아브라함도 시험하시고 이삭도 시험하고 야곱도 시험하고 요셉도 시험하고 다윗도 시험하고 솔로몬도 시험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까지도 쓰시려고 할 때 반드시 강도 높은 시험을 거쳐서 쓰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출발할 때 정상적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삶을 헌신하려고 하면요 이런저런 시험이 있는 게 당연한 거예요. 큰 을 하는 사람은 더 큰 시험을 거쳐야 돼요.

그 시험에, 이 모든 시험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사명도 주어지고 능력도 주어지고 또 생명의 면류관도 주어집니다. 그것이 시련이든 테스트든 검증이든 간에 모든 시험과 시련을 이겨야 돼요. 이것이 야고보서에 나오는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또 이 모든 시험에서 우리가 이겨야 돼요.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크고 작은 시험 그걸 못 이겨가지고 시험 들었네 교회 안 나오니 뭐 그런 사람 가지고는 주님 따라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의 길로, 좁은 길로 따라가려고 할 때 여러 번, 여러 차례 이런 저런, 신앙의 한 단계, 성장하는 단계마다 만만치 않은 그런 시험들이 있다는 거예요. 시험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야. 그건 면접도 안 보고 무시험으로 갑니다. 이미 지은 죄만 가지고도 내신 성적으로 충분히 지옥 갈 수 있다고. 왜? 천국의 계단마다 이런 저런 시험이 있을 때 우리가 모든 시험에서 이기고 그리고 영광에 참예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마태복음 안에서 평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습니다. 마태의 선한 열심히 무리한 인용을 더러 했지만 아무 악의가 없었고 그는 정말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알게 하려고, 믿게 하려고 이런 말씀을 쓴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에 전도하는 것 좋지만 무리한 방법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또 우리의 성실한 삶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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